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마크 마조워 '암흑의 대륙'

딸기21 2015. 3. 10. 17:47

유럽은 어떤 곳이며 어떤 길을 걸어왔나. 유럽은 '지금 어디에' 있나. 많이 들어본 듯하면서도 속속들이 알기 힘들었던, 혹은 '왜 그랬을까' 궁금했던 것이 유럽의 역사다.


국제뉴스를 다루다 보니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거나 책을 읽어야 할 일이 많은데, 놀랍게도(!) 유럽의 현안이나 특정 지역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전문가나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지난 10여년 동안 두 차례 큰 전쟁이 벌어진 이슬람 세계나 중동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고 있지만, 사실 9.11 이후에 한국에서도 (깊이가 있든 없든) 중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이 늘었고 관련된 책들도 어지간히 나왔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예전에는 기사 쓰는 데에 도움 될 중동에 대한 책이나 전문가가 없는 게 속상했는데, 실은 그건 행복한 소리다. '아시아 전문가'는 참 찾기 힘들고 '아시아에 대한 책'도 없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역사가 다르니 나라별로 전문가와 서적의 리스트를 꼽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불가능하다. 남미는? 아시아와는 다르게, 얼추 중동과 마찬가지로 대략 한 문화권에 속한다고 치고, 남미 전체의 역사를 아우르는 책이 몇 권 나와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르헨티나에서 공부하고 온 아르헨티나 정치 전문가'를 찾으라고 한다면, 혹은 아르헨티나 현대정치사에 대한 책을 몇 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대략 난감이다. 


유럽도 그렇다.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 어문학과가 대학마다 있는데 유럽 전문가를 찾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솔직히 중동 전문가를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_- 교과서 수준으로 풀어놓은 프랑스사, 영국사, 독일사, 러시아사 등이 있으나 현안과 결합시켜 현대 정치를 풀어놓는 전문가나 책을 찾기가 어렵다. 


여기까지는 어느 무식하고 게으른 국제부 기자의 넋두리였다고 치고.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김준형 옮김후마니타스)은 알 듯 모를 듯한 20세기 유럽 현대사를 정리해주는 책이다. 마조워는 영국의 역사학자인데 동유럽사를 주로 연구했다. 


마조워의 책은 오래 전 발칸에 대한 얇은 것 하나 본 것이 전부인데, 사실 그 책을 읽을 때에는 갈증이 좀체 풀리지 않았다. 반면 <암흑의 대륙>은 마조워가 제대로 정리해놓은 유럽사다. 유럽은 어떤 곳인가, 유럽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환상은 무엇이었나, 그동안 가리고 숨기고 외면해온 진실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다. 동유럽과 서유럽은 지난 100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역사를 훑으면서,서로 겹쳐지고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변화와 정치변동의 여러 단면을 씨줄날줄 엮어서 흥미진진. 


우리는 늘 유럽을 역사가 오래된 국가와 사람들의 대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럽은 20세기를 전후로 정치적 격변과 자기 변신을 경험한 매우 젊은 대륙이다. 오늘날 민주적 민족국가는 하나의 규범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 이에 가까운 나라는 발칸의 몇몇 군주정 정도였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국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권력의 중심이 군주가 아니라 의회에 있던 국가도 거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민족국가와 관련이 깊은 현대 민주주의는 1914년 구 유럽 질서가 붕괴한 이후 진행된 길고 험난한 국내 및 국제적 실험의 산물이었다.

구질서의 붕괴 속에서 정치가들은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더 공정한 사회와 독립국가의 건설 같은 전례 없는공약을 마구 쏟아냈다. 경쟁적인 세 개의 이데올로기, 즉 자유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즘은 각각 자신만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사회와 유럽, 나아가 세계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쪽) 

 

저자는 '민주주의 유럽'이 '파시스트 과거'를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고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문제는 유명하신 한나 아렌트를 비롯해 숱한 이들이 비판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유럽인들은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샤를리에브도 사건 이후 유럽인들이 보여준 '표현자유 지상주의',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무슬림 이주자들'을 덜떨어진 존재로 보고 여전히 배척하는 태도(물론 여기엔 과거에 대한 착각뿐 아니라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도 배어 있다) 따위가 그렇다.


이냐치오 실로네 Ignazio Silone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역사를 승리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를 통해 과거를 해석한다. 예를 들어, 냉전이 이런 식으로 종식되었으므로 자유민주주의가 유럽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여러 투쟁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비롯된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는 새로운 역사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역사 해석이 정치적으로는 덜 유용할지 몰라도 진실에는 더 가깝다. 


(12쪽)

 

무엇보다도 마조워는 파시즘이 20세기 초반 유럽이 겪고 있던 문제에 대한 총체적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아니 그 사악한 것이 해법은 무슨 해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으나, 어떤 사상(체제)도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없다(일본의 군국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 전반에 배어있는 어떤 단초로부터 출발했고, 지지층을 넓혀갔고, 나름의 모색 속에 해법을 제시하면서 정치·사회·경제적 권력이 되는 것이다. 권력을 굳힌 뒤 그 사상(체제)의 모순과 부작용 혹은 악덕이 어마어마했다 해서 그 이전의 과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과오의 출발점을 놓치게 된다.


(여담이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이냐치오 실로네...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이그나치오 실로네'로 번역됐는데. ㅎㅎ)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좋건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국가사회주의는 독일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역사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 이념이었다. 인종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복지 체제의 건설은 유럽인이 가진 일반적인 사고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그리고 유럽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경제(독일)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권력을 쟁취한 결과였다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인 베르사유 체제를 힘으로 붕괴시킨 것은 소련이 아니라이렇듯 확고한 체계를 갖춘 체제(나치)였다독일의 제3제국이 20세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3쪽)


어쨌든 파시즘은 세 가지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유럽 중심적인 것이며 적어도 반미주의와 반볼셰비즘이라는 명확한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했.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15~16쪽)

 

반자유주의·반민주주의 신조는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이미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했었다. 민주주의는 스칸디나비아처럼 사민주의 세력이 농민들과 탄탄한 동맹을 맺든지, 아니면 벨기에나 영국처럼 보수파와 동맹을 맺은 경우에만 살아남았다. 다른 곳에서는 공황과 대규모 실업 때문에 사회 경제적 권리와 복지에 대한 헌법상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통해 좌파의 분열을 치유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버렸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이 공화국을 구하지 못했으며, 결국 그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마저 인민전선은 무너졌다. 


(48쪽)

 

1930년대 중반이 되면 북유럽 일부를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자주의는 힘을 잃었고 조직된 좌파는 분쇄되었다. 결국 이념과 통치를 둘러싼 유일한 투쟁은 우파 내 권위주의자, 전통적 보수주의자, 기술 관료, 급진적 극우파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카롤2Carol II가 독재하는 루마니아에서부터 군인들이 지배하는 스페인·그리스·헝가리, 그리고 일당체제인 이탈리아와 독일에 이르기까지 통치 방식은 다양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파시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시계를 되돌려 민주주의 이전 엘리트주의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구 우파와, 대중 정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한 신 우파 사이에 있었다전자로는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과 그리스의 독재자인 메타크사스Joannis Metaxas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중 정치를 두려워했고 군주나 교회 같은 기존 질서와 손을 잡았다. 


칸에서 우파는 전제군주가 장관을 임명하고 정당을 감시하며 제한적인 선거를 실시했던 19세기로 되돌아갔다. 대조적으로, 급진적 신우파는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선거와 의회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들의 수단은 정당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대중 정치라는 새로운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보수주의자들의 허를 찌르고 이들을 약화시켰던 보통선거권 시대에, 정당은 신우파에게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했다. 


(53쪽)

 

말하자면 20세기 초반 몇십년 동안 유럽은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은 원래 다문화적이었고 다민족적이었으며 근대 민족국가의 틀은 서쪽에서나 확립돼있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에서 합스부르크의 도시인 체르노비츠Chernowitz는 헝가리인·우크라이나인·루마니아인·폴란드인·유대인· 독일인 모두에게 똑같은 고향이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스만제국의 살로니카에서는 부두노동자들조차도 보통 6-7개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으며, 7만 명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투르크인·알바니아인·불가리아인까지 섞여 살았다. 이런 다민족적 분위기는 동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으며, 도시와 작은 마을에는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뒤섞인 채 살아갔다." (74쪽)


이런 사회들에서 민족주의란 어떤 의미였을까. 상상해보기 힘들긴 하지만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것이었을 터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뒤흔드는 파괴력을 가진 무언가였을 테지. 


민족주의의 도전에 직면해서, 제국의 지배지들에게는 두 가지 전략이 있었다. 하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적 민족주의인데, 예를 들면 오스만제국의 투르크화, 차르 영토의 러시아화,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군주 체제의 마자르화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하지만이 방법은 타민족들의 전통을 침범하는 것이었고, 특히 단일한 공용어의 사용이나 세금 부과로 말미암아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으며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오히려 더 자극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20세기 초의 첫 10 년 동안 이른바 청년 투르크파의 투르크화 활동이 의도와는 달리 알바니아나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질렀고, 헝가리의 강경책은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의 저항을 야기했다. 러시아 역시 핀란드, 발트 해 연안 지역, 폴란드 지역 등에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에 대처하는 또 하나의 전략은 분할통치 방식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불가리아 정교회를 창설하는 방법을 통해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분열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트리아 민족이 없어서 제국적 민족주의를 건설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이간시켰다.


(75쪽)

 


마크 마조워. 사진 카티메이리니(www.ekathimerini.com)


곳곳에 덩치 큰 '소수민족'이 섞여 살던 그 때, 여기선 얘네가 소수민족이고 저기선 쟤네가 소수민족인 지역에서, 훗날 '소수'에 대한 엄청난 박해와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징조가 있었을까?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역사가 오래됐지만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중부와 동부 유럽 곳곳에서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집단이 박해를 받았다. 그것이 극우파들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 역시 소수파를 괴롭혔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나라들 상당수는 식민지를 가졌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이중잣대라고 해버리면 단순하지만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당시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자유주의자(국가)들의 태도가 '유럽 안으로' 향했을 때에 내부의 소수파에 대한 차별과 박해로 나타난 것이니, 나치즘은 유럽으로 향한 제국주의의 부메랑이었다.


자유주의의 이면에 흐르는 전제는 소수민족들이 다수파 민족에 충분히 동화될 수 있으며, 동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얼마나 보편주의적이었으며, 인종적인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웠을? 1919년에 국제연맹 헌장에 인종 간의 평등을 확인하는 조항을 삽입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국가들 역시 자유주의 국가들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도 오랫동안 차별 정책을 유지했다. 식민지에서 자유주의는 인종 분리 정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 정책을 사용했다. 시민권은 권리가 아니라 국가가 내리는 특전으로 인식되었다. 


(91쪽)


소수민족의 권리에 대한 차별은 보수 반동주의자들이 주로 자행한 것이 아나었다. 반대로 동유럽에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통해 민족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현대화된 자유주의자들이 수행한 것이었다.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을 통틀어 민주주의든권위주의 체제든 상관없,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엘리트들 사이에는 반유대주의가 자연스럽게 퍼져 갔으며, 결국 이런 배경을 이용해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다. 다만 그들은 이런 경향을 극단까지 몰고갔으며, 그때까지 존재했던 동화 정책에 조종을 울렸을 뿐이다. 


(93쪽)  


인종주의, 우생학, 이런 것들은 전후의 '가족' 혹은 '신체'에 대한 개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조워의 인용치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8백만 명이 넘는 남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6천 명 꼴"이다. 러시아 혁명이나 각종 질병, 분쟁으로 희생된 사람까지 합치면 "1천3백만명의 유럽인이 죽었다. 프랑스는 남성 노동인구 10명 가운데 한 명이 사망했으며 세르비아나 루마니아는 이보다 더 심했다." (122쪽)


남성(가장)의 부재, 노동력을 재생산할 필요성. 그래서 국가가 가정과 임신출산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종주의 우생학과 깻잎 몇 장의 차이에 불과했다. "국가는 점점 대리부모이자 도덕적 권위의 원천으로 행동했다."


필요하다면 개인주의를 제한하고서라도 국가의 안녕을 위해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 우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모든 시도는 전쟁 중에 나타났던 현상, 곧 직업과 소득을 지닌 독립적이고 해방된 젊은 여성상이 출현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미였다. 사실 이런 의심의 저변에는 정치적 불안이 깔려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남녀 관계에 유례없는 새 질서를 열었고, 교회의 권위를 축소하고 가부장의 전통적 특권을 없앴으며, 여성에게 이혼재판 청구를 허용하는 등 유럽의 여타 지역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러시아 여성을 해방시켰다. 비판자들은 볼셰비키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러시아의 가정을, 여타의 부르주아적 생활의 제도들과 함께 파괴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믿었다. 


(123쪽)


전간기 유럽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출산율 저하는 제국들과 국가 간 경쟁이 거세지던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징병제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인구 규모와 건강이 군대와 국가 안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는데, 이는 당시 전 유럽이 진화론적 적자생존의 논리에 심취하고 있던 상황과 결부되었다. 


독일은 ‘출산율이 높았던’ 동쪽의 ‘슬라브인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슬라브인·독일인·루마니아인들과 인구 숫자를 비교하면 질 수밖에 없는 ‘희망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보어전쟁 이후에 영국은 어떻게 하면 ‘줄어들고 있는 인구’로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런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했고, 각국의 지도자들은 ‘임신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봉사’라는 관점을 주지시켰다. 


(125쪽)

 

아우... 읽다 보니 짜증난다. 지금 우리는 저런 잡소리를 또 듣고 있다.


제3제국의 강박관념은 당시 사회정책에 대한 전 유럽 차원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전간기에 국가는 사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전문가주의나 과학적 전문 지식, 또는 정치적 권한 등의 개념으로 정당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사회과학자와 행정가들이 점차 수용하고 있었던 우생학은 전쟁의 대량살상의 결과로 크게 확산되었다. 각 국가는 우생학, 혹은 독일식의 ‘인종위생학’을 적극 장려했으며, 이는 서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스페인과 소련으로 퍼져 나갔다.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이런 흐름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전 국민의 체력 중진을 장려했으며, 애국적인 체육단체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이런 운동들은 오늘날 해석하듯이 단순히 나치의 불길한 전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나름대로의 과학적 위상을 바탕으로 폭넓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로는 영국의 케인스나 베버리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와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보수주의자 또는 우파 권위주의자들도 있었다. 일부는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일부 선도적인 독일의 ‘인종위생학자’들은 유대인이었다. 


(136~137쪽)


“1930년대 후반이 되면 많은 유럽인이 1918년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이 조성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질서를 포기하고 권위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200쪽)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나치 체제가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좀 더 광범위하고 서로 연관된 인종 문제의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며 “나치의 유럽 정복이 초래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나치의 인종적 복지국가라는 논리를 유럽 전체로 확대한 것”(223쪽)이었다. 


'왜 독일인들은 나치즘에 저항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인종주의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었고 모든 과정이 '정상화'됐다. 비정상의 정상화다. 


처형될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다. 게슈타포가 시행한 강제 노동과 전쟁 포로 격리 수용은 점차 정상적인 국가 행위로 정착되어 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도 흔한 일이었다. 독일 시민과 성관계를 가진 자들을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거나 매질하는 것에 거의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에 대한 반대도 없었다. ‘동유럽 노동자’들이 열등하다는 나치의 관점을 독일 국민 대부분이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우트하우젠Mauthausen 주민들은 수용소 수감자들이 거리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과 친위대 대원들의 잔인한 행동에 점차 익숙해졌다. 1945년 2월 2일 러시아 전쟁포로 수백 명이 가까스로 이 수용소를 탈출했지만, 이들에게 은신할 장소나 피난처를 제공한 집은 단 두 곳이었다. 탈출한 사람들 대부분이 곧 다시 붙잡히거나 농민들에게 ‘토끼’처럼 쫓기며 총에 맞았다. 열광적인 히틀러유겐트의 10대들과 마을 사람들은 끔찍한 유혈 현장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243쪽)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나치의 제국주의는 유럽인들이 과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특히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폭력과 인종차별을 유럽에 가져온"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밤, 히틀러는 '캐나다에서 수입한 밀을 먹으면서 약탈당한 아메리카 원주민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자리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새로운 인도 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51쪽)


전후에,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20세기'에, 유럽은 크게 변했다. 세상 어느 곳이 변하지 않았을까마는. 모두가 전쟁에 내몰리고 모두가 이리저리 쓸려다녀야 했던 상황이었으니, 그 결과물이 거대한 혼돈이자 모든 것의 재구성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계급체계가 뒤죽박죽 되면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가 달라졌다. 폭격 속에 체계적인 소개를 했고 수백만 명이 탈출하면서 여러 계급과 지역사회가 섞이게 됐다. 그러나 가장 큰 효과는, 전쟁이 유럽인들에게 '국가의 역할'과 '개인이라는 존재'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다는 점이다.


배급제는 정부의 계획이 평등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실제로 증명했고, 결과도 놀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전쟁 그 자체는, 정부가 경제와 사회를 관리하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개입주의적인 국가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 기술관료적 계획가들, 새롭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온건파 보수주의자들 모두가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책임을 확대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나치의 도전이 민주주의 체제들로 하여금 사회적·국민적 단결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259쪽)


“제2차 세계대전은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나 외교적 협상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그것은 유럽 대륙의 사회적·정치적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전례 없이 집요한 폭력적 체제를 경험했다. 그 경험을 통해 유럽인들은 민주주의의 미덕을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200쪽)


전시 사상들 가운데 한 조류가 전전의 경제적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며 국가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는 인권과 시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이었다. 전후 복구와 민주주의의 재정립은 이런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였다. 


(26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식민주의와 인종문제에는 대략 침묵했다는 사실. 제국주의의 철수는 그 뒤의 국제적인 상황변화 속에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이 선 뒤의 일이었다.


정부나 여론은 말할 것도 없이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자국에서는 인간 해방을 수호하면서 나라 밖에서 제국의 지배를 묵인하는 모순을 유럽인들은 대부분 깨닫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식민지 보유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프랑스에서도 제국을 새롭게 정비하자는 논의는 많았지만 해체와 관련된 논의는 없었다. 좌파도 어느 정도 이 문제를 무시했으며,1944년 초에 식민지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브라자빌 회의에서도 침묵했다.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제국을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연방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인도 국민회의가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자 영국 정부는 간디를 체포했으며, 대신 자치령의 지위를 제안했다. 


(271쪽)

 

유럽인들(그리고 미국의 백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종 문제에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식민지의 피지배자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기꺼이 싸우고 있는 이상, 권력 구조를 급격하게 바꿀 이유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 자체가 바로 변화의 촉매였다. 호치민은 일본에 맞서 시작했던 투쟁을 프랑스와 계속했으며, 아시아·아프리카·카리브 해 식민지의 군인들은 유럽의 전장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와 히틀러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투쟁을 계속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조모 케냐타나 콰메 은크루마도 있었다.


(272쪽)

 

역설적인 것은, 이런 비판을 하고 있는 마조워조차 '식민지 혹은 원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눈감았다'는 지적을 들은 적 있다는 사실. 노엄 촘스키가 그런 지적을 했다.


I might add that in the sister journal of the NYRB, the LRB, denial of colossal atrocities by “our side” is also familiar, and also passes without comment. E.g., Mark Mazower, who casually refers to the “mistreatment” of Native Americans in the US. Would you or your associates so easily ignore a far less egregious reference to the “mistreatment” of Bosnians or Tutsis? No need to answer, but this as usual passes without comment in your circles.


아무튼 전쟁 직후 유럽에서 가장 큰 현안은 '독일인 처리'였다. 나치가 숱한 소수집단과 민족집단들을 학살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전후 독일인들도 뒤처리 과정에서 엄청나게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 대량학살은 독일 밖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의 삶을 파괴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1944-45년 독일인 5백만 명이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던 독일제국 동쪽 지역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1945-4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헝가리의 신생 정권들이 독일계 7백만 명을 추방했다. 소련군이 진군하면서 시작된 대혼란과 대탈출의 첫 번째 국면은 1944년 가을과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 사이에 일어났다. 독일인들 수십만 명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프로이센을 탈출했으며, 곧이어 슐레지엔과 포메른에서도 대규모의 탈출이 이어졌다. 


1945년 7월까지 독일인 수백만 명이 탈출하거나 자기 집에서 쫓겨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국경으로 내몰렸다. 동유럽인들의 이런 행동은 6년 동안 겪었던 고통을 되돌려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지역에 들어선 새로운 정권이 대중의 분노에 편승해 용의주도하게 고안한 정책의 결과였다.

 

총 1천2백만 명에서 1천3백만 명의 독일인이 이동했는데, 이는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행렬 도중에 사망한 사람들만 수십만 명에 이르며, 어떤 통계는 2백만 명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동유럽의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추방과 죽음으로 사라짐에 따라 전쟁 이후 엄청난 인구학적 혼란과 불안정이 발생했다. 7백만 명이 넘는 다른 민족집단들(대부분 폴란드인·체코와 슬로바키아인·우크라이나인·발트인) 역시 터전에서 쫓겨나 다른 곳에 정착했다. 


그 결과 동유럽에서 상당수 소수민족들이 사라져 버렸다. 소수민족 비중이 폴란드에서는 32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감소했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33퍼센트에서 15퍼센트, 루마니아에서는 28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낮아졌다. 독일 민족은 이제 (분단된) 독일의 국경선을 따라 거주하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폭력, 그리고 대규모 사회혼란이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베르사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 셈이었다. 


(299~300쪽)

 

그러나 확고한 신념과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역사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독일의 분할도, 동유럽의 공산화도 어느 정도는 우연에 의해, 어느 정도는 비계획적인 흐름에 의해 결정됐다.


유럽을 분열시킨 것은 바로 독일의 분할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분단이 불가피해졌는지, 또 어느 국가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45년에 영국·소련·미국은 모두 단일한 독일을 유지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1945년에 독일과 인접해 있던 프랑스의 입장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프랑스는 당시 포츠담 회담에 초대받지는 못했으나, 그 이전에 이미 [독일제국의] 분할 점령에 참여한 바 있었다. 드골은 독일의 통합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323쪽)


동유럽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진행 양상은 유사했다. 연립정부가 있었고 그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난 뒤에 다른 정당들과 연립정부 밖에 있는 분열된 집단들을 주변화하고 철저하게 억압했다. 마지막은 선거였는데, 득표율을 보면 연립정부가 폴란드에서는 89퍼센트, 루마니아에서는 98퍼센트, 불가리아에서는 79퍼센트를 획득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47-48년 무렵에는 민주적 정치 환경에서 공산당 헤게모니를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었던 농민당들과 사회민주당들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과연 이 모든 것들이 신중하게 계획된 마키아벨리 식 전략이었을까? 실제 과정을 보면 적어도 1947년 전까지는 소련은 망설였고 확신이 없었다. 


(351쪽)

 

냉전 시대가 되었고 유럽의 서쪽과 동쪽은 각기 제 갈기를 걸었다. 이 과정은 우습지만 '안정적'이었다. 동서 모두 나름대로 발전했고, 유혈 폭력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와 '경제성장'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민주적 정치체제의 견고함은 경제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니, 성장이 끝난 지금의 정치적 흔들림 또한 예상했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대중의 분위기는 급진적인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기대했지만, 이런 과정이 파괴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1939-48년 동유럽의 엄청난 혼란은 공산주의의 지배에 왜 사람들이 순응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서유럽에서도 전쟁의 사회심리적인 결과는 전후의 복지, 대량 소비, 가정의 회복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기초가 되었다. 


(308쪽)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과 계급적 적대가 합의를 강조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후의 서유럽 정부들이 특별히 견고한 것은 아니었지만, 민주정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이며, 시민적 저항이나 대중 폭력도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 이 같은 대중의 관용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부활이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경제성장과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이 점점 더 편해지고 부유해지면서 정치체제가 그 결실을 수확했던 것이다 


(396쪽)

 

‘경제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전례 없는 성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물론 난민들과 실업 상태의 농민들이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해 임금 수준이 낮게 유지되었고, 이로 인해 투자가 촉진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생산 능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1945년 이후 서유럽이 보유한 자본은 1939년보다 규모가 컸다. 마치 신화와도 같았던, 이 시기 유럽의 부흥은 흔히 마셜플랜 덕택이라고들 한다. 순전히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마셜플랜은 그리스와 이탈리아 정도를 제외하고는 선전가들이 주장했던 것만큼 경제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유럽 투자의 대부분은 역내에서 조달되었고, 서유럽의 경제성장률은 동유럽 국가들보다 높지 않았다. 


(399쪽)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미국의 존재가 서유럽에 미친 광범위한 정치적 효과였다. 그 정점을 이루었던 1950년대 초반의 냉전은 공포와 불얀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미국인의 돈과 안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지지는 않았으며, 원조의 수혜자들을 어떤 형태로든 국가 간 대화로 묶어 놓음으로써 서유럽의 국제경제적 환경을 바꿔놓았다. 그러한 환경 변화는 특히 1950년대 중반의 경제 호황을 이끌었던 놀라운 무역증가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다고 유럽의 정부들이 미국의 선물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수혜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악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을 유럽으로 끌어들여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만약에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였다면, 그것은 (루네스타의 표현에 따르면) 초청 받은 제국이었다. 


(401쪽)

 

전후 유럽의 복지국가는 국가마다 철학과 제도에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서독은 영국처럼 야심찬 주택정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년 공영주택 수십 만 채를 건설했다. 반면에 전후 ‘망가진 로마’sack of Rome와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아테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유럽 국가들은 주택정책에 무관심했다. 


영국의 복지 체계는 조세를 통해 재정이 충당되었으며,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복지를 사망할 때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프랑스·벨기에·독일의 경우에는 정부가 임의 보험에 기초를 둔 복지 정책을 지원했고, 보험료는 소득과 연동되었다. 이런 체제들에서는 복지제도가 기존의 소득과 지위 격차를 유지시켰으며, 따라서 사회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반면 스웨덴에서는 소득 불균형을 축소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 개입했다. 한 학자에 따르면, 당시 서유럽의 복지 자본주의 모델에는 적어도 “세 가지 세계”가 있었다. 보수적인 가톨릭세계, 자유주의 세계,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세계다. 그럼에도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사회복지 지출이 증가했다. 


(405쪽)

 

상업적 압력에 수동적으로 대웅만 하는 소비자의 이미지는 1940년대의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상상했던 능동적인 시민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듯이 보였다. 초기 소비주의 이론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새로운 ‘대중사회’가 등장함으로써 현대자본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이용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들 엘리트들의 눈에는 전쟁 전에 무비판적으로 히틀러를 추종했던 바로 그 대중이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상점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보드리야르나 부르디외 같은 낙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비주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규정하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새로운 자유를 제공했다. 


(414쪽)

 

이들 개혁 가운데 가장 느리게 진행된 분야는 작업장에서의 평등이었다. 헌법은 여성들에게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민법과 상거래에 있어 평등하지 않다면 여성들은 남성에 여전히 종속되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런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은 서유럽에서 가장 놀랍고 지속적인 사회적 저항의 모델이 되었다. 많은 경우 그렇듯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개혁은, 약속한 것과 현실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425쪽)

 

‘68’은 후세들에게 일종의 신화가 되었으며, 이 신화는 당시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수많은 작가, 방송인, 교사, 영화 제작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그러나 1968년의 소요는 당시의 주역들이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인상적이지도 않고, 영속적인 성과라기보다는 일종의 법석에 불과했으며, 여러 측면에서 그 학생들이 공격했던 바로 그 번영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429쪽)


대처주의조차 엄청난 변화를 실제로 가져오지는 않았다고 마조워는 주장한다. 


일부 분야에서는 국가개입을 축소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오히려 증가시켰다.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지방정부들은 힘을 잃었고 그 결과 중앙정부는 주택과 교육 부문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경찰, 학교 모두 자율성을 잃었다. 또 한 가지는 대처주의가 국가의 경제적 간섭을 줄이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복지지출은 정부의 일반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볼 때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세금 역시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처의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국가가 계속해서 기본 서비스를 공급하기를 국민들이 바랐기 때문이다. 


(449쪽)


1960~70년대의 변화 중에 지금의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노동력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발생시켰다. 스위스와 스웨덴은 빠르게는 1945년부터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1960년대까지 프랑스·독일·스위스는 남유럽 노동자들을 놓고 경쟁했다. 서독은 지중해 6개국에 고용사무소를 설치했다. 프랑스는 이민사무소를 통해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16개 이상의 국가와 쌍무협정을 체결했다. 1958년 5만5천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독일에 들어 왔는데, 1960년이 되면 이 숫자는 25만 명으로 불어났다. 프랑스에서는 1950년대 말에 연간 15만명에서 1970년에 30만명으로 늘어났다. 두 나라의 경우 거대한 규모의 난민이 함께 유입되었다. 1961년에는 동독을 빠져나온 3백만 명의 젊은 남성들과, 알제리로부터 1백만 명의 피에누아(알제리의 유럽계 주민들)들이 들어왔다.


각 정부가 이 정도 규모의 이민에 대해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지 못한 한 가지 이유는 이런 현상이 일시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자신의 나라로 쉽사리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인·유고슬라비아 인·그리스인·스페인인들은 대부분 돌아가고자 했지만, 터키·서인도제도·인도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이제 아내를 불러들여 가정을꾸리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1970년대 초 이민 통제의 위협이 다가옴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435쪽)

 

이주민 물결과 맞물려 1980년대 이후 50년 만에 극우 정당들이 부상했으나, 마조워는 "진정한 문제는 신우파의 등장보다는 전후 보수주의의 위기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미테랑이 영리하게 이용했던 드골주의 보수파의 약화 덕분에 국민전선이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보수주의 정당이 강력한 곳에서는 반이민법을 내건 정당들이 득세하지 못했던 반면, 약한 곳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신우파의 주장에 현혹되는 일이 많았다." (468쪽)


동유럽의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마조워에 따르면 "20세기에 걸쳐 동유럽은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실험실"이었다. "첫 번째는 1918년 자유민주주의 승전국들의 이데올로기로, 세계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붕괴할 때까지 10년 남짓 지속되었다. 히틀러의 신질서는 그 절반 정도 지속되었다. 나치의 패배는 스탈린에게 세 번째 길을 열어 주었으며, 스탈린의 창조물- 인민민주주의-은 앞선 두 경우보다 훨씬 오래갔다." (341쪽)


그러나 공산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붕괴했다. 나치즘이 갑툭튀가 아니었듯, 냉전의 해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갑툭튀는 아니었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경제 침체로 복지 체계에 대한 압박이 나타났다. 실제로 평균수명이 낮아졌는데, 주로 위험한 작업 환경 때문이었다. 새로운 투자를 할 수 있는 자본의 감소가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점차 줄어들었던 서유럽과의 격차가 1970년대부터 다시 벌어졌다. 동유럽은 알코올 소비량에서만 서유럽을 앞지르고 있었다. 


(489쪽)

 

1980년대에 나타난 특징은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사회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이론이 현실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론을 정복했다는 판단이, 공산당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렸다. 스스로의 정당성을 믿어왔던 공산당은 침체되었고, 당은 관료, 군부, 그리고 노쇠한 ‘작은 스탈린들’로 대체되었다. 


(496쪽)

 

공산당의 쇠락은 폴란드에서 가장 확연했다. 연대노조가 보여 준 것은 바로 목표와 정당성을 잃어버린 공산당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가 되면 이미 공산당의 쇠락을 틈타 관료나 산업 관리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담 미흐니크Adam Michnik는 “12월 13일 쿠데타의 주된 이유는 연대노조가 과격해서가 아니라 폴란드 공산당의 기초가 허약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97쪽)


소련의 붕괴를 저자는 탈식민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의 속성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이전의 열강들과 분명 차이점이 있었다. 


타살인가 자살인가? 혁명인가 후퇴인가? 똑같은 질문들이 영국의 인도 지배나,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가 종식될 때에도 제기되었다. 1989년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20세기 이후 유럽의 탈식민지화라는 큰 그림의 일부다. 15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시작된 길고 긴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대체로 탈식민지화 과정은 식민지를 형성했던 기나긴 기간과 비교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수십 년 만에 진행되었다. 


역사가들은 탈식민지화-특히 그 속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골몰했다. 몇 가지 지점은 분명했다. 첫째, 제국은 전반적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둘째, 제국들은 군사적 봉기의 직접적인 결과로 물러난 적이 거의 없다. 이 점에서 알제리는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었다. 실제로 언제 제국을 종식시킬지를 결정했던 것은 영국이나 프랑스 정부였다. 


한 가지 원인은 군사적 지배가 비용이 많이 들뿐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치고는 서투른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제국에 계속 집착하는 것을 후견자인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 여론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 간의 경쟁이 아니라 초국가적인 경제협력을 위주로 운영되는 그런 세계에서 제국이 가졌던 매력은 점점 희미해졌고, 도덕성과 합리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506쪽)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은 그것이 시대착오적이며, 현대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크렘린은 신속하게 동유럽에서 철수하기로 선택했고, 제국은 불과 하룻밤 사이에 해체되었다. 그것은 자살이었지 타살은 아니었다. 국내 경제개혁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것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진흙탕에 빠진 이후의 깨달음이 1989년 붕괴의 핵심적인 이유였다.


브레즈네프 정권 집권 기간 대부분 국가보안위원회 수장을 맡았던 안드로포프는 허물어져 가는 공산주의 제국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스탈린 시절에 이 지역(동유럽)은 소련의 자산으로 간주되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막대한 경제적 부담(연간 국민총생산의 2퍼센트에 해당했다)이 되었다. 게다가 동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수십만 소련 군대의 유지 비용이 소련 경제에 부담이 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소련의 안보정책은 이 지역 전체가 소련의 군비에 의존하도록 만들어 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의 방위비 분담 문제가 동유럽에도 똑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에 비해 이런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있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이, 동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에 들어서자 방위비를 줄여나갔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봐도 소련 안보에서 동유럽이 갖는 중요성은 크게 달라졌다. 데탕트로 독일의 위협이 감소함에 따라, 모스크바는 경쟁자인 중국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중국은 더 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때 드러난 소련군의 능력은 동유럽 주둔군의 효율성을 의심스럽게 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1980년대에 왜 소련의 지배 엘리트들이 무력의 시대가 끝났다는 쪽으로 관점이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나치와 달리 공산주의자들은 주권국가의 평등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부인한 적이 없었다. 


(508쪽)


소련은 무너졌고 "한 곳의 봉기는 다른 곳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혁명운동을 진압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어떤 개입도 없었다. 이제 누구도 제국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는 대체로 놀라울 만큼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톈안먼 사건은 강경파를 제외한 모두에게 피해야 할 모델이었다. 동시에 이는 반대세력이 권력을 이어받을 만큼 강하거나 안정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89년의 모든 정치적 개혁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공산주의의 실패로 생긴 권력 공백의 위험이었다." (513쪽)

 

그럼에도 "공산주의의 붕괴는 몇 가지 이유에서 민족주의의 파괴적 잠재력을 드러냈다. 먼저, 공산주의로부터의 해방은 대체로 민족 독립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었다. 이는 발트 연안 국가들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둘째, 바르샤바조약기구 내부의 소수민족 분쟁을 완화해 왔던 낡은 메커니즘이 1989년 이후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셋째, 서방측 사람들이 동유럽을 방문하기가 점점 쉬워짐에 따라 외국인 혐오나 인종주의가 강화되었다." (523쪽)


민족주의를 중심 현안으로 끌어올린 것은 유고슬라비아 유혈 분열 사태였다. 이는 공산주의의 실패가 남긴 파멸적 결과의 한 가지 사례이며, 과연 소련이 무엇을 남기고 떠났는지를 보여 준다. 1995년 세르비아의 패배는 유럽에서 인종차별주의의 패배인 동시에 서구의 실패를 의미하는데, 냉전 종식 이후 자유주의 가치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권을 보호하고 학살을 저지하기보다는 힘의 정치를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힘의 정치마저 실패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냥 서방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보스니아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주요 제안이 미국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주변적이었다. 보스니아 사태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유럽이 자신의 문제를 미국 없이 해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527쪽)

 

전쟁으로 연방이 붕괴된 사례는 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유일했다. 전반적으로 동유럽, 그리고 유럽 전체는 20세기 초반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안정적인 질서를 구가하게 되었다. 1989년 이후에는 국경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이 받아들였다. 독일은 마침내 폴란드의 서부국경을 인정했으며, 과거 동쪽 영토에 대한 주장을 모두 포기했다. 발트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전후에 획정된 국경 안에서 독립을 추구했으며, 1939년 이전 영토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안정이란 위태롭게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이어서, 구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일견 비도덕적이고 모순적인 정책은 많은 부분 바로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노력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528쪽)


이 책이 나온 것은 1998년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1990년대 옛 유고연방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대테러전의 10여년을 보내고 우크라이나를 놓고 러시아와 서방이 다시 갈등을 빚는 지금, 21세기의 첫 15년을 덧붙인다면 어떤 설명들이 나올까.


하나만 링크해둔다. 그리스 언론 카티메리니와의 인터뷰다. 마조워는 발칸과 그리스 역사를 많이 연구했다. 인터뷰는 2013년에 했던 것인데, 당시 그리스에서는 파시즘에 가까운 극우정당의 부상이 이슈였다. 역설적이게도 2015년 초인 지금은 극좌파 정당 시리자가 득세해 유럽 정치의 핫이슈로 떠올랐지만 말이다. 


그리스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유명 관광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으나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이라는 두 문명이 지나갔던 곳이고 20세기 좌우 대립의 극심한 현장이었으며 내전과 군사독재를 겪은 나라이고 지금도 '21세기 유럽 정치경제'의 모든 상처가 터져나오는 곳이다. 


Mazower on the rise of Greece’s political extremes


마조워는 이 인터뷰에서 극우 극좌가 화염병을 던지고 점거 농성을 하고 경찰과 시위대가 때리고 싸우고 총 쏘는 상황이 1차 세계대전, 혹은 2차 세계대전 직전 상황처럼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real revolutions and real wars'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립이 불거지고 갈등이 극심해져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유럽이 전후 수십년간 쌓아올린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동시에 이 믿음은 양면적이다. real wars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기쁜 예측이지만 real revolutions도 없는 시대라는 뜻처럼 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