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80

라픽 샤미, '1001개의 거짓말'

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은이) | 유혜자 (옮긴이) | 문학동네 | 2002-04-08 오랜만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책을 읽었다. 라픽 사미의 소설이라면 예전에 '한줌의 별빛'을 읽은 적이 있다. 시리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소년 사이의 우정을 그린 것이었는데, 아주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1001개의 거짓말'은 소설이라면 소설이고, 우화라면 우화이고, 또 주인공 사딕의 주장대로,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어느 것이 거짓말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이 다단한 세상에서 선뜻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엇이든 진실의 일면과 거짓의 일면을 갖고 있는데. 순환논법에 회의론이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건 아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유려한 말솜씨로 사딕이 풀어내는 여러가지..

딸기네 책방 2002.06.21

마이 퍼니 베이비 - 엄마 되는 험한 길

마이 퍼니 베이비 김지윤/대원씨아이 "내가 아주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 내 선배 부인 얘긴데, 실화야. 쌍둥이를 낳고 두달만에 임신이 됐는데 또 쌍둥이였대. 무더운 여름인데 집에 에어컨이 없었던 거야. 두번째 쌍둥이가 태어나니까 남편의 눈길이 싸늘해지더래. 집안은 네 아이로 와글와글. 이 누나의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와병중. 그런데 하필 옆집이 공사중이라 여름에 창문도 못 열어놓고, 방 두개짜리 좁은 집에서..." 남편이랑, 아내랑 여름밤 에어컨 바람 시원하게 틀어놓고 마루에 드러누워 나누는 납량특집 엽기괴담의 내용입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쌍둥이 남자아기들을 키우는 종민이와 수진이,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어린' 부부에게는 임신, 출산, 더위가 그야말로 납량특집이지요. 간담..

딸기네 책방 2002.05.25

13억의 충돌 - 시장의 신화와 중국의 선택

13억의 충돌 - 시장의 신화와 중국의 선택 한더치앙 (지은이), 이재훈 (옮긴이) | 이후(시울) 13억의 충돌. 이른바 '신좌파'로 불리는 중국의 소장 경제학자 한더치앙은 중국의 시장경제 실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약 아닌 '충돌', 그것도 13억명의-. 지구상 인구 5분의1의 운명이 달린 이 실험에 대해 현지의 젊은 경제학자가 내쏟는 비판은 시장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 다소 구태의연하고, '유행에 뒤떨어진' 소리처럼 들리는 주장이다(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요즘 유행이 그렇다는 얘기다). 책꽂이에서 중국 경제에 대한 책을 찾다보니 본의 아니게 이 책을 주교재로, 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을 부교재로 삼아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다. 한더치앙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딸기네 책방 2002.05.25

리처드 르원틴, '3중 나선'

3중 나선 - 유전자, 생명체 그리고 환경 리처드 르원틴 (지은이), 김병수 (옮긴이) | 잉걸 리처드 르원틴의 '학자적 면모'를 드러내 주는 책이라고 알라딘 서평에는 써 있었는데. 과학과 철학의 문제, 생물학(방법론)의 도그마와 오류들을 조목조목 짚으면서 결국 유전자, 생명체 그리고 환경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과학은 은유다'라는 그의 지적만큼은 과학痴인 나에게는 큰 격려가 됐다.(저자의 목적은 그런 류의 위로사를 쓰는 것은 절대 아니었겠지만) 과학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너무 작은 미립자, 너무 큰 우주,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은유'들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실상 실체를 보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은 이런 은유를..

조너선 스펜스, '칸의 제국'

칸의 제국 조너선 D. 스펜스 (지은이), 김석희 (옮긴이) | 이산 . 서양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금세기 이전까지 여러 차례의 접촉(주로 정복과 관련있는)을 통해 형성된 중국의 모습은 바로 저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의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접근 방법은 늘 독특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일전에 제가 무지하게 칭찬했던 는 정통 역사책 글쓰기를 보여주는 반면 또다른 저술인 (게을러서 서평을 못 올렸습니다--;;)는 황제의 회고록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양쪽 모두 아주 훌륭합니다. 은 마르코 폴로에서부터 보르헤스까지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해 적어놓은 텍스트들을 꼼꼼이 분석해서 '서양인의 마음 속에 비친 중국'을 설명합니다. 마르코 폴로 이후 서유럽의 탐험가들과 예수회 선교사들, 중국을 방문한..

딸기네 책방 2002.04.25

[스크랩] 마르코폴로와 쿠빌라이칸의 대화

"네가 한사코 말하지 않는 도시가 아직 하나 있다" 마르코 폴로는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지금까지 폐하께 말씀드린게 베네치아 말고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자 폴로가 말했다. "저는 다른 도시를 설명할 때마다 항상 베네치아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송나라 때 지은 오래된 왕궁의 구릿빛 물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져 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반짝거렸다. "기억 속의 이미지란 것은 일단 말 속에 붙박이면 지워지는 법입니다." 폴로가 말했다. "베네치아에 대해 이야기하면 베네치아를 완전히 잃어..

딸기네 책방 2002.04.13

[스크랩] 곤충이 살충제를 이기는 방법

조너던 와이너의 에서 읽은 겁니다. "이 세계적인 저항운동을 연구하는 진화학자들은 네 부류의 적응이 일어난 것을 본다. 공격받는 곤충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로가 네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적인 저항운동'이란, 다름아니라 살충제에 맞선 곤충들의 저항을 얘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들을 위해, 어느 한 종류의 동물을 아예 절멸시키겠다는 생각을 서슴지 않고 하지요.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살충제'라는 핵폭탄(벌레들 입장에서는)을 만들어냅니다. 하긴, 같은 인간들을 겨냥해서도 핵폭탄을 터뜨리는 종이 우리들일진대, 그깟 나방이나 나비, 파리 따위야 안중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곤충들은 '적응'을 합니다. 토인비 식으로 보자면 인간의 도전에 대한 곤충의 '응전'인 셈입니다. 첫째, 곤충은 그냥 피할 수..

내 생애의 책 중 한 권, '핀치의 부리'

핀치의 부리 The Beak of The Finch 조너던 와이너 (지은이) | 이한음 (옮긴이) | 이끌리오 | 2002-01-15 핀치의 부리(The Beak of Finch). 네이처지에서 '그동안의 과학저술 중 최고'라고 격찬했다...고 책 뒤표지에 써있는데, 정말 네이처지에 그런 서평이 나왔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어떤 호평을 붙여도 이 책을 다 칭찬하기에는 미흡할 거예요. 실은 저는 말이죠, 이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읽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오늘 오전에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 때문에 정신이 막막할 정도였답니다(조금 허풍을 떨자면 ^^;;) 계속 도는 칼, 보이지 않는 해안, 보이지 않는 문자들..

[스크랩] 가아더의 '지평', 그리고 친구와의 대화.

주시기에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우커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겠다고. 늘 그렇지만, 친구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있는 때는 없다. 대신에 요슈타인 가아더의 글을 하나 선물로 보내줄께. 지평, 요슈타인 가아더 나는 공고문이라면 언제나 꼼꼼하게 읽는다. 국가정보국에서 보낸 통지문들이라면 특히 성심껏 연구하는 기분으로 읽는다. 결국 그것들은 나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닌가. 국가는 그의 아들들 중의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가 내키지는 않지만 그의 자식들과 그 어떤 심각하고 교육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라도 할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도 윗사람의 말을 거역하는 그런 유형은 아니다. 담배를 끊어야겠어. 보다 적게 마셔야겠어. 왜 세금을 ..

딸기네 책방 2002.04.01

스티븐 제이 굴드, '풀하우스'

풀하우스 | 원제 Full House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은이) | 사이언스북스 (음...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많은데, 글로 쓰려니 잘 옮기지를 못하겠군요.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 ) 1. 진화론 '뒤집어보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만물의 척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 만물을 만드셨으니 인간은 세상만물의 주인이다- 이런 '인간 제일주의'의 편견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내놨을 때 이미 인간이 제일이라는 생각은 깨져나갔어야 했는데 그놈의 다윈이 어정쩡하게(자기가 속해있고 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서양 제국주의 문명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탓에) 진화론 속에 '진보'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심어놓는 바람에, 창조론을 뒤집을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