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 피해자의 시간

딸기21 2016. 5. 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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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로런스는 당시 18살이었다. 흑인 청년 로런스는 1993년 영국 런던 남부의 버스 정류장에서 백인 5명에게 흉기로 살해됐다. 경찰은 범인들을 모두 붙잡았지만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이 눈과 귀를 닫았을 때 시민들이 그 가족의 곁에 섰다.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결국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만들었다. 로런스가 숨지고 6년이 지나서였다. 

조사위원회는 로런스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됐고 인종주의가 수사 전반에 작용했다고 보고서에 명시했다. 유족과 시민들은 범인들을 비호한 경찰관들과 이들을 감싼 경찰청에 맞서 캠페인을 조직했다. 사건은 ‘정부 대 시민사회의 싸움’이 됐다. 결국 주범 2명이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2012년,사건 뒤 19년이 지난 후였다. 숨진 이와 그 가족들에게 두 번, 세 번 고통을 안긴 경찰의 대응 전반에 대해서는 지난해에야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세월호 유족들이 영국을 찾아가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만난다고 한다. 이 사건은 1989년4월에 일어났다. 영국 셰필드의 힐스버러 축구장에서 임시 개방된 입구로 들어가려던 관중들이 몰려 96명이 숨졌다. 경찰은 ‘훌리건들의 난동’ 탓에 ‘우발적인 사고’가 났다고 했다. 조사위원회는 경찰이 관중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내놨으나 검찰은 경찰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운동가가 됐고, 사고 8년 뒤 두 번째로 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살릴 수 있었던 이들도 늑장 대처 때문에 숨진 사실이 확인됐다. 20년 뒤인 2009년 다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마침내 지난달에야 당국의 총체적 과실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막무가내 훌리건으로 몰렸던 사망자들이 누명을 벗기까지 27년이 걸렸다. 


나이지리아의 시인이자 저술가인 켄 사로-위와는 석유회사 셸이 기름을 유출해 니제르강 삼각주를 오염시키자 원주민들을 모아 싸웠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국민 편이 아닌 외국 기업 편이었다. 1993년 당국은 사로-위와와 5명의 동료들을 체포했다. 사로-위와는 “우리는 역사 앞에 서 있다”는 최후진술을 남기고 처형됐다.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받기 위한 유족들의 싸움은 지난했다. 그린피스가 2001년 독재정권과 결탁한 셸의 잘못을 폭로하고 나서야 상황이 반전됐다. 셸은 그 2년 후인 2003년 일부 책임을 시인했다. 원주민 운동가들이 숨지고 10년이 지나서였다. 셸은 지난해에야 원주민 지역을 정화할 환경기금을 만들겠다고 합의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그 사이에 독재정권이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누구의 책임인지 밝혀내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나마 나이지리아는 사정이 낫다고 해야 할까. 1984년 인도 보팔에서 미국 회사 유니온카바이드의 살충제 공장이 폭발했다. 화학물질이 일으킨 최악의 사건이라는 ‘보팔 참사’다. 숨진 사람이 2만명이 넘고 후유증 피해자가 수십만을 헤아리는데 이들은 제대로 배상조차 받지 못했다. 당국은 10년 동안 주민 피해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의사들의 조사결과도 발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다. 피해자가 당국의 주장보다 훨씬 많았고 상황도 훨씬 심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스웨덴의 의사가 현지 조사에 나서면서였다. 유니온카바이드는 회사 이름이 바뀌었고, 사고 당시 이 회사 경영자였던 미국인 워런 앤더슨은 2014년 플로리다주의 요양소에서 92세로 편안히 세상을 떴다.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100명이 숨진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10년? 200명이 숨진 사건을 푸는 데에 20년? 물론 이런 법칙 따위는 없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밝혀내는 데에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조금 지났지만 벌써 지겹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기까지는 첫 피해자가 확인되고 나서 5년이 걸렸다. 


가해자의 시간과 피해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중력이 시공간을 끌어당기듯 죽음이 끌어당긴 고통의 시간은 길고 무겁고 어둡다. 숨지고 다친 이들과 그 가족들이 보내야 하는 시간의 무게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온 사회가 나서서 그 시간을 함께 살아가려 할 때에 지옥의 시간은 줄어들고 공동체는 해법을 얻는다. 


피해자는 늘 약자다. 강자는 결코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누구의 편인가다. 정부가 힘 있고 돈 있는 자들 곁에 설 때 역사는 거짓의 편이 된다. 사람의 목숨값이 너무 싸다고들 한다. 정부를 진실의 편으로 만들고 사람의 생명이 그 자체로 대접받게 하는 것은 시민의 일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시간을 견뎌내는 이들 곁에 서주는 것도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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