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96

[아침을 열며] 홈리스들에게 집을 준 핀란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도심에 있는 콘피난사스 금융센터는 주요 투자자 다비드 브릴렘버그의 이름을 딴 ‘토레 데 다비드(다비드의 탑)’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90년대 초반 건설이 시작됐을 당시만 해도 계획은 화려했다. 1층부터 16층까지는 호텔, 18층에서 45층까지는 금융회사들이 입주할 계획이었고 옥상에는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만들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1993년 브릴렘버그가 죽고 1994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건물은 골조 공사만 마무리한 채 돈이 모자라 건설이 중단됐고,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 한때 석유로 쌓은 부의 상징이 될 뻔했던 마천루는 실패한 자본주의의 증거로 남았다. 2007년쯤 도시 빈민들이 방치된 건물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이 빌딩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빈민촌이 됐다. ‘버티컬(..

[아침을 열며]테러의 유비쿼터스 시대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남부의 그랑바상은 대서양에 면한 고즈넉한 해안 도시다. 말이 좋아 도시이지 프랑스 식민 시절의 건물들과 벽화가 그려진 담장, 바닷가에서 공 차는 아이들 외에는 별반 눈에 띄는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서도 지난 3월 이슬람국가(IS) 연계 조직이 테러를 저질렀다.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그곳에서도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는 어떤가. 남프랑스의 니스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고급 빵집은, 튀니지의 지중해 리조트는 또 어떤가.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곳들에서 테러가 나리라고는 상상 못했을 것이다. 9·11 테러 뒤 마드리드의 통근열차가 폭발하고 런던 지하철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발리의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자폭테러가..

[아침을 열며] 피해자의 시간

스티븐 로런스는 당시 18살이었다. 흑인 청년 로런스는 1993년 영국 런던 남부의 버스 정류장에서 백인 5명에게 흉기로 살해됐다. 경찰은 범인들을 모두 붙잡았지만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이 눈과 귀를 닫았을 때 시민들이 그 가족의 곁에 섰다.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결국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만들었다. 로런스가 숨지고 6년이 지나서였다. 조사위원회는 로런스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됐고 인종주의가 수사 전반에 작용했다고 보고서에 명시했다. 유족과 시민들은 범인들을 비호한 경찰관들과 이들을 감싼 경찰청에 맞서 캠페인을 조직했다. 사건은 ‘정부 대 시민사회의 싸움’이 됐다. 결국 주범 2명이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2012년,사건 뒤 19년이 지난 후였다. 숨진 이와 그 가족들에게 두 ..

[아침을 열며]국회의원 사용법

필리버스터는 참신했다. 그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빗거리였지만 많은 이들에게 ‘축제’처럼 다가왔다. 서방이 ‘민주주의가 미흡한 나라’라고 몰아붙이는 이란의 언론들조차 한국의 필리버스터 사실을 전했을 정도로 외국 언론에서도 뉴스거리가 됐다. 사실 필리버스터는 의회 정치의 오래된 수단 중 하나이며, 기나긴 연설뿐 아니라 여러 방식이 동원돼 왔다. 프랑스에서는 야당이 13만건에 이르는 개정안을 내 법안 심사를 늦춘 적도 있다. 하지만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을 끈다 해서 법안을 마냥 무산시킬 수는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로 나서 붐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0년 미 의회에서는 근 20년만에 8시간 반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감세 연장법안에 맞섰으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듬해 초 결국..

[로그인] 탈레반과 역사의 배신

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냉전의 한 축이던 거대 국가의 침략은 아시아 내륙의 척박한 나라를 괴뢰정권과 군벌과 마약조직이 판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기나긴 베트남 전쟁으로 호된 맛을 봤던 미국은 아프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진창에 빠진 소련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이슬람 무장전투원들을 길렀다. 4년 전 사살된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던 탈레반은 소련에 맞서 싸우면서 조직을 키웠고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태생부터 소련의 적이었지 미국의 적은 아니었다. 여성을 억압하고 인류의 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부수고 미국의 수배를 받는 빈라덴을 숨겨줬지만, 공식적으로 ‘미국의 적’이 된 것은 9·11 테러가 일어난 뒤였다...

[로그인] 망각 협정  

박근혜는 과거를 고치자고 하고 아베 신조는 과거를 잊자고 한다. 지나간 일들을 싹 지우고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관계로 바꾸는 게 가능할까?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그렇게 과거를 바꾸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사람의 기억, 더군다나 집단의 기억을 바꾸는 일인데 말이다. 정치인들이 집단기억상실증을 만들어내려고 협약까지 맺은 사례도 있기는 했다. 1977년 스페인에서 ‘사면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좌우협정이 그런 예다. 이 사회적 협정은 엘 팍토 델 올비도, ‘망각협정’이라 불린다. 장기집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975년 죽은 뒤 스페인 정치권은 과거를 잊자는 약속을 했다. 민주주의로 평화롭게 이행해가기 위해서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과거는 잊고 미래에 집중하자, 많이 들어본 소리다. 프랑코 ..

[로그인] 난민은 우리의 미래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난민들을 받을 수 없다고, 지나가게 해주는 것조차 싫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저들은 난민이 아니라 이민자”라고 했다. 시리아에서 생존의 위험을 피해 온 난민이 아니라 독일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이민자들이며, 유럽 ‘기독교 복지국가들’에 해가 될 존재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무슬림’ ‘복지 축내는 무임승차자들’이라는 못되고 진부한 시각의 전형이다. 오르반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난민들을 ‘망명지 쇼핑객(asylum shopper)’이라고 비아냥거린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복지수당을 받아 리무진을 굴리는 미혼모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복지예산을 삭감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미국 보수 언론들이 ‘복지 여왕’이라고 불렀던 그런 존재..

[로그인] 미개한 나라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고, 전세계 생물종의 5%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하지만 낙원을 품은 이 나라는 굴곡진 역사와 정정불안, 경제 실패로 고통받아왔다. 주요 산업은 임업과 어업, 농업이다. 커피, 바닐라, 사탕수수, 코코아, 벼 같은 작물을 재배한다. 그런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플랜테이션 농업 비중이 높다보니 국제시장의 등락에 경제가 휘둘린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바닐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데, 1985년 코카콜라가 바닐라 함량을 낮춘 ‘뉴코크’를 내놓자 마다가스카르 경제가 휘청였다. 이듬해 코카콜라사가 다시 바닐라 함량을 높인 ‘코크클래식’ 생산을 늘리자 마다가스카르도 되살아났다. 그래서 이 나라 경제에는 ‘코카콜라 경제’라는 ..

[로그인] 메르스, 한국과 독일

“환자의 사망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회복되기만을 바랐던 가족들에게 애도를 전합니다. 병원에서의 감염은 모두 예방됐으며 당국은 의료진을 비롯해 메르스 대응에 관여했던 정부 관리들의 노력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 독일에서도 며칠 전 메르스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추가 감염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망자가 나온 독일 니더작센주 보건부가 내놓은 성명을 꼼꼼히 살펴봤다. 숨진 사람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65세 남성이었다. 한국의 첫번째 환자(68)와 나이도 비슷하다. 이 남성은 지난 2월8일 귀국했고 이틀 뒤 발병해 병원에서 일주일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당시 유럽질병통제센터(ECDC)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는 위중했지만 안정..

[로그인] 아이티와 네팔, 재난의 미래

네팔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게 만든 일 중 하나는 2001년의 ‘미스터리 왕실 살인 사건’이었다. 왕세자가 친부모인 비렌드라 국왕 부부를 비롯한 가족 9명을 총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못 선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엽기 살인극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숨진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가 왕좌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국민들에게 통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오주의 반군이 농촌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정부는 늘 위태로웠다. 말 많고 탈 많던 왕정은 240여년 역사를 뒤로한 채 2008년 종말을 맞았다. 마오주의 반군에 눌려 왕정을 폐지한 인물은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총리였다. 수실 코이랄라 현 총리의 사촌이다. 네팔 정치는 코이랄라 집안의 역사나 다름없다. 그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