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쿠바를 방문한다. ABC방송 등 미국 언론들이 17일(현지시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대통령의 쿠바 방문은 1928년 캘빈 쿨리지가 아바나에 간 이래 88년 만에 처음이다.
백악관은 이르면 18일 오바마의 쿠바 방문 계획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악관 관계자는 정확한 방문 시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쿠바와 53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한 오바마는 쿠바가 인권 상황을 개선한다는 전제 아래, 집권 마지막 해인 올해 아바나를 찾을 뜻을 밝혀왔다.
1928년 1월 19일 쿠바 아바나를 방문한 캘빈 쿨리지 미국 대통령(왼쪽 두번째)이 엘비라 마차도 쿠바 대통령(맨 오른쪽)과 함께 마차도의 사유지를 방문하고 있다. AP자료사진
미국과 쿠바, 굴곡진 역사
훗날 미국의 6대 대통령이 된 존 퀸시 애덤스는 1819~25년 국무장관 시절 쿠바를 “스페인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 표현했다. 애덤스는 미국이 반 세기 안에 쿠바를 병합해야 한다면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게 만든 중력의 법칙이 있듯 (미국이 쿠바를 병합해야 할) 정치의 법칙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쿠바를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이었다. 1898년 스페인이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자, 미국은 1902년 쿠바가 독립할 때까지 이 나라를 점령통치했다.
그러나 쿠바라는 사과는 쉽사리 미국의 품에 떨어지지 않았다. 1926년 당시 미국 기업들은 쿠바 사탕수수 산업의 60%를 장악하고 있었고, 쿠바 정부를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마차도 정권은 1933년 쿠바 반군들에 전복됐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정부는 전함 29척을 보내 쿠바를 침공했다. 이후 세워진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군사독재정권은 폭정을 거듭, 혁명의 불씨를 심었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군을 진압하도록 바티스타에게 무기를 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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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방해 속에서도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게바라가 이끄는 반군은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1959년 혁명정부를 세웠다. 혁명정부가 산업을 국유화하고 미국 기업들을 쫓아내자 미국은 쿠바산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석유공급을 끊었다. 쿠바는 소련에 손을 벌렸고,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냉전의 첨예한 대결장이 됐다.
몬카다 병영 습격 뒤 체포된 카스트로. /위키피디아
1961년 초 미국은 쿠바와 단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를 축출하기 위해 수 차례 비밀작전을 벌였다. 그 해 4월 CIA로부터 훈련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만을 침공했다. 1962년 미국 U2 정찰기는 쿠바에 건설되고 있던 소련 미사일기지를 촬영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측간 핵전쟁 위기로까지 가면서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다. 미 정보당국이 ‘몽구스 작전’ 혹은 통칭해 ‘쿠바 프로젝트’라 불렀던 카스트로 전복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경제제재를 가하고 에너지·식량공급을 끊어 고사시키려 애썼으나 쿠바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1970년대가 되자 미국이 카스트로를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77년 미 지미 카터 정부는 쿠바와 이익대표부를 교차 설치했다. 카스트로 정권은 건재했지만 미국의 봉쇄 속에 쿠바 경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1만명 넘는 쿠바인들이 페루의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떠날 사람은 모두 떠나도 좋다”고 선언했고, 그 해에만 12만5000명 정도의 쿠바인이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1980년 쿠바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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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집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임 카터 행정부와 달리 쿠바를 더욱 옥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은 1992년 10월의 쿠바민주주의법(토리셀리법), 1996년의 쿠바 자유와 민주주의 연대법(헬름스-버튼법) 등으로 쿠바에 전방위 제재를 가했다. 소련이 무너진 상황에서, 쿠바는 북한과 함께 지구상 가장 고립된 나라가 됐다.
오바마, 라울과 손 잡다
빌 클린턴 정부는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하면서도 1999년 양국 간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2000년 9월 유엔 밀레니엄정상회의에서 클린턴과 카스트로는 기념사진 촬영 때 만나 악수를 했다. 두 나라 정상 간 40여년 만의 악수였다. 그러나 뒤이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쿠바를 극도로 적대시했다. 2004년 재선 캠페인 때 부시는 쿠바를 “폭정의 전초기지”라 불렀고, 집권기간 내내 쿠바를 압박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집권 초부터 “쿠바와의 대화에 열려 있다”며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취임 첫해인 2009년 3월 오바마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 제한을 완화했다. 그 전 해에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공식 이양하면서 미국내 반 쿠바 감정도 조금 누그러져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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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행사에서 만난 오바마와 라울은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1년 후 두 나라는 관계 정상화를 발표했다. 지난해 8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에 다시 성조기를 게양했다. 미국 국무장관의 쿠바 방문도 70년 만이었다. 이어 9월에는 미국과 쿠바의 화해를 물밑에서 중재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바나를 찾았다. 지난 16일에는 정기 민간항공편 운항을 재개하기로 미국과 쿠바가 합의했다.
무너지거나 사라지거나 두 손 든 ‘미국의 적들’
21세기 초반만 해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이슬람 신정(神政) 국가인 이란,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등 여러 국가들이 미국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모두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거나, 전방위 압박에 손을 들었거나, 협상과 화해를 택했다.
아프간 탈레반은 1996년 전국을 장악한 뒤 미국의 수배를 받던 빈라덴을 숨겨줬다. 2000년 이후로는 미국과 물밑 협상을 하며 빈라덴을 내주고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모든 협상은 물 건너갔다. 미국은 그 해 10월 아프간 공습을 시작했고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다.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미 1991년 걸프전을 겪고 이후 계속된 미국의 금수조치와 유엔 무기사찰로 방어능력을 잃은 후세인 정권은 바그다드 공습과 동시에 도주했다. 고향 티크리트의 어느 가옥에 숨어 있던 후세인은 초라한 몰골로 생포됐고, 뒤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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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가 부서지는 걸 본 리비아의 카다피는 2003년 말 대량살상무기(WMD) 개발·보유를 전면 포기하고 국제사찰을 받아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다피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이 아닌 리비아 국민들이었다. 카다피는 2011년 봄 북아프리카를 휩쓴 민주화 물결에 밀려났고, 그 해 10월 사살됐다.
이란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개혁파 정권이 8년간 득세해 미국과의 적대관계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2005년 보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다시 악화일로를 걸었다. 최대 이슈는 이란 핵 의혹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이란에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급진전됐다. 두 달 뒤 이란은 서방과 전격적으로 핵 협상에 합의했다. 마침내 지난해 7월 핵 합의안이 최종 타결됐고 지난달 제재가 해제됐다. 사실상 미국에게 ‘적대국가’는 북한 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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