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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앤 더 시티

딸기21 2015. 4. 10.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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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앤 더 시티 

제니퍼 코크럴킹. 이창우 옮김. 삼천리



아주 재미있다. 번역 문장이 매우 엉성하지만 지나쳐가며 읽으면 되고. 내용이 뭐랄까, 신난다!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은 내용.


산업적 식품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의 빈민에게 식량을 공급하여 기아를 퇴치하고 세계의 굶주림을 끝내겠다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저 문제를 엄청나게 크게 키웠을 뿐이었다. 지구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쥐어짜듯이 엄청난 농직물을 생산하면서 토양이 고갈되고 침식되었다. 문제는 그동안 누구는 과식을 하고 누구는 영양실조에 걸리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유전자변형(GM) 식품과 농직물을 전 세계의 기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사람들한테서 똑같은 주장을 듣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중산층이 노동 빈곤층이 되고 빈곤층은 극빈자가 되고 있는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다. 2008년과 2009년, 5020만 명의 미국인은 식량보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수치에는 그러한 가정에 사는 어린이 1720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95년 이후 미국 내 식량보장 문제를 추적해 온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소(ERS)는 이 수준이 “1995년 전국 대상 식량보장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보고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인들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식품점까지 이동해야 하는 평균 거리는 10킬로미터 가까이 된다. 멀고 값싼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좋은 먹거리는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21쪽)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공터 텃밭 경작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도시 대부분에서 이루어지던 조직적인 운동이었다. 식품을 돈 주고 살 형편이 안 되는 가정이나 개인을 위한 일종의 푸드뱅크 구실을 했던 것이다. 전쟁 중에는 도시에서 텃밭을 경작한다는 아이디어가 구호 차원의 ‘승리 텃밭’(Victory Garden) 운동과 더불어 벌이는 후방 지원으로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 찰스 래스럽 팩이 내놓은 <승리의 전쟁 텃밭>(The War Garden Victorious)에 따르면, 미국에 “그런 텃밭이 5,285,000개나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시 먹거리 재배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으로 떨어졌다가 대공황 기간에 ‘구호 텃밭’과 함께 되살아났다. 10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승리 텃밭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미국 농무부는 <승리 텃밭>이라는 20분짜리 공익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 영화는 가족들을 ‘징집해’ 후방 지원 역할을 하는데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의 시민농부 대량 동원은 무척 성공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미국의 사유지와 공유지에 조성된, 집 뒤뜰 크기의 승리 텃밭 2천만 군데에서 전국 채소의 40퍼센트가 생산되고 있었다. 


(47쪽)

 

푸드마일, 연료, 고속도로

 

1990년대는 슈퍼마켓이 규모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10년이었다. 슈퍼마켓은 세계무역이 늘어나고 식품 가격이 떨어지는 현상과 더불어 성장했다. 슈퍼마켓이 대형슈퍼가 되었고 식품 판매 대형마트가 도시 확산을 쫓아서 점점 더 바깥으로 나갔다. 무역 자유화 탓에 세계 시장에는 한층 더 싼 상품작물이 넘쳐났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져 풍년인데도 종자와 비료, 기계에 들어가는 비용은 농민이 작물을 팔아 얻는 수입보다 더 많았다. 1990년대는 식품이 정말 먼 거리를 이동하기 시작한 10년이었다. 세계적 식품 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66쪽)

 

피크랜드

 

대우로지스틱스는 2008년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옥수수와 야자유 농장용으로 토지 130만 헥타르를 99년간 임대하는 것을 허가하는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계약으로 대우가 마다가스카르 농지의 절반을 이용할 권리를 얻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계약이 취소되었다. 대규모 항의 시위에 떠밀려 정부는 이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원인은 토지 수탈의 대담한 규모였던 것 같다. 하지만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오늘날에도 다른 토지 거래들이 전례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날마다 토마토 30톤과 자연상태의 신선한 농산물 수백 톤이 에티오피아의 아와사를 떠나 아디스아바바로 향한다. 20헥타르에 걸쳐 있는 이 에티오피아 최대 온실재배 기업은 99년간 임차한 토지 1,000헥타르를 차지하고 있다. 이 농산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에티오피아에 남지 않는다. 이 농산물은 바로 그날이나 이튿날 석유가 풍부하나 물이 부족한 중동 국가들의 가게에 진열된다. 에티오피아의 대규모 온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억만장자 셰이크 모하메드 알 아무디가 소유하고 있다. 그는 투자 대상을 유전에서 토마토와 감자로 바꾸고 있는 ‘석유 군주’ 가운데 한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소비자용으로 향후 몇 년에 걸쳐 쌀과 밀, 채 소, 꽃을 재배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50만 헥타르의 토지를 취득하려는 계획의 첫 단계인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5050만 헥타르의 토지를 부유한 나라가 외부 위탁으로 경작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곡물의 70퍼센트를 수입하며, 아프리카는 신식민주의적 토지 수탈이 벌어지는 곳이다. 


(87쪽)

 

첫 번째 물결

 

1992년 ‘지속가능한 농업·식량·환경’(SAFE, Sustainable Agriculture, Food, and Environment) 연합 의장 팀 랭은 글로벌 식품 체계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랭은 소비자를 겨냥해 상품 라벨 정보에서 무엇이 빠져 있는지 알게 하면 이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랭과 SAFE 동료들은 먹거리가 생산지와 최종 소비자 사이에 이동한 거리를 약칭하는 ‘푸드마일’(food mile)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세계화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1986년 맥도날드가 로마의 랜드마크이자 공공집회 장소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광장 옆에 매장을 열었다. 이것은 “도가 지나친 식당이다. 이방인이 성문 안에 들어와 있으니 무슨 조치가 취해져야 했다” 통찰력 있는 푸드 저널리스트 칼 오너리는 이탈리아식 삶의 정취와 관습이 값싸고 빠르며 뻔한 것들에 압도당하게 될 미래를 보았다. 음식문화의 세계화와 동질화라는 이 모욕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으로 카를로 페트리니와 동료 패스트푸드 반대자들은 ‘슬로푸드’라는 이름을 택했다.

 

두 번째 물결

 

첫 번째 물결은 몇몇 계몽된 식품 소비자를 일깨웠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이 산업화된 장거리 식품망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쇼핑객들은 주요 식품점 체인들이 로컬푸드를 더 많이 갖다 놓아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03쪽)

 

도시농장은 1970년대 런던에서 나타나 브리스틀로 퍼졌다. 가장 오래된 곳은 런던 도심부 킹스크로스 지역인 캠든 한복판에 1972년 만들어진 켄티시타운 도시농장이다. 도시농장·공동체텃밭협회(Federation of City Farms and Community Garden)에 따르면, 공동체텃밭 및 파수원 1000곳과 점점 늘어나는 회원제 얼로트먼트 가든이 있고 200곳이 넘는 도시농장과 공동체텃밭이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도시농장은 범죄나 빈곤에 빠져들 위험성이 큰 사회 취약계층 청소년과 신체나 정신장애가 있는 사회복지 수혜자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용 사회 원예와 농업 프로그램에서 들어오는 수입과 민간 또는 공공기금에 의존하고 있다. 


(150쪽)

 

얼로트먼트 경작이 요즘은 많은 사람에게 여가 활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국에서 그 역사는 토지 없는 빈민에게 주는 사회적 특혜로 시작되었다. 17세기에 영국 내전으로 정치적·사회적 격변이 벌어졌고, 가난한 농민한테서 토지를 몰수하는 바람에 19세기의 도시 인구 증가로 이어진 18세기의 공유지 인클로저가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1887년의 얼로트먼트 법 제정으로 얼로트먼트를 시민의 권리로서 인정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립서비스 구실을 했다.


1907년과 1908년에 제정된 ‘소규모 경작지와 얼로트먼트 법’(Small Holdings and Allotment Act)을 시작으로 얼로트먼트 개념은 마침내 필요한 법률을 갖게 됐다. 1800년대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영국의 얼로트먼트 구획은 25만 개에서 150만 개로 급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농업부가 후원한 ‘승리를 위한 경작’(Dig for Victory) 운동은 전쟁으로 초래된 궁핍과 1954년까지 이어오던 식량 배급이라는 유산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것 같았다. 농업부는 1941년에 약 130만 톤의 식량이 얼로트먼트에서 생산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다른 우선적인 도시 개발을 위한 토지 이용 압력에 무너지면서 1970년이 되자 얼로트먼트는 50만 구획 정도로 급감했다. 1999년에 영국에는 얼로트먼트가 25만 개 정도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10년 간 얼로트먼트 수요가 눈에 띄게 되살아났다. 


(156쪽) 

 

오늘날의 파리

 

‘게릴라 가드너’ 한 무리가 1999년 과거 공업 용지였던 곳에 불법으로 텃밭을 조성했다. 몇 년 후에 ‘녹색 손’(La Main Verte)이라는 프로젝트가 공식 승인을 받았다. 2001년의 선거에서 당선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이 벨리브 자전거 공유 프로그램과 시 전역에 걸친 원예용 살충제 사용 금지 같은 도시재생·녹화 사업을 지원했을 무렵이었다. 


(116쪽)


앨릭스 스미스는 1970년대 초 건축을 배우러 런던 도심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곧 개발업자들이 런던의 특정 지역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해 달아나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다. 유령회사들은 으레 부동산을 매점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고의로 파손하고 나서 대규모 재개발 부동산으로 변화시켰다 이렇게 고의로 방치된 건물 하나가 붕괴되면서 보행자 두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런 상황에 도덕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 없이 그곳에 사는 것이었죠.” 재개발이 예정된 이 지역에서 불법 무단 점유자가 되기로 한 그는 돈 한 푼 없이 1년간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길거리에서 2파운드짜리 지폐를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그는 친구의 트럭을 빌려 런던 남서부의 채소와 과일이 유통되는 대규모 시장인 뉴코벤트가든 마켓 차량 입장료를 지불하는 데 그 돈을 썼다. 그는 노점상의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며 팔리지 않았거나 팔 수 없는 과일과 채소를 주워 담았다. 살고 있던 불법 거주 건물에 돌아온 그는 그 과일과 채소를 팔아 5파운드를 벌었다. 그 다음에는 그 5파운드를 시장에 다시 돌아가는 데 사용했다. 이번에는 무단 점유 공동체에 팔기 위해 더 많은 먹거리를 주워 모았다. 다음 주에는 시장에서 통밀가루를 약간 사서 무단 점유자 거주지에 방치되어 있던 오븐에서 빵을 구웠다. 되팔기 위해 쌀이나 말린 콩 같은 다른 천연 식품도 샀다. 알라라 훌푸즈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73쪽)


토론토는 단연 세계 최고의 다문화 도시로 해마다 신규 이민자 55,000명을 받아들이고 있다. 주민 240여만 명의 51퍼센트는 타지 출신이다. 이 도시의 인구 구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량보장에 대한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푸드셰어의 사무국장인 데비 필드는 “이민자의 도시에서는 사과처럼 망고도 흔히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대개 캐나다 출신의 식품 소비자보다 훨씬 더 신선한 농산물을 중요하게 여기는 계층인 이민자 때문에 신선하고 다양한 농산물에 대한 문화적 수요가 높다. 


(267쪽)


‘나무에서 멀지 않은’(Not Far from the Tree)의 창립자 로라 레인스버러는 도시를 바라보는 그녀의 방식을 ‘과일 고글 쓰기’ 라고 설명한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바로 그녀의 코앞에 있는 도시 과일 생산의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협곡과 도시 공원과 사유지에 있는 과일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하나로 엮어 보니 도시 숲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도시 과수원 같았다. 


도시 과일 줍기는 토론토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과일 줍는 단체의 수가 모든 도시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로스앤젤레스의 ‘푸드포워드’(FoodForward)는 2009년 창립한 이후 로스앤젤레스의 도시지역에서 197,000킬로그램의 과일을 따서 100퍼센트 기부했다. ‘포틀랜드 과일나무 프로젝트’(Portland Fruit Tree Project)라는 단체도 있다. 북아메리카 전역의 푸드뱅크가 과일 줍기 팀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멀지 않은’은 노르웨이 단풍나무나 도시에서 자라는 여타 당분 생산 나무의 수액을 채취하기 위해 ‘도시의 시럽’(Syrup in the City)이라는 수액 채취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만약 공원이 햇볕 좋은 오후에 산책을 나가 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다른 사람이 훤히 보는 앞에서 아작아작 씹어 먹을 수 있는 곳이 된다면? 이것이 토론토 벤 노블맨 공원의 아홉 그루 과일나무가 심겨 있는 공공 과수원이나 더 서쪽 앨버타 주 캘거리의 공공 과수원처럼 일부 도시들이 실험하고 있는 시영 공공 과수원 뒤에 있는 발상이다.


(287쪽)


갑작스런 식량 파동이 한 나라 전체의 산업화되고 화석연료 의존적이며 세계적으로 상호 연계된 식품 체계를 덮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1980년대에 화학비료 130만 톤과 8천만 달러 어치의 살충제가 국가가 관리하는 쿠바의 초대형 농장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설탕은 엄청난 양의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충제, 트랙터의 도움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대규모 설탕 운송 터미널에서는 하루 7만5천 톤까지 선적할 수 있었으며, 이 단일 농작물이 1980년대 중반 수출 총액의 74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위의 경제였다. 쿠바는 선택한 몇몇 무역 상대국과 특혜협정을 맺었다. 쿠바는 몇 안 되는 수출 가능한 농작물만을 재배하는 특화의 함정에 빠져든 가운데 연료, 기계, 쌀을 담합 거래했다. 


(381쪽)


쿠바 국민은 낙농업을 열광적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과도하게 농업의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쿠바 인구는 급격하게 도사에 집중되었다. 1956년 쿠바 국민의 약 56퍼센트가 살던 농촌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인구의 28퍼센트만 남게 된다. 자본주의적 기업 제도가 없는 쿠바의 압도적인 도시 인구에서 독특한 점은 국민이 대학까지 적용되는 무상교육을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문자해독률이 높아지고 교육받은 시민 계층이 급증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교육은 닥쳐온 식량 파동에서 쿠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1991년 크리스마스에 소련이 해체되자 쿠바는 설탕 판로를 잃었다. 식량 공급량의 3분의 2와 연료 전체, 농기구의 80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하던 국가가 해외무역의 80퍼센 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재난이었다. 전기가 없으니 공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트랙터는 버려진 경작지에서 녹 슬고 있었다. 수확할 수 없는 작물은 들판에서 썩기 시작했다. 가축 수만 마리는 태어난 메마른 목초지에서 그대로 굶어죽었다. 미국은 1992년에 ‘토리첼리 법’(Torricelli Act)을 제정하여 1960년대에 쿠바에 가했던 경제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이 법에 따라 해외 자회사를 포함한 그 어떤 미국 기업도 쿠바와 거래를 못하도록 하는 엄격한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1996년 미국에서 ‘헬름스-버튼 법’(Helms-Burton Act)이 제정되었다. 목적은 쿠바와 무역을 하거나 통상에 관여한 외국 회사를 처벌하는 데 있었다. 


쿠바는 고립되었다. 가장 시급한 걱정거리는 대규모 기아였다.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 30퍼센트 줄어들었으며, 소련 붕괴에 뒤이은 3년 동안 국민의 몸무게가 평균 13.6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카스트로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른바 ‘평화시대의 특별시기’라고 불렀다. 탈석유, 탈산업, 탈세계화를 위해 지금도 남아 있는 긴축계획이 수립되었다. 


쿠바의 과학자에게는 농민이 인간 노동력과 값싼 유기물질만 투입해도 되는 다수확 재배 시스템을 찾아내는 일을 지원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일을 하고 밭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황소가 다시 도입되었다. 과학자들은 천연 살충제를 개발하고 혼식과 윤작을 실험했다. 국가 종자 공유 프로그램이 수립되었으며 정부에서 토양 전문가를 훈련시켜 도움이 필요한 모든 농민이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수송연료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쿠바 국민은 모든 도시의 빈 땅을 작은 소매점이 붙어 있는 도시 유기농 농장인 ‘오르가노포니코’(organoponico)로 바꾸어서, 새로운 도시 식품체계를 정착시키기 위한 방대한 도시농업의 기초를 놓았다. 


2000년대 초 아바나에서는 도심이나 인근에 있는 오르가노포니코에서 신선한 농산물의 90퍼센트가 생산되고 있었다. 비상조치로 시작한 도시농업이 식량보장 분야에서 ‘쿠바 모델’이라고 일컫는 지방분권화되고 탈산업화된 먹거리 체계의 중요한 토대로 등장했다. 


(383쪽)


쿠바인들은 먹거리를 도시농장이나 농민시장에서 직접 산다. 따라서 고기나 가공된 탄수화물 함유 식품보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대부분 유기농으로 생산된 제철 음식을 먹는다. 쿠바는 다국적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영양상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무척 생산적이며 지역적으로 관리되는 먹거리 체계를 만드는 데 있어 앞서 나가는 국가다. 이것이 사람에게 먹거리를 공급하는 훨씬 더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방법이다. 2006년 쿠바는 세계자연보호기금(World Wildlife Fund)의 <살아 있는 지구 보고서>(Living Planet Report)에서 제시한 지속가능한 생활과 발전의 목표치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였다. 


(387쪽)


2007년과 2010년에 내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쿠바인들은 모두 미국의 금수조치가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소비지향적인 문화가 삶의 질에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정부나 국민들이 산업적 농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90년대 초의 교훈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가까이 있었다. 


그 대신 쿠바인들은 풍부하고 재생력 있는 자연 체계를 닮은 방식으로 생활 공간과 통합되는 농업을 설계하는 퍼머컬처 분야의 혁신에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태양에너지나 바이오가스 같은 대체 에너지를 농업 분야에 통합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쿠바는 소비주의가 얼마나 깊이 우리 몸에 배어 있는지에 대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 소비주의는 선진 공업국의 먹거리 체계라는 몸통을 흔드는 꼬리다. 


(406쪽)


나는 도시농부나 뒤뜰 먹거리 경작자들이 한때 영세 농민이 하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보게 되었다. 그 역할이란 기업들이 한두 개 유전자를 조작해서 우리가 잴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해 온 기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부자연스러운 생각에 반대하며, 농업이 항상 해왔던 오픈소스 기술의 신중한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말한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보다 백보 앞서 있으며 대리 가능성과 생물다양성을 가지고 스스로 회복활 수 있다. 


도시는 혹은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더 이상 그저 먹거리 소비자이자 쓰레기 생산자일 수 없다. 순환체계로 만들어야 할 때임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4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