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미국과 이란, 반세기 애증의 관계

딸기21 2015. 3. 3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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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 서방과 이란의 핵협상이 오늘 혹은 내일 결판나겠군요. 스위스 로잔에서 31일 결론을 낸다고 했으니. 잘 되면 대략적인 틀에서 합의가 이뤄질 것이고, 석달 뒤인 6월말까지 세부 이행계획을 협상하게 됩니다.

잘 안 되면... 협상은 결렬되고 미-이란 관계에는 다시 찬바람이 불 것이며, 미국과 이란 보수파들은 각기 버락 오바마와 하산 로하니 정권을 맹공격하겠지요. 

암튼 미-이란 관계가 일대 기로에 선 상황. 이 참에 두 나라 관계를 정리해 봅니다. 그 출발점은 아무래도 '모사데그 축출작전'이 되겠군요.



1948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안에 정책조정실(OPC)이라는 비밀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적대적 국가의 체제 전복, 적대적 정권에 맞선 저항그룹과 반공 세력 지원’, 다시 말해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하는 것이지요. 

이 기구를 이끈 프랭크 와이즈너가 저지른 공작 중 대표적인 것이 과테말라에서 농지개혁을 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과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축출한 일이었습니다. 저술가 겸 행정가·법률가로 명망을 날렸던 모사데그는 1951년 집권 뒤 영국계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와이즈너는 영국의 군 대외정보국(MI6)과 함께 공작을 벌여 모사데그 축출에 나섰고, 결국 모사데그는 쿠데타로 쫓겨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뒤 중동 각국 국내정치에 깊이 관여해 친미 독재정권들을 양산했던 미국 대외공작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오늘날까지 이란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후 반세기가 넘게 미국과 이란은 맹방에서 적국으로, 애증의 관계를 넘나들었습니다. 

모사데그를 몰아낸 쿠데타에 일조했던 레자 샤 국왕의 파흘라비(팔레비) 왕조는 미국을 등에 업고 전제정치를 자행했습니다. 백색테러와 억압통치가 이란인들을 짓눌렀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실한 동맹 노릇을 했습니다. 


혁명을 일으키는 요인을 전반적인 빈곤이나 억압이나 학대 같은 객관적인 조건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비록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각은 한쪽 면만을 본 것이다. 그런 조건들을 갖춘 나라들은 수없이 많으나 혁명은 드물게 일어난다. 혁명에 필요한 것은 빈곤에 대한 자각, 압제에 대한 자각, 빈곤과 압제가 세계의 자연적인 질서는 아니라는 믿음이다. 가장 중요한 촉매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생각과 말이다. 도화선이나 단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 통제되지 않은 말, 자유롭게 떠도는 말이다. 지하에서, 반역을 담아,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공인되지 않은 채 떠도는 말이 폭군을 두려움에 젖게 만든다.

카푸시친스키, SHAH OF SHAHS




미국과 이란의 끈적끈적한 관계는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으로 격변을 맞게 됩니다. 프랑스에 망명해 있다가 반(反) 왕조 민중혁명이 일어난 후 테헤란에 돌아온 호메이니는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시기에 양측 어느쪽과도 협력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신정(神政) 국가’를 세웠습니다. 

미국은 중동전략을 다시 짜야 했고, 이스라엘과의 밀착관계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그 해 11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대학생들이 점거하고 미국인 50여명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미국에 엄청난 충격을 안긴 ‘미 대사관 인질사건’은 1981년 444일만에 끝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무리한 인질 구출작전을 감행했다가 실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지미 카터 행정부는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었지요.


사진 속 오른쪽 두 번째 남자가 아마디네자드냐 아니냐를 놓고 미국 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요.


미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에 무기 금수조치 등 제재를 하면서 물밑에서는 중미 니카라과의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매개 삼아 이란에 무기를 팔았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어디로 갈까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적성국’이던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팔아 그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미국의 이중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레이건에게 정치적 위기를 가져왔던 '이란-콘트라 스캔들'이었지요.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스라엘을 중계자로 삼아 이란에 토우(TOW) 미사일을 넘겼습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오느라 히브리어가 쓰여져 있는 미사일을 건네받고 이란이 볼멘 소리를 냈다는 얘기(팀 와이너, <CIA- 잿더미의 유산>)도 있습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알려진 이 사건이 1985년 터져나와 레이건 행정부는 곤혹스런 처지가 됐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이란은 서로를 ‘사탄(악마)’라 부르며 적대시했습니다.


1988년 미국 군함이 이란 민간 여객기를 격추했습니다.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희생자들의 주검이 담긴 관들을 보며 이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이란에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였습니다. 유엔 총회에서 ‘문명의 대화’를 역설하며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을 정면 반박하기도 했던 하타미는 경제·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며 빌 클린턴 미 행정부와 거리를 좁혔습니다. 



그러나 이란 내 보수파들의 반발이 만만찮았고, 2005년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 출신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집권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해빙무드도 크게 후퇴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정권이 들어서 있었지요... 부시는 2002년 국정연설에서 이란을 이라크·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 망명한 일군의 이란인들이 이란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란은 더욱 강력한 경제제재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무기 개발 시설로 의심하고 사찰을 했던 이란 중부 나탄즈의 우라늄 농축시설.

참 말도 많고 거칠던 아마디네자드...

하지만 그도 2013년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에게 정권을 내줬습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더이상 고립을 감내할 수 없게 된 이란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동조 아래 서방과의 핵협상에 적극 나섰고요.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 역시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등 중동의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이란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죠.)



2013년 9월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찾은 로하니와 오바마의 ‘역사적인 통화’가 이뤄졌고 그 해 말 양측은 핵협상의 큰 틀에 잠정 합의했습니다. 



지난 연말 오바마는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테헤란에 미국 대사관이 다시 열릴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절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고 말해, 이란과의 관계 회복을 집권 기간 최대 치적으로 만들 뜻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오늘 밤이면 핵 협상 결과가 나오겠군요. 미국과 이란의 관계, 어디로 흘러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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