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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 미 대통령 '적과의 만남', 트럼프-로하니가 마침표 찍을까

딸기21 2019. 9. 24. 11:40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을 찾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를 방문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세 번이나 만났다. 지난 세기의 적들과 미국의 관계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정상들의 대화 속에 모두 몇 걸음씩이라도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40년 전 이슬람혁명으로 냉전 시기의 세계질서에 충격타를 안긴 이란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유엔본부(뉴욕)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남으로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지 않은 적대국 정상은 이란 대통령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미-이란 정상의 회담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기대감이 커지긴 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산유시설 공격 같은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미국과 이란 사이는 오히려 더 악화됐다. 공식적인 단독 정상회담은 아닐지라도 이번 유엔총회에서 트럼프와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만날 가능성은 남아 있다. 트럼프는 겉으로는 이란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기회의 문은 열어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연함’ 강조한 트럼프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하고 있는 트럼프는 23일(현지시간) 로하니를 만날 가능성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확답을 피한 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갈 길이 멀다”면서 “이란과 만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것도 테이블 위에서 완전히 치워진 것은 아니라”는 말도 했다.

 

트럼프는 이달 초만 해도 유엔 총회 기간에 로하니와 만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으나 사우디 산유시설 피격 뒤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로하니와의 회동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 뉴욕의 인터콘티넨탈 바클레이 호텔에서 회담하고 있다.  뉴욕 AP연합뉴스

 

로하니는 이날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이란 대통령실은 “미국은 이란 대표단이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참석해 세계에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로하니는 사흘 동안 유엔 총회에 참석하며 연설을 하고 15개국 정상들을 만날 계획이다.

 

클린턴은 재임 마지막 해인 2000년 11월 베트남을 방문해 레 카 피에우 공산당 서기장과 총리를 만났다. 2005년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베트남을 찾았다. 2015년에는 응우옌 뿌쭝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첫 미국 방문을 함으로써 20세기 격렬한 전쟁을 벌였던 두 나라의 화해 절차를 마무리했다.

 

오바마는 집권 첫 해인 2009년 6월 온두라스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정상회의 때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첫 공식 회동을 했다. 2016년 ‘역사적인’ 쿠바 방문 때에는 라울과 정상회담을 했으나 라울의 형인 피델 카스트로는 만나지 않았다. 트럼프는 김정은 위원장과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 판문점으로 무대를 바꿔가며 세 차례 회동했지만 아직 상호 방문은 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들과 ‘적과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을 인물은 이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 옛 적들이 다 사라진 상황에서 남아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적대국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란과의 관계는 개선될 듯하다가도 다시 악화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오바마 시절에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과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 콤비가 힘들게 핵 협정을 만들어냈지만 2013년 오바마와 로하니의 전화 통화가 전부였다.

 

‘중재자’는 누가 될까

 

이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만일 성사된다면 트럼프는 북한, 이란과의 수십년 적대를 누그러뜨리는 쌍둥이 위업을 달성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상황이 낙관적이지는 않다.

 

미국과 베트남의 화해가 이뤄지기까지는 기나긴 준비 기간이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을 찾아가 베트남 측 옛 전시 지도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했다. 존 케리와 존 매케인이라는 미국 민주·공화 양당 걸출한 정치인들의 지원과 중재도 있었다.

 

적에서 파트너로... 미국과 베트남, 애증의 역사

히가시 다이사쿠 <적과의 대화> 

 

2016년 3월 쿠바 아바나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이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바나 AFP연합뉴스

 

오바마가 쿠바와 관계를 풀 때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은밀하면서도 막강한 중재자가 있었다. 교황은 당시 오바마와 라울 카스트로 두 사람에게 각각 비공개 편지를 통해 중재를 제안했고, 미국과 쿠바 양국 관리들이 바티칸에서 비밀리에 만나 수감자 교환 등을 협상했다. 2014년 12월 17일 교황의 78세 생일에 오바마와 라울은 나란히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오바마, 쿠바에 간다...하나둘씩 풀리는 굴곡진 역사

미-쿠바 화해 뒤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있었다

 

트럼프와 김 위원장의 회동에는 관례와 절차를 따지지 않는 트럼프 개인의 ‘돌발’ 캐릭터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중재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란 문제에서는 양측의 신뢰를 받는 그런 중재자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현재 양측의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마크롱 대통령이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마크롱은 23일과 24일 로하니와 트럼프를 차례로 만난다. 마크롱은 로하니와의 회동을 앞두고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트럼프와 아침에 비공식으로 만났다”고 말해, 미-이란 정상들 사이에서 중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마크롱은 지난달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장에 이란 외교장관을 깜짝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에게도, 로하니에게도 마크롱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칠 지는 알 수 없다.

 

이란 외교장관을 G7 회의장에 부른 마크롱

 

신뢰는 없고 ‘스타일’뿐

 

또 한 명, 미국과 이란 사이를 오가는 인물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다. 아베는 올 6월 일본 총리로서는 41년만에 이란을 방문했다. 미국과 이란 사이 ‘호르무즈 긴장’이 높아지던 때에 테헤란을 찾아가 로하니를 만났다. 아베는 24일 로하니를, 25일 트럼프를 만난다. 지지통신은 아베가 양측에 긴장 완화를 촉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아베 역시 중재자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아베가 테헤란을 방문한 순간 일본 유조선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공격을 받았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2000년 11월 베트남을 공식 방문해 베트남 군인들을 사열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5년 미국과 이란이 그나마 핵 협상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오바마 외교안보 서클의 이란 전문가들 공이 컸다. 워싱턴 안팎의 이란 전문가들, 수전 라이스 전 유엔 대사가 만들어놓은 이란 인맥, 양국 외교장관들이 쌓아둔 신뢰 같은 것들이 큰 몫을 했다.

 

이란 핵 합의 공신들, 'MIT의 두 사람' 모니즈와 살레히

'타협과 절충'...'협상의 완결판' 보여준 이란 핵 합의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인사들은 이스라엘 편들기와 이란 압박에만 몰두하고 있다. 카타르 중재설이 나오지만, 이란과 아랍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한다는 비판이 적잖은 카타르가 나서면 미국과 사우디 관계 등 주변 정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 결국 양국이 풀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과 이란, 반세기 애증의 관계

 

핵 합의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로하니는 자국 내에서 궁지에 몰려 있다. 그가 트럼프를 만나려면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오바마는 취임하자마자 하메네이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며 화해 제스처를 취했지만 트럼프는 반대로 ‘최고의 압박’ 작전 중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스타일에 의해, 그리고 경제제재를 피해야 하는 이란의 절박한 처지로 인해 분위기가 급반전되고 정상 간 만남이 성사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