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계]우리는 남이다

딸기21 2017. 6. 1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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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인도계 게이 총리가 14일 취임할 예정이다. 엔다 케니 현 총리 뒤를 이을 리오 바러드카는 38세, 이 나라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된다. 가톨릭 국가에서 들려온 놀라운 소식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변화는 이미 수십년간 진행돼왔다. 그 오랜 변화의 시간들이 쌓여 새 상징을 들어올렸다. 아일랜드는 1993년 동성애 처벌법을 없앴다. 유럽 나라들 중에서는 늦은 편이었다. 그 뒤론 변화의 속도가 빨랐다. 2010년 동성 간의 결혼과 비슷한 ‘시민결합’을 인정했고, 2015년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동성결혼을 허용했다. 


세계엔 유명한 성소수자들이 많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전방위 감시망을 세상에 알린 탐사보도 전문기자 글렌 그린왈드, CNN의 유명 앵커 앤더슨 쿠퍼도 게이다.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은 동성애자라 밝히면서 “신이 내게 준 선물 중 하나”라고 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국내에도 독자들이 많은 미국 동화작가 모리스 센닥도 생전에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동성 파트너와 함께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이들의 사정을 문제 삼아 아이폰을 안 쓰고 센닥의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길 거부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



영국 작가 J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가 이달로 첫 출간 20년을 맞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은 마법학교 교장선생님 덤블도어 ‘게이설’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최근 “덤블도어를 게이라고 볼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다. 덤블도어를 콕 집어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롤링 스스로 “등장인물 중 동성애자가 있다”고 했고, 덤블도어 게이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롤링은 성소수자 권리를 앞장서서 옹호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2001년부터 2014년까지 독일 베를린 시장을 지낸 클라우스 보버라이트는 “나는 게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게이인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공교롭게도 그와 임기 대부분이 겹쳤던 전 파리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 역시 게이였다. 지금 런던에서는 무슬림 이주민 가정 출신인 사디크 칸이 시장을 맡고 있다.


유독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것들을 공격한다. 사회를 지킨다고 자처하는 자들의 인권침해는 우습고 또 잔인하다. 태어난 곳과 종교와 성적 지향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들을 파고들어가 공격한다. 프랑스에서는 다음주면 르완다 전쟁고아 출신 하원의원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달 전 대선에선 유권자 3분의 1이 반이민 극우파 후보를 찍었다. 소말리아계 난민 출신 여성 의원이 활동하던 네덜란드에서 이제는 총리가 이민자들을 공격한다. 이념은 무너졌고 전선은 혼란스럽다. 타인의 정체성을 대하는 태도가 정치적 색깔을 보여주는 가장 큰 지표가 된 듯싶다. 난민과 이주자 문제, 젠더와 성소수자 문제, 종교 문제 모두에서.


세계에서 불거지고 있는 ‘성소수자와의 싸움’ 그리고 ‘이주민과의 싸움’은 그리 오래지 않은, 경제침체를 맨 밑바닥 원인으로 깔고 있는 정치적 현상이다. 21세기 들어 이슬람권에서도 종교적 보수화와 성소수자 공격이 두드러졌다. 이슬람국가(IS)는 동성애자를 살해한다. 미국 텍사스에서는 성소수자 인권을 묵살하는 주의회의 보수적인 조치들이 시위대의 의회 점령까지 불렀다. 인도네시아에선 동성애자가 몽둥이질을 당했다. 러시아에선 정부와 국영 언론들이 게이를 악마로 몰아간다. 한국 대선에서 홍준표는 동성애와 군대 내 동성 성폭행도 구분 못하는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서 인권을 모욕했다. 어디 그 사람만 그럴까. 모든 혐오는 ‘소수’를 향하고 차별과 범죄로 귀결된다. 


작은 변화가 쌓여 세상이 바뀐다. 여성 대통령이 나왔음에도 한국이 성평등 국가로 변모하지 않은 것은, 그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과 지지기반 탓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수십년간 평등의식을 힘 있게 쌓아올리지 못한 탓이다. 여성 외교장관 한 명 보기도 이렇게 힘든 나라이니. 하지만 눈감고 귀막고 흐름을 뒤집을 순 없다. 지난 10일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이 열린 시청 앞 무대에서는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바러드카가 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사에 어떤 이는 “한국에서도 37세 베트남계 게이 대통령 취임, 그런 날이 올까”라는 댓글을 달았다. 바러드카는 정치적으로 ‘진보’ 쪽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피너게일(아일랜드가족당)은 전통과 민족을 중시하는 중도우파 정당이다. 바러드카는 2015년 커밍아웃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반쪽 인도계 정치인도, 의사 출신 정치인도, 게이 정치인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구성하지만, 나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은 어느 한 요인으로만 규정될 수 없는 존재다. 남의 사적인 것들을, 그것도 어느 한 요인만을 뽑아내서 손가락질하고 공격할 근거는 없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된다. 시민의 연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오지랖은 필요 없다.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고, ‘우리는 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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