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92

[로그인] 탈레반과 역사의 배신

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냉전의 한 축이던 거대 국가의 침략은 아시아 내륙의 척박한 나라를 괴뢰정권과 군벌과 마약조직이 판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기나긴 베트남 전쟁으로 호된 맛을 봤던 미국은 아프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진창에 빠진 소련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이슬람 무장전투원들을 길렀다. 4년 전 사살된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던 탈레반은 소련에 맞서 싸우면서 조직을 키웠고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태생부터 소련의 적이었지 미국의 적은 아니었다. 여성을 억압하고 인류의 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부수고 미국의 수배를 받는 빈라덴을 숨겨줬지만, 공식적으로 ‘미국의 적’이 된 것은 9·11 테러가 일어난 뒤였다...

[로그인] 망각 협정  

박근혜는 과거를 고치자고 하고 아베 신조는 과거를 잊자고 한다. 지나간 일들을 싹 지우고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관계로 바꾸는 게 가능할까?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그렇게 과거를 바꾸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사람의 기억, 더군다나 집단의 기억을 바꾸는 일인데 말이다. 정치인들이 집단기억상실증을 만들어내려고 협약까지 맺은 사례도 있기는 했다. 1977년 스페인에서 ‘사면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좌우협정이 그런 예다. 이 사회적 협정은 엘 팍토 델 올비도, ‘망각협정’이라 불린다. 장기집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975년 죽은 뒤 스페인 정치권은 과거를 잊자는 약속을 했다. 민주주의로 평화롭게 이행해가기 위해서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과거는 잊고 미래에 집중하자, 많이 들어본 소리다. 프랑코 ..

[로그인] 난민은 우리의 미래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난민들을 받을 수 없다고, 지나가게 해주는 것조차 싫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저들은 난민이 아니라 이민자”라고 했다. 시리아에서 생존의 위험을 피해 온 난민이 아니라 독일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이민자들이며, 유럽 ‘기독교 복지국가들’에 해가 될 존재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무슬림’ ‘복지 축내는 무임승차자들’이라는 못되고 진부한 시각의 전형이다. 오르반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난민들을 ‘망명지 쇼핑객(asylum shopper)’이라고 비아냥거린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복지수당을 받아 리무진을 굴리는 미혼모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복지예산을 삭감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미국 보수 언론들이 ‘복지 여왕’이라고 불렀던 그런 존재..

[로그인] 미개한 나라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고, 전세계 생물종의 5%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하지만 낙원을 품은 이 나라는 굴곡진 역사와 정정불안, 경제 실패로 고통받아왔다. 주요 산업은 임업과 어업, 농업이다. 커피, 바닐라, 사탕수수, 코코아, 벼 같은 작물을 재배한다. 그런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플랜테이션 농업 비중이 높다보니 국제시장의 등락에 경제가 휘둘린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바닐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데, 1985년 코카콜라가 바닐라 함량을 낮춘 ‘뉴코크’를 내놓자 마다가스카르 경제가 휘청였다. 이듬해 코카콜라사가 다시 바닐라 함량을 높인 ‘코크클래식’ 생산을 늘리자 마다가스카르도 되살아났다. 그래서 이 나라 경제에는 ‘코카콜라 경제’라는 ..

[로그인] 메르스, 한국과 독일

“환자의 사망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회복되기만을 바랐던 가족들에게 애도를 전합니다. 병원에서의 감염은 모두 예방됐으며 당국은 의료진을 비롯해 메르스 대응에 관여했던 정부 관리들의 노력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 독일에서도 며칠 전 메르스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추가 감염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망자가 나온 독일 니더작센주 보건부가 내놓은 성명을 꼼꼼히 살펴봤다. 숨진 사람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65세 남성이었다. 한국의 첫번째 환자(68)와 나이도 비슷하다. 이 남성은 지난 2월8일 귀국했고 이틀 뒤 발병해 병원에서 일주일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당시 유럽질병통제센터(ECDC)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는 위중했지만 안정..

[로그인] 아이티와 네팔, 재난의 미래

네팔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게 만든 일 중 하나는 2001년의 ‘미스터리 왕실 살인 사건’이었다. 왕세자가 친부모인 비렌드라 국왕 부부를 비롯한 가족 9명을 총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못 선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엽기 살인극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숨진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가 왕좌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국민들에게 통 웃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오주의 반군이 농촌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정부는 늘 위태로웠다. 말 많고 탈 많던 왕정은 240여년 역사를 뒤로한 채 2008년 종말을 맞았다. 마오주의 반군에 눌려 왕정을 폐지한 인물은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총리였다. 수실 코이랄라 현 총리의 사촌이다. 네팔 정치는 코이랄라 집안의 역사나 다름없다. 그 집..

[로그인] 생존의 격차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지 이달로 4년이 됐다. 여러 기구가 쏟아내는 시리아 상황에 대한 통계 중 눈에 띄었던 것은 유엔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정책연구센터(SCPR)의 조사다. 이 기관에 따르면 시리아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내전을 전후해 76세에서 56세로 줄었다. 시리아에서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환갑을 넘기기 힘들다는 뜻이다. 4년 만에 사람들 목숨줄이 20년 짧아진 것이다. 10년간 전쟁을 치른 이라크 사람들도 기대수명이 71.42세인데 시리아의 현실은 암울하다. 유엔 집계로만 2011년 3월15일 이후 시리아인 22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내전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고 오히려 국제전으로 비화해 전쟁터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시리아 얘기를 꺼낸 것은 내전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

[로그인] 파리 테러, '관용'과 '환대'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하고, 테러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범죄다. 하지만 프랑스 잡지사 테러는 이렇게 당연한 일들 속에 얼마나 복잡한 맥락이 숨어있는지를 보여줬다. 이슬람권에도 풍자는 있다. 이미 9세기부터 아랍에는 ‘히자’라는 풍자시가 있었고, 그 유명한 천일야화도 아내에게 배신당한 권력자들에 대한 비꼬기로 시작된다. 독재권력과 극단주의자들을 비꼬는 만평은 많다. 그런데 풍자는 원래 마이너리티가 아니라 돈 있고 센 자들을 꼬집는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극단주의자가 아닌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꼼으로써 이슬람 자체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도 안될 이유는 없다. 이 잡지는 여러 종교를 두루 비꼬고 풍자한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목적이 아니며 늘 무제한으로 옹호되지도 않는다. 프랑스를 비롯해 ..

[로그인] 떠나 보낸 사람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그 해에 떠나보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게 버릇이 됐다. 올해도 세계에서 많은 별들이 졌다. 4월에는 마술적인 서사를 펼쳐보였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세상을 떠났다. 8월에는 ‘키팅 선생’ 로빈 윌리엄스의 자살이 미국은 물론 세계의 팬들에게 충격을 줬다. 미국에서는 퍼거슨이라는 소도시에 살던 평범한 18세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이 흑인 대통령 시대 유색인종이 처한 실존적인 상황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브리트니 메이나드라는 29세 여성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소셜미디어에 죽음을 예고한 뒤 지난달 스스로 ‘존엄사’를 택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죽음을 응원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선택한 마지막 삶에 비판을 보냈다. 외국의 몇몇 기자들은 중동에서 이슬람 ..

[로그인] 주윤발의 수난시대  

“재키찬과 초우윤팟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외신을 훑다보니 이런 글들이 보인다. 여전히 내겐 ‘청룽’이나 ‘저우룬파’보다는 성룡, 주윤발 같은 한국식 한자이름이 익숙하다. 두 액션배우가 만나서 싸움을 한다면 누가 이길까? 두 스타가 길거리에서 한판 붙을 리는 없겠지만 지금 홍콩에서 대결을 벌인다면 응원전에서는 초우윤팟이 이길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살이 쪘어도, 이제는 내가 그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해도 그는 내겐 영원한 스타다. 언젠가부터 매스컴은 중국 ‘본토식’으로 그의 이름을 저우룬파라 쓰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중국에서 그의 영화들이 금지작이 돼버린 마당에, 열심히 그를 중국식으로 불러주는 것은 좀 우습지 않은가. 그는 홍콩 편이었고, 홍콩 시민들 편이었고, 홍콩의 민주화를 위해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