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냉전의 한 축이던 거대 국가의 침략은 아시아 내륙의 척박한 나라를 괴뢰정권과 군벌과 마약조직이 판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기나긴 베트남 전쟁으로 호된 맛을 봤던 미국은 아프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진창에 빠진 소련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이슬람 무장전투원들을 길렀다. 4년 전 사살된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던 탈레반은 소련에 맞서 싸우면서 조직을 키웠고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태생부터 소련의 적이었지 미국의 적은 아니었다. 여성을 억압하고 인류의 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부수고 미국의 수배를 받는 빈라덴을 숨겨줬지만, 공식적으로 ‘미국의 적’이 된 것은 9·11 테러가 일어난 뒤였다. 소련과 미국, 아프간의 물고 물리는 관계도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뒤에야 세상에 낱낱이 알려졌다.
탈레반은 아직도 기승을 부린다. 미국도 이들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접고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의 평화협상에 힘을 싣고 있다. 어차피 없애지 못할 존재들이니, 차라리 그들에게 권력을 조금 나눠주고서라도 미국이 밀어주는 정부가 무너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탈레반보다 더 막강하고 알카에다보다도 위력적인 이슬람국가(IS)가 나타나 중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근래 아프간에서는 IS와 탈레반이 싸우고 있다. 같은 이슬람 극단 조직들끼리 경쟁하는 꼴이다. IS는 아프간에 조직원들을 보내고 있고, 탈레반 일부가 떨어져나가 IS 밑으로 들어갔다.
Richard Johnson
적의 적은 친구라더니, 러시아가 탈레반과 손을 잡기로 했다고 한다. 크렘린의 아프간 특사인 자미르 카불로프는 23일 아프간 정부의 요청을 받아 무기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테르팍스의 보도다. 아프간 정부가 IS와 싸울 수 있게끔 돕겠다는 것이다. 탈레반과도 정보를 공유하면서 IS와의 싸움을 함께 하겠다고 했다. 카불로프는 “탈레반의 이해관계가 우리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카불로프는 1990년대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러시아 수송기들과 인질들을 칸다하르 공항에 억류했을 때 석방협상을 했던 인물이다. 러시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탈레반을 지금도 테러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IS라는 테러조직과 싸우겠다며 탈레반과 힘을 합친 셈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탈레반과 러시아의 결탁은 참 묘하다. 역사의 배신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역사의 배신이라기보다는 되돌이표인 듯 싶다. 소련은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변방의 아프간을 무력 점령했고, 미국은 이슬람주의자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며 대리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무기가 뿌려지고 아프간은 폭력의 나락에 빠졌다. 미국과 소련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란, 파키스탄, 이집트 등등이 각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뒤에서 개입했다. 지쳐 힘이 빠진 소련은 결국 아프간을 버렸다. 남은 것은 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무기를 받고 전술을 배운 무장세력들이었고, 그들은 9·11 테러로 미국의 등에 칼을 꽂았다.
지금의 IS 사태도 배역만 바꿔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은 말 안 듣는 나라를 응징한다며 이라크를 무력 점령했고, 과거의 공범이었던 무장세력들은 반미 전사로 탈바꿈했다. 이 과정에서 무기가 뿌려지고 이라크는 폭력의 나락에 빠졌다. 지친 미국은 결국 이라크에서 발을 뺐다. 남은 것은 탈레반이나 알카에다보다 더 잔혹하고 진화된 무장세력들이었고, 그들은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IS보다 더 나쁜 자들이 나타나면 그때 미국과 러시아는 IS와도 손을 잡을까.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서부터 IS 사태까지 36년이 흘렀다. 총 가진 자들끼리 적이 됐다 동지가 됐다 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피를 흘린다. 이 악순환은 언제까지 되풀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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