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저들이 손잡을 때, 우린 절망했다  

딸기21 2017. 11. 7. 16:32

국정원이 하는 짓이 다 그렇고 그런 거였겠지, 생각하기는 쉽지만 이른바 공영방송이라는 곳들에 그렇게까지 개입했다는 것은 놀라웠다. 뭐랄까,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언론 종사자로서 어쩐지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KBS 기자들 동향을 국정원에 건넸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내 정보를 편집국장이 국정원에 넘겼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구나.

 

국정감사 자리에서 눈감고 기자들 질문에 모르쇠 하는 KBS 사장의 모습은 뻔뻔하다기보다는 처참해보였다. 그래,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것 말고 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국정원의 방송장악에 가담한 혐의로 피의자 조사를 받고 있는 김재철 전 MBC 사장은 “목숨을 걸고 단연코 MBC는 장악할 수도, 장악될 수도 없는 회사”라며 국정원과 일말의 관계도 없다고 부인했다. 청와대에 불려가 ‘쪼인트’ 까인 걸로 알려진 사람이 이제 와서 목숨을 걸겠다고 한다. 미디어오늘은 MBC 관리감독기관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지낸 김우룡씨가 재임 시절 국정원 정보관과 만났음을 시인했다고 썼다. 최근 드러난 언론과 국정원의 결탁은 대체 한국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새삼 되씹게 만든다.

 

모니카 바이스너


뉴스타파는 6일 조세회피처에 가짜 회사를 만들어놓고 세금을 피해간 기업들을 폭로했다. ‘파나마 페이퍼’에 이어 다시 세계를 들썩이게 한 이번 문서의 별명은 ‘파라다이스 페이퍼’다. ‘그들만의 낙원’에 이름을 올려둔 국내 기업 중엔 탈세와 횡령 혐의로 총수 일가가 이미 재판을 받고 있는 효성그룹도 있단다. 대양의 외딴 섬과 한국 재벌의 연결고리, 이젠 낯설지도 않다.

 

그런 결탁이 그뿐이랴. 얼마 전 경북 봉화의 석포제련소에 다녀온 송윤경 기자는 단풍 물든 산길을 지나 갑자기 맞닥뜨린 환경파괴의 처참한 현장보다도 ‘환피아’와 광산기업의 노골적인 맞거래에 더 분노했다. 영풍그룹이 운영하는 이 제련소를 관할하는 대구지방환경청장이 영풍 부사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회전문 인사’의 양상은 상상을 넘어설 지경이었다. 환경부 장관, 노동부 장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 검찰 고위간부 출신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이 회사에서 무슨무슨 직함을 받았다. “검찰, 노동계, 필요한 곳 인사는 다 있더라고요.” 눈감아주고 편 들어주며 환경 망칠 때 거기 밥줄이 달린 주민들은 쉬쉬하는 수밖에 없고, 그사이 산과 강은 독성물질로 덮인다.

 

국정원이 국민들 상대로 댓글 조작을 했는데 검찰은 정권과 결탁해 외려 수사를 방해했다. 검찰과 권력의 결합은 뉴스거리도 아니다. 학자들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힘 가진 이들에 붙었다.

 

다 손을 잡고 있었다. 적폐는 혼자 있지 않았다. 끼리끼리 손잡고 만들어낸 것이다. ‘적폐 청산’이라고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일들은 그들이 만든 카르텔의 빈틈을 파고들어 드러내는 일이다.

 

그들의 결탁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이었다. 정권의 안위를 지키겠다며 청와대와 정보기관과 군까지 나서서 방송사 간부들과 짜고 미디어를 쥐락펴락할 때 기자와 PD들은 일을 빼앗겼고 시청자들은 뉴스를 빼앗겼다.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이용마 기자의 메마른 얼굴을 보니 고통의 시간이 그대로 느껴져 참담하다. 김재철은 후배 기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도 은총이라 했었다고 한다.

 

손잡은 저들 때문에 사람들뿐 아니라 땅이 버려지고 강도 버려지고, 생각과 역사마저 저당잡혀야 했다. 기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세금을 빼돌릴 때 몇 안되는 일자리를 놓고서 우리끼리 피 튀기게 밥그릇 싸움을 해야 했다. 노동 당국이 재벌들 편만 들면서 노동자들을 궁지로 몰아온 시간 동안에 비정규직들은 불안에 떨고 노조는 파괴공작과 손배소에 흔들리고 민주노총 위원장은 감옥에 들어갔다. 동네 빵집들이 프랜차이즈에 밀려나 골목에서 상권 전쟁이 벌어지는 사이에 비정규직들은 불법파견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파리바게뜨 노동 문제를 바로잡겠다면서 고용노동부가 뒤늦게 나섰지만 세상이 자기네들 뜻대로 계속 움직여가리라 믿는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법’으로 승부를 보겠다 한다. 누릴 것 다 누리는 자들이 똘똘 뭉쳐 있을 때 빼앗긴 사람들끼리 손가락질하며 싸워야 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다.

 

누구 말마따나, 친일파를 청산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그저 일제에 협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식민통치라는 폭압을 거들면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이기 때문이다. 적폐(박근혜가 썼던 이 단어조차도 정말 구시대적이다)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동안 그들끼리 돈 벌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해서, 샘이 나서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남을 짓밟았기에 징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인은 외국에 나가서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 마치 복수심에 눈이 먼 새 정부의 칼질인 양 비난했다지만 파헤칠 일들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의 공생관계를 까발리는 일은 그 카르텔에 배척받은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보여주고 희망을 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