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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글러, '빼앗긴 대지의 꿈'

딸기21 2015. 3. 1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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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태생의 학자로 저술가이자 인권운동가, 유엔 외교관이기도 했던 장 지글러가 쓴 <빼앗긴 대지의 꿈>(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을 읽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나 <탐욕의 시대> 같은 책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이 책이 지글러의 첫 책이다.



오늘날 빛은 더 이상 유럽에서 오지 않는다. 모리스 뒤베르제는 유럽 국가들의 퇴화를 예고했다. 역동적인 동시에 놀라운 창조력을 발휘하는 생산 방식이 지도자 계급의 정복 의지와 즉각적인 금융적 이익 추구에 발목이 잡힌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을 급성장시킨 계몽주의의 빛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자신들의 국가 내부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하지만 이들 국가 헌법의 토대를 이루는 민주주의적 가치는 각 나라의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소수 지배 세력의 이익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이들 국가의 대외 정책을 이끈다. 남반구 주민들의 고통과 상처 입은 기억에 무심하며, 이들의 사과와 보상요구를 묵살하는 서양은 눈이 멀고 귀도 먹은 채 자기 민족 중심주의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희망은 에콰도르의 아마존 삼림에서, 페루에서, 볼리비아의 고원 지대에서, 그리고 이보다는 미약하나마 브라질의 거대 도시에서 우리에게로 전해진다.

(17쪽)

이쯤에서 나는 하나의 가정을 세워본다. 구소련의 붕괴와 공산주의에 가해진 불신이 일종의 블랙홀을 만들어냈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해방이라는 전망까지도 한꺼번에 매몰시켜버렸다. 항거라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기억, 새로운 소망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조차도 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권 선언과 그 실천 사이의 괴리가 오늘날처럼 증오를 키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139쪽)

'서양'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 비아프라 전쟁을 비롯해 나이지리아 상황이 많이 소개됐는데, 여기도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 자료 삼아 일단 스크랩해둔다. 


비아프라 전쟁은 서양의 나이지리아 주민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는 전형적인 예다. 독립을 쟁취하게 된 1960년 무렵 나이지리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산지, 원양유전 등은 영국계와 네덜란드계 석유회사, 가스회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은남디 아지키웨는 이러한 독점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유럽의 다른 기업들에게도 권리를 이양했다. 덕분에 프랑스의 엘프아키텐이 특별히 혜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야쿠부 고원 대령이 일으킨 쿠데타로 엘프아키텐에 이양되었던 사업권은 1966년 7월 29일자로 해지되었다.  

분노한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 석유 기업의 나이지리아 철수를 수락할 수 없다고 맞섰다. 드골 대통령은 나이지리아의 이웃인 가봉에 막강한 기지를 구축하고 있는 프랑스의 비밀정보부대에 “프랑스의 전략적 이익”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이렇게 해서 1967년 5월 30일, 이보족 출신의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 사령관 오두메구 오주쿠 장군은 영토분리를 선언했다. 실상 신생독립국 선언은 프랑스 비밀정보기관이 주동이 되어 일구어낸 성과로, 이곳 주민 대다수는 분리에 적대적이었다. 

엘프아키텐은 제네바에 본사를 둔 홍보대행사 마켓프레스에 세계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의뢰했다. 마켓프레스가 세운 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에 경도된 군인들이 기독교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몸을 피신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새로운 나라 비아프라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르네 폴크 대위의 지휘를 받는 프랑스 용병 부대 장교들은 오주쿠의 군사들을 엄호했다. 전쟁은 30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끔찍한 학살이 이어졌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망자 200만 명, 사지를 절단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자 수백만 명, 불타버린 도시와 마을이 수백 개. 그 후 엘프아키텐의 기업주와 경쟁사들은 회해했다. 1970년 1월 12일 나이지리아의 석유와 가스를 나눠 갖기 위한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다. 

전쟁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봉으로 잠시 유배 갔던 오주쿠와 휘하의 장군들은 라고스 대저택으로 돌아왔다. 최고사령관은 이들의 일시적인 궤도이탈을 용서했다. 비아프라에서 신음한 주민들은 애꿎게 죽어간 혈육을 장사지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156쪽) 


정말로 재미있었던 것은 볼리비아 여행기를 담은 뒷부분이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취임식과 그 후의 에너지 산업 장악 과정을 생생히 소개했는데, 아주 흥미진진하다. 


1571년에는 대대적인 농민 항거가 중앙 안데스 산맥 일대를 휩쓸었다. 최후의 잉카족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투팍 아마루라는 자가 항거를 이끌었다. 투팍 아마루는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교수형에 처해졌다.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광산이 가장 강력한 항거의 중심지가 되었다. 1776년,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이끄는 집단이 광산 노예, 특히 포토시에서 미타(mita. 노예를 동원한 광산 채굴)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농민과 광부 수만 명이 이들의 부름에 동참했다. 호세 가브리엘은 스스로를 투팍 아마루 2세라고 칭했다. 페루에서 투팍 아마루2세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 훌리안 아파사라는 스물일곱 살의 아이마라족 젊은이가 나타나 투팍 카타리라는 이름으로 저항을 외쳤다. 이번에는 부왕의 영지 남부 고원지대, 즉 현재의 볼리비아 중심으로 저항이 확산되어나갔다. 

훌리안 아파사가 남긴 최후의 발언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도 케추아족이나 아이마라족 공동체에서 밤샘이라도 하는 날이면 꾸준히 전해 내려온다. 자신의 목을 베려는 형리에게 젊은 투팍 카타리는 “당신은 그저 나 하나를 죽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때의 나는 혼자가 아니라 수백만 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안데스 고원 지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야말로 투팍 카타리의 환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8쪽) 


남아메리카 최초의 인디언 대통령 취임식 행사는 2006년 1월 21일 토요일 티와나쿠에서 열렸다. 몸놀림이 청소년같이 날랜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는 풍성한 검은 판초를 입고 있었다. 빨간색, 녹색, 노란색(볼리비아국기 색)의 리본이 마치 화환처럼 그의 목과 어깨를 장식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에보 모랄레스에게 아카파나 피라미드 뒤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여러 개의 가마 중 하나에서 그날 아침에 구운 커다란 빵, 즉 어머니 대지인 파차마마의 빵을 내밀었다. 에보는 그 빵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대지의 여신에게 복종한다는 표시였다. 에보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선출된 인디언 출신 대통령이다. 서양인은 그 사건이 안데스 인디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500년 동안의 굴욕과 수모, 고통이 이날 아침 티와나쿠에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공식적인(혼혈식, 백인식)’ 취임식은 다음 날 무리요 알라파스 광장에 자리 잡은 우스꽝스러 운 벽시계가 달린 거대한 백색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파차마마의 아들의 진정한 취임식은 이곳, 안데스인들의 신성한 도시인 티와나쿠의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 아래서, 그 태양의 신이며 아버지인 타이타 인티의 뜻을 전하는 사제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이루어졌다.

“볼리비아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전 세계의 원주민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티와나쿠에서, 볼리비아에서, 원주민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평등과 정의를 찾아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겁니다. 나는 오늘 감격으로 마음이 벅찹니다. 우리는 민족의 단결과 힘을 통해서만 식민지 국가를 청산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 성스러운 장소 티와나쿠에서 원주민과 볼리비아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전체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214쪽) 


에보 모랄레스는 농부와 광부, 도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해당하는 사회주의운동당인 MAS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했다. MAS의 중심 세력은 코카렐로, 즉 코카를 재배하는 자들의 조합이다. 에보 모랄레스는 MAS가 내부 갈등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조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를 승리로 이끈 숨은 공신은 정치적인 조직이나 정당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신비하고 훨씬 심오한 무엇이었음도 잘 알고 있다. 그 ‘신비하고 심오한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의식과 정체성, 조상에 대한 기억이 불러일으킨 일종의 반란이었다. 


(215쪽)


에보 모랄레스와 서양의 결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티와나쿠 연설에는 국제적인 연대를 호소하는 대목도 있다. 

“나는 아메리카와 전 세계 형제들에게 우리가 단결하고 조직화하면 대다수 국가들의 상황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하는 현재의 경제 정책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자본을 소수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류 전체를 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본을 소수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은 전 세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자원을 민영화하고 경매를 통해 팔아넘김으로써 양산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투쟁은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의 투표 덕분에 볼리비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아이마라, 케추아, 모헤뇨들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에보 혼자만 대통령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대통령입니다.” 


(217쪽)


'에너지 주권회복'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모랄레스가 지난해에 3선에 성공했는데, 국민들로부터 왜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더불어, 모랄레스의 에너지산업 장악 과정에서 여러 이웃들 특히 노르웨이가 했던 역할에 눈길이 간다. 


권좌에 오르자마자 에보 모랄레스는 세 가지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첫째 광산, 석유, 농업에서 파생되는 부의 재탈환. 둘째, 가난과의 전쟁. 셋째, 식민지 국가 타파 및 민족국가 수립. 세계 역사상 이처럼 엄청난 사유재산권의 이동이 이토록 신속하게 이루어진 예는 일찍이 없었다. 

2006년 5월 1일 새벽, 내각 구성원들을 태운 볼리비아 군대 소속 비행기가 라파스에서 남쪽으로 120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파리로 향했다. 대통령과 그를 수행하는 일행이 산알베르토 가스시설 입구에 도착하자, 업체의 대표가 달려 나와 대통령에게 어느 가스 생산지역을 방문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에보 모랄레스는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나는 이곳을 잠깐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볼리비아 국민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시설을 관장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업체 대표를 비롯한 서양 간부들은 알제리와 노르웨이 출신 엔지니어들이 모랄레스 대통령의 방문에 앞서 이곳을 찾았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이들은 볼리비아 국영 석유기업인 YPFB의 이름으로 안전 검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시설을 구석구석 방문했다. 그런데 사실상 이들 전문가들은 업체의 소유주나 간부,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가스 생산설비의 작동을 중지시킬 수 없도록 고안된 고도의 첨단 장비를 은밀하게 장치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2006년 5월 1일, 같은 날 볼리비아 전역에서는 볼리비아 군 특수 부대가 석유와 가스산지, 펌프 설비, 정유 공장, 각종 작업장, 파이프라인 전자 제어실, 철도청 차고지, 버스터미널, 외국 기업들의 경영 담당 사무실, 통신센터 등을 일괄적으로 접수했다. 일명 ‘에너지 주권 회복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6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2005년12 월 선거에서 승리한 다음날부터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임 대통령 산체스 로사다에 의해 거의 해체된 YPFB는 당시 빈껍데기 상태였다. 에보는 우방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도 든든한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노르웨이 측의 협조는 다소 뜻밖인 면이 있었다. 북해 심해에서 석유 채취가 시작된 이후, 노르웨이는 석유 시추와 경영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정 평가 능력을 쌓았다. 루터파 신앙이 지배적인 이 나라의 지도자들(당시 스톨텐베르그가 이끄는 노동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과 국민들은 국제 정치 분야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볼리비아로 자국의 엔지니어들을 파견하겠다고 응답했다. 뉴욕의 비싼 변호사들을 사서 볼리비아가 외국 석유가스 기업들과 새로이 체결하게 될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맡았다.

노르웨이 전문가들은 특히 기초적인 숫자 정보를 제공했다. 이들은 석유와 가스의 생산 지역별 수익성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바꿔 말하면, 볼리비아 정부가 어떤 명확한 조건(세금, 로열티 등)을 제시했을 때, 외국기업들이 주주들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만큼의 이익을 낼 수 있는지를 계산한 것이다. 에보 모랄레스는 승리를 쟁취했다. 노르웨이 전문가들의 치밀하고 끈질긴 작업 덕분에 볼리비아 정부는 정확하게 어느 선까지 갈 수 있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양회사들이 수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손에 쥐고 협상에 나섰던 것이다. 


(229쪽)


2006년 5월 1일에 발효된 제28071호 법령, 일명 ‘에너지 주권 회복’ 법령은 세 개의 각기 다른 층위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우선 볼리비아의 모든 석유와 가스 생산지는 국가의 소유라고 못 박는다. 그러나 이를 채취하는 데 필요한 설비(파이프라인, 펌프장, 통신 센터 등)는 이를 설치한 기업의 소유이며, 따라서 기업은 이들 시설을 유지, 보수,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국가가 일반적으로 엄청난 비용이 드는 탐사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비용의 일부를 부담한다. 배럴 당 판매 가격의 18퍼센트는 생산자인 기업에, 나머지 82퍼센트는 국가에 귀속된다. 


(230쪽)


브라질의 국영 석유 기업인 페트로바스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가스 사업자 중의 하나다. 2006년 5월 2일 아침,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수도에서 볼리비아가 추진하는 ‘에너지 주권 회복’ 작전을 충분히 이해하며, 페트로바스의 경우 그로 인한 재정적인 부담을 기꺼이 수락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페트로바스가 볼리비아의 입장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하고 이를 즉각 수락하자 토털, BP, 레프솔, 엑슨, 브리티시가스 등을 비롯한 서양기업들은 자국 내에서 반대 여론을 형성한다거나 정부를 설득할 시간, 명분, 그 어느 것도 확보할 수 없었다. 


(231쪽) 


육중한 회의 테이블 뒤쪽 벽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액자 속에 눈에 익은 세 가지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볼리비아의 문장과 녹색·노란색·빨간색 리본으로 정식된 칼을 찬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그리고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초상화 세 가지였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렇다면 에보 모랄레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펠리시다드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식수 담당과 가축 담당, 총무, 부회장이 모두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혼혈 장군들은 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에보는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253쪽)


볼리비아와 '유럽에서 온 파시스트들'의 관계도 눈에 띈다. 나치 잔당들은 주로 아르헨티나 등지로 간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볼리비아에는 특히 우스타샤와 철십자단(동유럽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갔구나...


옛 유고연방 내전 때 보스니아 등지에서 '인간 사냥 관광'이 유행한다는 끔찍한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서양 관광객'들이 보스니아로 가 현지 주민들을 총으로 '사냥'하는 관광상품이 있다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뉴스였는데, 그 실체가 바로 이들, 볼리비아의 우스타샤들이었던 모양이다.


서양은 물론 보복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을 통해서 보복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볼리비아는 1945년 이후 저지대 인근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로 활약하던 인물들,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루마니아의 철십자단원을 비롯하여 헝가리,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둥지에서 온 파시스트 범죄자들을 받아들였다. 

1996년 12월 12일, 미국 정부는 51년 동안 비밀리에 보관해오던 문서 한 건을 공개했다. 이 문서는 아메리카 대륙삼각지(SS와 그들에게 자금을 대던 금융계 및 산업계 거물들은 아르헨티나 북쪽의 미시오네스 지방, 파라과이 강 유역, 그리고 볼리비아의 저지대를 연결하는 지역을 점찍었다. 이 세 지점을 잇는 삼각형을 그려보면, 산타크루스가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을 알 수 있다)로 이송된 나치 소유 재물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 베니, 판도 지방에서는 독일 측 대리인들이 1944년부터 이미 대규모로 토지, 농가공 업체, 목축업체 혹은 운송업체들을 사들였다.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정권 (페론 시기의 아르헨티나도 포함된다)에서는 구 SS 조직원들이나 게슈타포, 우스타샤들이 정부 요직에 오르기도 했다. 몇몇 악질 범죄자들은 볼리비아의 비밀첩보조직이나 경찰에서 맹활약하기도 했다. 


(267쪽) 


볼리비아 오리엔테 지방에는 토지가 풍부하다. SS나 게슈타포, 우스타샤, 루마니아 철십자단에 속했던 자들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이 광대한 대목장이며 파라과이 강을 오가는 선박단, 화학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나 이들은 자신들이 ‘원숭이’라고 부르는 인디언이나 유대인, 흑인들에 대해 병적일 만큼 인종차별적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 산타크루스의 새로운 과두 지배집단에서 우스타샤들은 매우 독특한 소수 집단을 이룬다. 다른 은둔자들의 자식들과는 달리 이들은 유럽 내부에서의 각종 정치적·군사적 작전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269쪽) 


나는 1996년 린다우에서 보낸 어느 더운 여름날을 기억한다. 모스타르 시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로 분열되었다. 1566년 오스만 제국 시절에 건설된 네레트바 강 유일의 아치교는 크로아티아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당시 모스타르 주재 유럽연합 특사로 일하고 있던 한스 코슈니크가 근심거리를 털어놓았다. 

“모든 결정은 자그레브 대통령궁에서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에서 내려지니까요. 볼리비아의 우스타샤들이 모스타르 크로아티아 용병들에게 지금을 대줍니다. 이들은 세계 무기 시장에서 최첨단 대포, 가장 성능 좋은 기관총, 박격포들을 구입합니다. 수백 명의 젊은 볼리비아 우스타샤들이 휴가철이면 대서양을 건넙니다. 이들은 네레트바 강 주변으로 몰려와 이슬람 신자 사냥에 나서죠. 그 젊은이들의 민족주의는 완전히 맹목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71쪽) 


우스타샤들에게 에보 모랄레스는 반드시 거꾸러뜨려야 할 적이다. 소수파로 밀린 과두 지배집단은 볼리비아의 9개 도 가운데 산타크루스, 타리하, 코차밤바, 추키사카, 베니, 판도, 이렇게 6개 도를 따로 떼어낼 것을 주장한다. 이 6개 도는 석유와 가스자원이 집약되어 있으며, 볼리비아 농가공 산업의 중심이다.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 살고 있으며, 주민의 대다수는 백인과 혼혈인이다. 극우 용병들은 분리를 주장하는 이들 6개 도에서 주로 활동한다. 이들 용병들은 하나같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인디언을 ‘문명의 적’으로 간주한다. 


(273쪽)


책은 좀 어수선하지만 눈여겨 볼 대목들이 많아 재미있었다. 실은 읽은 지 좀 됐는데 정리하지 않고 팽개쳐두고 있다가 다시 펼쳤다. 역시 책은 다시 펼치는 맛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