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76

[구정은의 세상] 밥값과 평화

대학시절의 어느 겨울, 한 달 동안 ‘알바’를 했던 회사가 있었다. 종일 서서 일하느라 힘들었지만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좋은 회사였다. 4대보험에 가입시켜줬고,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야쿠르트와 초코파이를 줬다. 가끔씩 그 회사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출근하기 너무나 싫어 회사를 그만둘까 했던 기억, 그리고 국. 밥과 함께 나오는 그 국 말이다. 끼니 때마다 국물을 싹싹 퍼먹는 내게, 1cm 깊이로 퍼주는 국은 언제나 모자랐다. 낯선 분위기에서 쭈뼛거리느라고 밥 퍼주는 분에게 ‘국 더 달라’는 말도 못한 채 한 달 동안 점심을 먹었다. 기숙사는 공짜였다. 앉은뱅이 탁자 하나에 텔레비전을 놓아둔 동료 방에 놀러가기도 했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대개들 지하철 요금을 ..

[기협 칼럼] 청와대와의 경쟁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리고 만 하루 동안 청와대 페이스북에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통일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개최했습니다”라며 회담 사실을 공개한 글로 시작해 두 사람이 만나는 사진, “회담 결과는 27일 오전 10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밝힐 예정”이라고 예고한 글, 현장의 영상, 회담 결과를 전하는 문 대통령의 동영상, 발표문 전문, 기자회견 문답, NSC 상임위원회 회의결과 브리핑이 뒤를 이었다. 청와대 웹사이트와 트위터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그대로 올라왔다. 영상 제작 뒷이야기같은 ‘팬서비스’도 빠지지 않는다. 언론들은 남북 정상의 ‘번개’를 재빨리 속보로 전했고, 시민들 관심은 높았고, ..

[구정은의 세상]남북의 시간은 같이 흐른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담담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서는 민족, 혈통, 핏줄이 훨씬 더 강조된 느낌이었다. 남북 정상의 산책과 회담과 만찬의 순간순간들을 담은 동영상들이 이렇게 인기를 끌다니. ‘정상회담 덕후’들이 곳곳에 생겨난 모양이다. “누군가 방명록에 사인하는 걸 실시간 생방으로 지켜볼게 될 줄이야”라는 어떤 이의 말처럼, 정상회담은 국가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다. 민족의 운명, 공동번영, 자주통일. ‘민족’은 얼마나 무거운 말인가. 핏줄이나 혈통, 이런 것들이 강조하는 무언가를 생각하면 중압감이 든다. 나 개인을 넘어선,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어왔던 무언가를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 앞에서 개인은 ..

[기협 칼럼] 여자들은 집에 가지 않는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는 투사다. 하지만 그 자신이 1970년대에는 지금의 이란 체제를 만든 이슬람혁명에 동조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한 대부분의 사회가 그랬듯 가부장적이었던 이란에서 에바디는 테헤란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이 됐다. 회고록에 당시를 회상하는 내용이 나온다. 샤를 비판하는 공개성명에 이름을 올린 그에게, 이슬람주의자인 남성 법관이 묻는다. 혁명 뒤의 국가에서는 당신같은 ‘여성’들의 자리가 없을텐데 왜 이 혁명에 동참하느냐고. 에바디도 이를 몰랐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길을 선택한다. 예상대로 혁명은 여성 판사 에바디를 법정에서 내몰았다. 혁명은 어떻게 사람을 배반하는가, 그 뼈..

[구정은의 세상]서울시장, 베이징시장, 미세먼지

중국 베이징의 천지닝(陳吉寧) 시장은 지린성 태생으로 칭화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다. 영국 런던 임페리얼칼리지에서 1993년 생물화학과 환경시스템 분석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5세에 칭화대 환경공학부 교수가 됐다. 환경학자로 명성을 쌓았고, 2012년부터 칭화대 총장을 지냈다. 당시 49세, 명문으로 꼽히는 이 대학의 최연소 총장이었다. 그러다가 2015년 1월 환경보호부 부장(환경부 장관)이 됐다. 이때도 리커창 내각에서 가장 젊은 각료였다. 천지닝이 주력한 것은 중국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스모그와의 전쟁’이었다. 장관이 된 지 2년이 됐을 때 그는 이례적인 ‘자아비판’을 하면서 중국의 대기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베이징과 상하이와 항저우 등 대도시의 미세먼지 농도가 ..

[기협 칼럼] CBC의 단청

캐나다 CBC방송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100일가량 앞두고 평창에 중계 스튜디오를 꾸렸다. 인터넷에 공개된 스튜디오의 모습은 단아하다. 원목과 대리석 바닥의 간결한 디자인에 동계올림픽 느낌이 물씬 나는 색조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현대적인 감각 뒤의 디테일이다. 푸른 빛이 감도는 창호지와 한국 전통 문창살에 캐나다식 벽난로를 붙였다. 이 방송의 올림픽 중계 화면과 그래픽은 연꽃과 한복의 문자 문양, 초롱으로 수놓여 있다. 캐나다 선수가 국기를 들고 웃음짓는 모습에 한복 문양이 겹쳐지고, 경기 종목을 소개하는 안내문과 선수 소개 그래픽에도 하나하나 한국 전통 장식들을 따넣었다. 후원기업을 소개하는 광고 이미지에까지 단청으로 띠를 둘렀다. 이렇게 정성스레 한국 전통 디자인을 살린 방송 프로그램은 국내에..

[구정은의 세상] 내가 못 배운 페미니즘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가 소설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가슴에 와 박혔던 구절은 ‘아버지가 나빴다’ ‘어머니가 나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검찰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쳐줬어야 했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업수이 여기는 것은 더더욱 참아내서는 안된다고,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

[구정은의 세상] 한상균만 잊는다면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특별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민주노총이 새 지도부를 뽑은 그날 정부는 한상균을 그대로 가둬두는 길을 택했다. 새 출발을 하는 민주노총과 문재인 정부의 관계는 꼬일 대로 꼬였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세상의 흐름을 좇기를 거부하는 이익집단처럼 보일 때가 없지는 않았다. 역대 어떤 정부보다도 ‘노동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익을 고집하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모처럼 시동을 걸려고 하는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거부했고, 대통령이 초청해서 저녁을 먹자는데도 “이벤트성 만찬에 들러리 서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걸 놓고 말이 많았다. 청와대에선 섭섭했을 법도 하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두어 차례 개별 노조들과 노동자들을 불러서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구정은의 세상]작년 이맘때

생각해 보면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어느 집 딸의 대학 불법입학으로부터 시작해 정권에 줄 댄 기업들, 그들에게 돈 받은 권력층, 청와대의 태반주사, 모두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장하는 태블릿PC, ‘사라진 7시간’의 실체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섰던가. 모두가 공유했던 절박함과 동지애. 차마 탄핵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던 야당과 헌법재판소를 움직이고 결국 정권을 바꿀 때까지, 점점 더 많아지던 사람들. 페이스북을 쓰다 보면 잊고 있던 기억과 매일 마주치게 된다. ‘추억 공유하기’라는 이름으로 몇 해 전 그날 올린 글들을 다시 보여주는 이 소셜미디어의 기능은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불편하다. 요즘엔 기분이 좀 이상하다. 지난해 12월의 사진이라며 띄워주는 거리 풍경, 스..

[구정은의 세상]저들이 손잡을 때, 우린 절망했다  

국정원이 하는 짓이 다 그렇고 그런 거였겠지, 생각하기는 쉽지만 이른바 공영방송이라는 곳들에 그렇게까지 개입했다는 것은 놀라웠다. 뭐랄까,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언론 종사자로서 어쩐지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KBS 기자들 동향을 국정원에 건넸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 정보를 편집국장이 국정원에 넘겼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구나. 국정감사 자리에서 눈감고 기자들 질문에 모르쇠 하는 KBS 사장의 모습은 뻔뻔하다기보다는 처참해보였다. 그래,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것 말고 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국정원의 방송장악에 가담한 혐의로 피의자 조사를 받고 있는 김재철 전 MBC 사장은 “목숨을 걸고 단연코 MBC는 장악할 수도, 장악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