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
기자들이 하도 ‘기레기’로 지탄을 받으니 이젠 그 말이 그리 신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자들은 볼멘소리를 내고 싶어도 대놓고 어디에 쓰거나 말하지는 않아왔다. 내심 언론이 지은 죄를 알기에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저들은 반대편이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독자들을 욕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샌 “기자들 모두를 기레기 취급하면 오히려 좋은 기사를 쓰려는 이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며 반격하는 기자들이 보인다. 최문선 한국일보 기자의 지난달 칼럼 같은 게 그런 예다.
미디어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기자들에 대한 그런 무차별 공격보다는 핵심을 찌르는 핀포인트 비판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국 사태’로 ‘전 언론의 기레기화’ 비판이 일어난 뒤에 소셜미디어에서 역설적으로 ‘모두를 기레기로 몰지 말자’는 글을 더 많이 봤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집단을 싸잡아 비난할 때에 ‘좋은’ 기자들만 힘이 빠질 뿐이며 언론 개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윤태진 연세대 교수가 지난 4월 경향신문 칼럼에서 지적한 것도 그런 내용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다. 기레기라는 딱지가 기자들에게 독이 되는지 약이 되는지. 기레기 비판에 대해 사내외 동료들에게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반응은 “저들은 OO빠야”라며 똑같이 집단 낙인을 되돌려주는 것이거나, 하도 많이 들은 소리라 응할 의지도 가치도 없다며 무시하는 것이거나. 대체로 이 둘 중 하나 혹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기레기 낙인찍기가 ‘좋은 기자를 구축(drive out)’할 것 같지는 않다. 언론이 지탄받는 것은 독자들이 기레기라 불러서가 아니다. 기자들을 옹호해주는 분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도저히 스스로 그런 변명은 못 하겠다. 기레기라 불리는 건 결과물일 뿐이지 원인이 아니다. 원인은 어디까지나 언론 안에 있다. 기자들 안에. 늘 누군가의 특권적 행태를 비판하지만 그동안 기자들은 어땠나. 꼭 조국 보도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간 기자들이 누려왔던 수많은 특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원래 기자들의 특권(Reporter’s privilege)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 기자들이 자유롭게 권력을 비판할 수 있게끔 일종의 면책 특권을 주는 걸 가리킨다. 헌법과 관련 법률 아래에서 기자들은 정보원을 공개하라는 압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게 요지다. 반면 한국에서 기자의 특권은 기업 돈으로 가는 해외연수, 남의 돈으로 먹는 밥과 술, 남의 명예와 인권을 짓밟고도 책임지지 않는 행태, 틀린 글을 쓰고도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오만함 같은 것들이다. 권력을 비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익명의 ‘관계자’ 인용을 남발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아직 올해를 마감하기엔 좀 이르지만 언론의 질과 공정성이 2019년 어느 때보다 핫하고 중차대한 화두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내년에 독자들에게 언론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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