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자 미국 뉴욕타임스에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이런 글을 썼다. “오직 트럼프만이 트럼프에게 트럼프(승리)할 수 있다”고. 프리드먼의 말을 빌면 트럼프는 ‘걸어다니는 정치학 교과서’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의 머리가 아닌 내장(內臟)에 호소한다. “내장 단계(gut level)에서 한 지도자가 사람들과 연결됐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디테일을 가지고 성가시게 굴지 마. 나는 내 본능을 믿어’라고.” 그렇기 때문에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겠다고 나선 다른 후보들이 말하는 디테일들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선생도 비슷한 분석을 했다. 그는 트럼프를 ‘전두엽을 마비시키는 지도자’라고 불렀다. “충동적 행동을 조절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관장하는 전두엽을 비활성화시키는 정치”를 하면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내 편을 끌어모은다는 것이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아웃사이더 버니 샌더스도 트럼프처럼 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붐은 승리를 이끌어낼만큼 강하지 못했다. 전조가 비친 것은 역설적이지만 샌더스에게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준 첫 무대 아이오와에서였다. 아이오와의 민주당 당원 투표율은 높지 않았다. 공화당 투표자 수는 2012년 12만1000명에서 이번엔 18만명으로 50% 가까이 늘었다. 반면 민주당 코커스 투표자는 17만1000명 정도였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돌풍이 불었을 때에는 23만9000명이었다. 샌더스는 이 코커스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0.2%포인트 차이로 뒤져 거의 동률을 이뤘다. 샌더스는 트럼프만큼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샌더스의 돌풍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지만 의미를 넘어서 실질적인 승리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샌더스의 인기가 거품이었던 게 아니라, 샌더스의 인기를 ‘붐’으로 보는 것 자체가 거품이었는지도 모른다.
샌더스의 걸림돌은 힐러리 클린턴의 ‘방화벽’이라 불리는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들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학자 사카이 나오키의 <일본, 미국 영상>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것, 미국에서는 민족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이른바 국가 프로파간다가 제공해 온 설명이다. 그런데 일단 미국의 국내 정치에 눈을 돌리면, 민족성의 정치 없이 미국의 국내 정치를 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민족 개념은 종종 인종 개념으로 대치된다. 아시아계 주민이 미국(아메리카) 민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미국의 민족주의에 의한 것이다.”
미국엔 ‘민족’이 없으며 모든 민족의 용광로라고들 하지만 그 안에는 ‘인종이라는 민족’이 있다. 어느 민족국가의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강력할 지 모르는 인종주의. 미국 정치에서, 힐러리 대 샌더스의 구도가 만들어진 민주당 경선에서 인종은 어떤 함의를 지니는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종 혹은 피부색의 아이덴티티를 놓고 유권자들을 분석하면 분명 대선 후보 지지구도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내가 미국의 흑인이라면? 내가 제법 현실 정치에, 경제 구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논리정연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가졌을 정도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면 샌더스를 지지했을 지 모른다. 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한 개인으로서는 극히 ‘본능적으로’, 하나의 정체성(인종)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역사적으로’ 나는 샌더스에게 더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이 학살당하고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온 이래로 200년, 100년, 그리고 미국이 두 차례 세계대전 뒤 고도성장을 하던 50년 동안 저들 백인은 풍요를 누렸고 나(흑인·유색인종)는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성장은 끝났고 일자리는 줄었고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의료보험은 없고 살기는 너무나 팍팍해졌다. 빈부격차는 어느 때보다 커졌고 1%가 99%의 것을 가져갔다. 샌더스는 1%가 빼앗아간 것을 99%가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200년, 100년, 50년간 내 것을 빼앗아서 누리던 시절에는 조용했던 백인들이 이제는 불평등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미국이 세계의 슈퍼파워가 돼 세상 모든 부와 자원을 마음껏 끌어다 쓸 수 있었던 시절에 큰 혜택을 본 것은 월가나 보잉, 록히드마틴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노동자들도 그 수혜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이 남의 나라 일에 개입하지 말고, 레짐체인지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는? 거기서 파생된 시리아는? 미국은 세계의 짐이자 책임자였다. 이제 짐은 내려놓자는 샌더스의 말은 도덕적이면서 비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면서 무책임하다. ‘부도덕한 군사개입은 그만 두고’ 미국의 길을 걷자고 말한다. 미국 청년들이 외국 정권을 몰아내느라 목숨을 잃는 상황은 끝내자고 한다. 그동안 세계에서 착취하고 울궈낼 것은 다 울궈낸 이후에. 오바마가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군대를 빼내고 시리아를 방치한 것은 오바마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재정이 파탄나서다.
2001년 빌 클린턴은 뉴욕의 할렘에 클린턴 재단 사무실을 만들었다. 흑인 문화의 본산이라 불리는 역사적인 ‘아폴로 극장’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에 그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민권운동 지도자들과 주민 2000명이 몰려들어 환영했다. 할렘을 택한 전직 대통령에게 보내는 따뜻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쇠락한 할렘이 이런 일로라도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는 소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 후 10년 가까이 클린턴은 그곳에서 지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7일 샌더스의 선거전략이 ‘하얀 주들’에 집중돼 있다고 썼다. 선거만 놓고 보자면 승산 없는 남부의 ‘검은 주들’이 아니라 백인 인구가 많은 ‘하얀 주들’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샌더스는 사람들의 전두엽에 호소했고, 자신의 전두엽으로 이런 선거전략을 짰다. '러스트벨트'라 불리는 쇠락한 산업지대, 미시간에서 샌더스가 힐러리를 눌렀다. 노동자들의 지지일 수도 있지만 '백인 노동자들의 지지'이기도 하다.
불평등과 가난 속에 살아가는 흑인들과 히스패닉이 왜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당장의 불평등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미국의 유색인종이라면, 200년의 불평등과 가난을 버텨낸 사람이라면, 나의 전두엽이 아닌 나의 위장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모든 차별과 불평등은 단선적이지 않다. 소득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인종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성별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 모든 차원들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되며, 그 역사가 육체의 모습을 띤 것이 아이덴티티, 정체성이다. 샌더스가 힐러리보다 흑인들을 '덜 사랑하고 덜 배려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샌더스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고, 약자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는 사람들의 아이덴티티에 축적된 불평등과 가난의 차원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서민과 중산층과 노동자들'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행보와 공약들을 가지고 얼추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겠지만 힐러리와 샌더스, 혹은 트럼프 중 어떤 사람이 소외된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더 좋은 대통령이 될 지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럴 때에 뇌가 아닌 위장이 답을 한다. 그 답이 틀렸다 한들 전두엽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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