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 김장겸의 '사소한 일'

딸기21 2017. 9. 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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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은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기 위해 ‘공작’을 했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을 개발하고 있다면서 위험을 과장한 정보들을 줄줄이 국민들 앞에 내놓은 것이다. 영국은 참전했고, 영국 군인 179명이 먼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BBC 방송이 문제를 제기했다. 블레어 정부가 참전 지지 여론을 키우기 위해 이라크에 관한 보고서에 “대량살상무기를 45분 안에 발사할 수 있다”는 내용을 슬그머니 끼워넣어 위험을 부풀렸다고 보도했다. 파문이 커지고 의회의 조사가 시작됐다. 블레어 총리의 측근이 의문의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BBC를 맹공격했다. BBC 이사회는 저널리스트들 편에 섰다. 당시 이사회는 “기자들과 뉴스 제작진은 공정성과 정확성이라는 원칙을 지켰다”면서 “공익에 반(反)하는 외압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BBC라고 정부의 압박이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다. 시청료 징수가 중단되는 2007년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이 기금지원법안을 통과시켜야만 방송사 재정을 보장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영진과 이사회의 든든한 지지가 있었기에 뉴스를 만드는 이들이 총리실의 공격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자신감은 국민들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BBC는 공영방송의 정신을 규정한 ‘공익헌장’을 보도 기준으로 삼는데, 자국 군인들이 참전한 전쟁에서도 시종 냉정함을 잃지 않는 보도로 “역시 BBC”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장겸 MBC 사장이 5일 오전 부당노동행위 혐의에 대해 조사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에 출석하고 있다. _ 이준헌 기자


언론계 생활을 함께 시작한 MBC의 한 친구와 얼마 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약속 시간을 불과 20분 남겨놓고, 오늘 점심은 좀 힘들겠다고 연락이 왔다. 기자들은 약속을 급하게 취소할 때가 적지 않다. 갑자기 테러가 일어났다든가, 항공기가 추락했다든가. 뭔가 급한 일이 생겼거니 했다. 다음날에야 알았다. 그가 그날 점심 무렵 김장겸 사장 체제의 MBC에서 끝내 못 버티고 자리를 내놨다는 것을.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일베 기자’라 불리는 기자가 자신이 잘 아는 만화가를 ‘소비자 인터뷰’로 방송에 내보냈다는 소식을 들으니 실소가 나온다. 누군가에겐 뉴스가 ‘장난’이구나. 어느 지방 MBC 사장이 노조원들에게 혓바닥을 내미는 동영상을 봤을 때에는 모욕감이 들었다.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다. 언론인임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줄줄이 폭로되는 것을 보니, 그 속에서 대체 어떻게 기자로, PD로, 아나운서로, 작가로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방송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받아쓰기 뉴스가 횡행하다 못해 우스운 지경으로 추락했다. ‘비오는 날 단팥빵’ ‘알통 나온 사람은 보수적’ 같은 리포트가 버젓이 메인 뉴스를 장식하는 사이에, KBS 기자들이 힘들게 취재한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조작’ 증언은 회사로부터 방송을 거부당했다. 진짜 뉴스는 사라지고 가짜뉴스가 진실을 뒤덮었다.

 

두 방송사에서 일어난 일들은 언론의 문제이자,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화도 없는 사무실에 배치돼 하루 종일 사측과 신경전을 하다가 결국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다는 MBC 기자의 얘기도 들었다. 5년 전 해고돼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 암 투병 중인 이용마 기자의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김장겸 사장은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5일 뒤늦게 고용노동부 조사에 응했다. 김 사장 측의 주장은 기가 막히다. “센터 설립과 전보는 사장 취임 전의 일이고, 근로계약서 제공 미비, 퇴직금 산정 일부 잘못, 직원 급여 산정 실수 등은 사장이 잘 알 수도 없는 사안이고, 실수를 교정하면 되는 단순한 사안.” 그에게는 남의 일을 빼앗고 방송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 야만적인 행위들이 여전히 그렇게 사소한 일인가 보다.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감시하는 저널리즘은 줄어들고, 순간의 재미는 있지만 씹고 나면 허무한 풍선껌 같은 뉴스들이 넘쳐난다. 언론이 헛발질을 하는 사이에 미디어 환경은 바뀌었다. 기술도 변했고 기기도 달라졌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미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이다. 생각의 날을 벼리는 통로와 사고체계가 바뀌어 가는 시대에, 이에 적응하고 변신해도 모자랄 시기에 언론은 진창에서 허우적거렸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한국에서 방송은 언제라도 정권이 쥐고 흔들 수 있는 도구라는 인식을 심어줘버린 것이다.

 

파업이 시작됐다. 광고조차 내보내지 못해 ‘겨울철 안전운전 정보’를 내보내고 프로그램을 재탕하는 MBC 화면을 보니 애처롭다. 이제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달라지려면 뿌리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일손 놓고 파업에 나선 이들보다 더 처절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힘들게 돌아온 만큼 한발 더 나아갈 것이다. 시민들이 뒤에 있으니까. 마지막 일전에 나선 이들에게 기자로서 동지애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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