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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 치즈, 위스키, 항공기...미-유럽 무역전쟁

딸기21 2019. 10. 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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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치즈, 올리브기름에 비행기까지. 미국이 중국에 이어 이제는 유럽과도 ‘무역 전쟁’에 나섰다.

 

세계무역기구(WTO)는 2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이 유럽 항공기 제작회사인 에어버스에 보조금을 지급한 사실을 인정하고, 미국이 이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WTO 규정 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정했다. WTO는 미국이 연간 75억달러 규모의 유럽산 수입품에 관세를 매겨도 된다고 승인했다. 이 결정이 알려지기 무섭게 미 무역대표부(USTR)는 EU로부터 수입되는 물품에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미국 손 들어준 WTO

 

CNBC 등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이달 18일부터 프랑스·독일·스페인·영국에서 생산된 항공기에 10%의 관세를 매긴다. 농산품과 공산품에는 25%를 붙인다. USTR이 공개한 목록을 보면 말 그대로 ‘깨알 같다.’ 와인·위스키와 커피, 치즈·버터·요구르트 같은 유제품, 비스킷과 와플, 올리브 기름에 감귤과 대합조개까지 온갖 종류의 먹거리와 의류·기계들이 과세 대상이 됐다. 뉴욕타임스 등은 미국인들이 애호하는 유럽산 먹거리들에 세금이 붙으면 물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2일(현지시간) 공개한 유럽산 수입품 보복관세 품목.  자료 USTR

 

미국과 유럽의 관세 갈등은 미-중 갈등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 상징이 보잉과 에어버스의 WTO 소송이었다. 보잉사는 2004년 EU가 에어버스에 보조금을 주는 게 WTO 협정에 위배된다며 제소했다. 대형 항공기의 개발·판매에서 정부의 역할을 규정한 조약(LCA)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두 회사는 물론, 미국 정부와 EU 집행위원회가 나서서 기나긴 협상을 벌여왔으나 결국 타협점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특히 갈등이 격화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서다. 트럼프는 중국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도 미국에서 사가는 것보다 미국에 파는 것이 많다고 공격했고, WTO도 맹비난했다.

 

결국 WTO는 EU가 1968년부터 2006년까지 에어버스에 180억달러(약 22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한 사실을 인정했다. WTO는 기본적으로 관세 장벽을 세우는 것에 반대하지만, 회원국 정부가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교역상대국이 보복관세를 매기는 것을 허용한다.

 

에어버스는 성명을 내고 미국의 이번 조치가 미국의 항공기 부품 제조업체 등에 손해를 입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물품 액수가 500억달러에 이르러 프랑스, 독일, 영국보다도 많았는데, 미국이 보복관세를 매기면 수입액수가 40%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실제로 에어버스 A320 제트기를 생산하는 앨라배마주 모빌의 공장 등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이 공장에 의존하는 미국의 항공기 관련 업체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보잉 살리기 작전

 

1970년 설립된 에어버스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 등이 투자한 ‘유럽 공동의 기업’으로 상징성이 크다. 주요 공장은 프랑스 툴루즈 근교에 있지만 유럽 곳곳과 중국, 미국에도 생산시설을 두고 있고 본부는 네덜란드 라이덴에 있다.

 

프랑스 툴루즈 근교에 있는 에어버스 공장.  툴루즈 AP연합뉴스

 

에어버스는 애당초 유럽국들이 미국 보잉의 경쟁상대로 만든 회사다. 1916년 세워진 보잉과 비교하면 역사는 짧지만, 에어버스 설립 이후 50년 가까이 두 회사는 세계를 무대로 경쟁을 벌여왔다. 세계 민간 항공기 시장을 선점한데다 군사부문에서 미 국방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온 보잉에 비해 에어버스는 오랫동안 밀리는 처지였다. 그러나 보잉이 잇단 사고로 안전성 논란에 휘말리고 투자와 경영전략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에 격차를 줄였고, 2017년에는 민항기 인도 대수가 보잉 763대에 에어버스 713대로 비슷해졌다.

 

에어버스의 도전이 거세진 이래로 미국 정부는 노골적인 보잉 살리기 작전을 펼쳐왔다. 에어버스는 보잉도 미국 정부로부터 사실상 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어버스의 모기업인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이 수송기 등 군용 항공기 개발에서 EU 지원을 받듯이, 보잉도 연구·개발에서 미국 정부와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거나 세금 우대를 적용받는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혜택을 누려왔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보잉사 출신인 패트릭 섀너핸 당시 미 국방장관 대행이 보잉 F-15 전투기를 구매하도록 국방부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돼 감찰을 받기도 했다.

 

에어버스는 이란과 체결했던 대규모 여객기 공급계약이 미국의 핵 협정 파기로 차질을 빚게 된 데 이어, 미국의 보복관세를 또 다른 타격을 입게 됐다. 에어버스도 보잉을 WTO에 제소한 상태인데 판결은 내년 초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무역전쟁 ‘전선’ 또 벌린 트럼프

 

트럼프는 WTO의 결정이 나오자 “미국의 큰 승리”라고 주장하면서 “모두가 오랫동안 미국을 뜯어먹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EU는 오는 15일 다시 무역협상에 들어가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 백악관에서 사울리 니니스토 핀란드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유럽에 대한 보복관세를 허용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결정을 언급하며 “미국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워싱턴 UPI연합뉴스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대응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관세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지난해 중국뿐 아니라 EU의 철강과 알루미늄에도 고율의 관세를 매겼다. EU는 청바지와 오토바이 등 미국 소비재에 관세를 부과하며 맞섰다. 미 무역대표부는 WTO가 허용한 보복관세율이 100%임에도 이번에 에어버스에 10%만 매겼다고 강조했다. EU가 보조금을 줄이도록 협상의 문을 열어둔 채, 그동안 중국을 상대로 해왔듯 관세율을 높이며 단계적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에 WTO가 보잉 사건에서 EU에도 보복관세를 매길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대서양 무역전쟁은 격화될 게 뻔하다. EU는 보잉 판결에서 승소할 경우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200억달러 어치의 미국산 제품 목록을 만들어놓고 있다. AP통신 등은 미·중 무역마찰 속에 취해진 이번 조치로 이른바 ‘R(경기침체)의 공포’가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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