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정동길에서]‘늙은 사회’가 될 준비

딸기21 2020. 5. 5. 22:58

2003년 유럽에 폭염이 닥쳤다. 유럽 전역에서 무더위에 사람들이 숨져 나갔고 그해 농사도 망쳤다.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 쪽 상황이 심했다. 프랑스는 그중에서도 유독 피해가 컸다. 유럽 전체에서 7만명가량 숨졌는데 그중 프랑스의 사망자가 1만5000명에 이르렀다. 고령자가 대다수였다.

고립돼 홀로 지내던 노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았다. 숨지고 한참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 가을로 접어들도록 가족을 찾지 못한 노인 시신이 50구가 넘었다. 정부는 노인들을 돌보지 않은 가족들에게 책임을 돌렸고, ‘주 35시간제’를 이유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여름휴가를 간 의사들 탓을 했다. 그러나 부실 대응과 보건시스템의 허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휴가에서 일찍 복귀하지 않은 보건장관은 여론의 포화를 맞았고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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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의 유럽, 아니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때의 프랑스 같다. 이 전염병에 따른 사망률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확산을 통제하는 데에는 정부의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결국 사망률은 ‘노인들이 얼마나 숨졌느냐’가 좌우하는 것 같다.

한국의 방역엔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어느 프랑스인이 주장했다는데 그의 나라에서는 두 달 전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자 노인들에게 ‘집에 있으라’고 지시했다. 중국 후베이성이 임상진단만으로 코로나19 감염자를 분류하자 통계가 엉망이라고 세계가 비난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지난달 노인요양시설 감염자 약 1만8000명과 사망자 530여명이 통계에서 누락된 게 드러났다. 정부가 뒤늦게 파악했으나 공식 통계에는 넣지 않는다고 해서 의문을 사더니, ‘알고 보니 숫자가 과장됐다’고 해 다시 혼선을 빚었다.

한국에서도 대구의 노인요양시설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있었으나 다행히 대형 참사는 막았다. 하지만 다른 곳들 사정은 심각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부근의 요양시설을 중심으로 감염이 퍼졌으며 한 요양원에서 180여명이 숨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미국에서도 서부 워싱턴주의 요양시설에서부터 감염이 확산됐다. 뉴욕의 한 요양원에서는 100명 가까이 사망해 역시 당국이 수사 중이다. 스페인에서는 요양원 직원들이 달아나 감염자들이 방치된 주검으로 발견됐다.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퀘벡의 지인은 “확진자가 하루 1000명씩 늘고 요양시설 노인들이 매일 80~100명씩 돌아가시는 날들이 벌써 2주째”라고 했다.

 

어느 나쁜 요양원의 문제가 아니다. 폐렴은 원래 사망률이 10~30%에 이른다. 코로나19에 노인들이 더 취약한 것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라들은 코로나19 발병이 더디거나 적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2003년의 사스는 정부의 투명성이 전염병 대응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줬으며 국제 공동방역망을 정비하는 계기가 됐다. 멕시코의 양돈시설 주변에서 시작된 신종플루는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의 진화, 먹거리와 전염병의 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코로나19가 보여준 것은 고령화라는 현실이다. 한국의 사망률이 낮은 것은 ‘K방역’ 덕분이지만, 아직 노인들의 시설 거주가 서구처럼 퍼지지 않은 까닭도 있지 않을까.

몇 해 전 ‘폐지 줍는 노후’와 ‘캐리어 끌고 여행 가는 노후’를 대비시킨 국민연금 광고가 논란을 빚었다. ‘65세 때 어떤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라는 문구가 붙은 이 광고는 가난한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비난의 뉘앙스까지 담은 것처럼 보였다. 국내에서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한 초반에 당국은 방역 차원에서 감염자들의 동선을 꽤 상세히 공개했다. 한 고령자의 동선이 알려지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전철표가 공짜이니 저렇게 돌아다닌다”는 비난들이 쏟아졌다.

결국 노인 문제는 돈 문제로 치환되고, 노인은 사회적 ‘비용’ 취급을 받는다. 촛불과 태극기를 거치며 노인들은 정치적으로도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됐다. 이런 갈등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노인 부양은 세대 갈등을 원천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인류는 계속 수명을 연장해왔고 이제 역사상 어느 때보다 오래 살게 됐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낯익은 바이러스의 조금 낯선 변종 하나에 세계가 뒤집어졌다. 우리 모두는 ‘늙은 사회’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바이러스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