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 한상균만 잊는다면  

딸기21 2018. 1. 2. 16:22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특별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민주노총이 새 지도부를 뽑은 그날 정부는 한상균을 그대로 가둬두는 길을 택했다. 새 출발을 하는 민주노총과 문재인 정부의 관계는 꼬일 대로 꼬였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세상의 흐름을 좇기를 거부하는 이익집단처럼 보일 때가 없지는 않았다. 역대 어떤 정부보다도 ‘노동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익을 고집하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모처럼 시동을 걸려고 하는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거부했고, 대통령이 초청해서 저녁을 먹자는데도 “이벤트성 만찬에 들러리 서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걸 놓고 말이 많았다. 청와대에선 섭섭했을 법도 하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두어 차례 개별 노조들과 노동자들을 불러서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유행하는 콩글리시 표현을 빌리면 ‘민주노총 패싱’이라 해도 될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툴루즈-로트렉의 '세탁부'. 사진 위키아트


 

민주노총은 대통령의 밥상을 걷어찼다. 한상균 사면을 거부함으로써 대통령은 민주노총의 마음을 걷어찼다. 앞으로 대화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어느 한쪽만의 잘못은 아니다. 청와대의 고심도, 20년 가까이 누적돼온 민주노총의 배신감과 좌절감도 모두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한상균이 마음 쓰이는 건 그런저런 협상의 공학 때문이 아니다. 감옥 안의 노조위원장이 드러내 보이는 우리 사회의 본질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양심을 건드린다.

 

시위를 했다. 수백만명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분노가 쌓이고 또 쌓이던 터였다. 그렇게들 모이기 전에, 한상균은 앞장서 거리로 나가 시위를 주도했다. 그래서 범법자 낙인이 찍혔고 옥에 갇혔다. 모두가 안심하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거리로 나올 수 있기까지 한상균처럼 힘들게 싸운 이들이 있었다. 그 힘이 쌓여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나쁜 대통령을 쫓아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해 핍박받던 이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편다.

 

이제 우린 행복하다. 멋진 대통령, 믿음직스러운 정부. 한쪽에선 여전히 시비를 걸고 발길을 잡아채려 하고 빨갱이 타령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실제로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이뤄졌다.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공영방송 사장과 뉴스 앵커가 바뀌었다. 관공서의 비정규직들에겐 안정된 일자리를 주기로 했다. 최저임금도 올라간다. 잘못된 외교협상도 사과했다. 우린 만족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 한상균이 남아있다는 사실만 빼면. 그가 갇혀 있다는 것만 잊고 있으면. 극우파들이 빨갱이 폭력분자라고 손가락질하는 한상균을 잠시만 더 가둬두면. 우린 안전하다. 

 

대통령이 스스로 “한상균이 눈에 밟힌다”고 했던 사실 따위는 잠시 잊자. 그를 더 가둬놓아야 하는 정치적인 이유들이 있지 않겠는가. 우린 다 이해한다. 수구세력들은 그를 풀어주면 국가가 전복될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그들도 이제 마음놓았을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세워진 정부조차 한상균만큼은 사면하지 않았으니. 진보 정치세력은 보수파의 발목잡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인지시켜줬으니. 이 정부가 풀어주지 못할 과격좌파의 한계선이 대중집회를 주도한 민주노총 위원장임을 보여줬으니. 감히 ‘불법 폭력시위’를 한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켰으니. 

 

친노동을 내세운 정부의 출현에 뜨악했을 기업들도 이제는 안심했을 것 같다. 한상균만 잊는다면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 사회의 외피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다. MBC <PD수첩> 제작진은 지난 정권 때 한상균을 다루려다 회사의 핍박을 받았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자유를 찾았지만 한상균은 그대로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집회’가 아닌 ‘촛불혁명’이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그 혁명은 너무나도 평화적이었다고 세계가 격찬하지 않았던가. 폭력과 비폭력의 잣대로 시민혁명의 정당성을 가르는 프레임은 한국에서 유독 강하다. 한상균이 사면에서 배제됨으로써 그 잣대는 다시 한번 국가의 인증을 받았다.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어술러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는 행복한 나라가 나온다. 어린아이 하나를 지하실에 가둬두고 고통 속에 방치함으로써 그곳 사람들 모두가 안녕을 누린다. 갇힌 아이의 존재를 잊거나 모른 체하는 동안에 적어도 사람들은 행복하다. 르귄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는 대가로 만족을 즐기는 소시민들을 짧은 단편에 섬뜩하게 그려낸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공동체 모두가 최면에 빠질 수 있다면. 촛불로 나라를 뒤집은 지 1년도 채 안돼 우리는 축제같은 집회 이전에 벌어졌던 탄압을 잊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대신 안락한 무관심에 빠져들려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대가로 지불함으로써 나머지 사회가 온전한 행복과 민주주의를 누릴 수는 없다. 한상균이 갇혀 있는 곳은 우리의 오멜라스이고 한상균은 우리의 양심에 박힌 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