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94

[구정은의 세상] 아파트 외벽

올 2월에 대구에서 팔 이식 수술이 이뤄졌다. 한국에선 처음이었다고 한다. 30대 남성이 손목부터 손가락까지를 이식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 남성은 7월에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까지 했다. 보건복지부는 법률을 고쳐, 그동안 이식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던 장기 등 신체부위에 팔까지 포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수술을 받은 남성은 회복돼 가고 있고, 새 직장도 얻었다 하고, 정부가 법을 고쳐 부족한 부분도 메우기로 했다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 남성이 공장에서 일하다 한쪽 팔을 잃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팔 절단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은 7500명이 넘는다. 아마도 그들 중 상당수는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세계적으로 힘들다는 팔 이식수술이 성공적으로 실시된..

[구정은의 세계] 집배원의 죽음

미국에는 ‘우체국에 간다(Going postal)’는 속어가 있다. 극도로 분노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배경에는 수차례의 유혈참사가 있다. 1986년 8월 오클라호마주 에드먼드의 시간제 집배원 패트릭 셰릴이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셰릴은 10분 만에 우체국 직원 14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년에는 뉴저지주 리지우드와 미시간주 로열오크에서, 2년 뒤에는 미시간주 디어본과 캘리포니아주 대너포인트에서 잇달아 우체국 총기난사가 벌어졌다. 거의 대부분 직원들 간의 공격이었다. 2006년에는 캘리포니아주 골레타와 오리건주 베이커시티에서 연달아 살인극이 벌어졌다. 열악한 노동조건, 스트레스와 긴장에 시달리던 직원들이 극단적인 수법을 택하면서 저런 속어까지 나왔다. 미국 우..

[구정은의 세계]우리는 남이다

아일랜드의 인도계 게이 총리가 14일 취임할 예정이다. 엔다 케니 현 총리 뒤를 이을 리오 바러드카는 38세, 이 나라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된다. 가톨릭 국가에서 들려온 놀라운 소식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변화는 이미 수십년간 진행돼왔다. 그 오랜 변화의 시간들이 쌓여 새 상징을 들어올렸다. 아일랜드는 1993년 동성애 처벌법을 없앴다. 유럽 나라들 중에서는 늦은 편이었다. 그 뒤론 변화의 속도가 빨랐다. 2010년 동성 간의 결혼과 비슷한 ‘시민결합’을 인정했고, 2015년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동성결혼을 허용했다. 세계엔 유명한 성소수자들이 많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전방위 감시망을 세상에 알린 탐사보도 전문기자 글렌 그린왈드,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도 게이다.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

[구정은의 세계]우상이 사라진 자리

이달 초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우고 차베스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석유대국 베네수엘라에서도 유전지대로 유명한 술리아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4년 전 세상을 뜬 차베스의 후계자는 반정부 시위에 흔들리고 있고, ‘차비스모’(차베스주의)는 그렇게 끌어내려졌다. 동상이 부서지는 장면은 언제나 그렇듯 시각적 임팩트가 크다. 14년 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사담 후세인의 거대한 동상이 무너졌고, 그보다 한참 전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그렇게 됐다. 결국 차베스의 동상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참여민주주의, 21세기형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체제를 추구했건만 그 시도는 ‘실패한 실험’으로만 남을 것 같다. 체제에 신물난 사람들은 그렇게 우상을 끌어내린다. 스탈린 체제는 29년이었고, 사담 체제..

[구정은의 세계] 정치인들은 왜 늙었을까

세계의 인구는 약 73억명이다. 세계은행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그중 25%는 갓난아기부터 14세까지의 아이들이다. 15세부터 24세 인구는 전체의 16%다. 20세기 이래로 14세 이하 아이들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던 때는 1965년이었다. 그해 지구 사람들 중 아이들이 38%였다. 중국이 산아제한에 나서고 각국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아이들 비중은 점점 줄고 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4명 가운데 1명은 15세 미만의 아이들이다. 25세 이하까지 합치면 아이들과 청년층 인구는 세계 인구의 42%다. 1965년에 65세 이상 노년층은 세계 인구의 5%가 조금 넘었다. 지금은 고령화로 많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8.7%, 아이들과 청년에 비하면 훨씬 적다. 세계 사람들을 나이순으로 ..

[구정은의 세계] 망령의 시대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는 오토바이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이다. 뿌리 뽑힌 채 질주본능으로만 존재하는 오토바이는 거대 도시를 꽉꽉 메운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뒈져라, 형법 불소급의 원칙.” 문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저급함,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으며 스스로가 더럽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인간들, 늙고 병들고 타락한 나라를 향한 이단아의 처절한 외침이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언술이 곳곳에서 판을 친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연방 하원의원이 백인들의 문명, 백인들의 문화를 거론했다.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빼앗던 시절에 나오던 케케묵은 말들이 21세기에 소셜미디어를 타고 울려퍼졌다. 인종주의의 망령은 미국과 유럽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쌓아올린 이상과 삶의 기준을 흔들..

[구정은의 세계] 이재용이 달나라에 가는 날

미얀마 난민을 돕는 일을 하는 방글라데시 여성을 며칠 전 만나 현지 소식을 들었다. 시리아 난민은 세계의 눈길이라도 끌지만, 방글라데시 국경지대에 방치된 소수민족 로힝자 난민 상황은 정말 심각하다면서 세상의 무관심과 서방의 위선을 개탄했다. 긴급 구호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아이 손에 화상을 입히는 엄마들 사연은 충격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빌 게이츠의 재단이 그곳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이 재단을 놓고 ‘너무 덩치가 크다, 세계 구호원조를 좌지우지한다’ 비난하는 이들이 적잖은 것을 알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가 재산을 기부한다 했을 때에도 ‘착한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위선’이라 하는 시각이 있었다. 얼마 전 옥스팜은 세계 10위 갑부들이 세계 하위층 절반이 가진 재산과 같은 양..

[구정은의 세계]악마들의 역사

미국의 조지 W 부시는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그 중 한 나라인 이라크를 2003년 공격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거짓말이었다. 전쟁은 중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을뿐 아니라 테러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정작 부시는 ‘악의 축’ 발언을 후회했다고, 백악관 연설문 담당자가 고백한 적 있다. 그 아버지 조지 H W 부시 전대통령은 2015년 자서전에서 아들을 ‘잘못 보좌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를 비난했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과 국방장관을 맡았던 체니와 럼즈펠드가 아둔한 대통령을 앞세워 대테러전을 벌인 건 세계가 안다. 부시 부자는 지난해 미국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를 편들지 않았지만 체니와 럼즈펠드는 앞장서 지지했다. 체니의 이름이 트..

[아침을 열며] 홈리스들에게 집을 준 핀란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에 있는 콘피난사스 금융센터는 주요 투자자 다비드 브릴렘버그의 이름을 딴 ‘토레 데 다비드(다비드의 탑)’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90년대 초반 건설이 시작됐을 당시만 해도 계획은 화려했다. 1층부터 16층까지는 호텔, 18층에서 45층까지는 금융회사들이 입주할 계획이었고 옥상에는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만들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1993년 브릴렘버그가 죽고 1994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건물은 골조 공사만 마무리한 채 돈이 모자라 건설이 중단됐고,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 한때 석유로 쌓은 부의 상징이 될 뻔했던 마천루는 실패한 자본주의의 증거로 남았다. 2007년쯤 도시 빈민들이 방치된 건물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이 빌딩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빈민촌이 됐다. ‘버티컬(..

[아침을 열며]테러의 유비쿼터스 시대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남부의 그랑바상은 대서양에 면한 고즈넉한 해안 도시다. 말이 좋아 도시이지 프랑스 식민 시절의 건물들과 벽화가 그려진 담장, 바닷가에서 공 차는 아이들 외에는 별반 눈에 띄는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서도 지난 3월 이슬람국가(IS) 연계 조직이 테러를 저질렀다.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그곳에서도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는 어떤가. 남프랑스의 니스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고급 빵집은, 튀니지의 지중해 리조트는 또 어떤가.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곳들에서 테러가 나리라고는 상상 못했을 것이다. 9·11 테러 뒤 마드리드의 통근열차가 폭발하고 런던 지하철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발리의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자폭테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