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3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화려한 군주 다카시 후지타니 (지은이) | 한석정 (옮긴이) | 이산 | 2003-11-07 출판업계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출판사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출판사는 분명 있다. 내게는 '이산'이 그런 출판사다. 이산에서 나온 몇편의 책들은 모두 내게 풍요로운 독서의 기억을 선물해주었고, 이 책 '화려한 군주' 역시 그랬다. 이 책에는 '근대 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 다카시 후지타니는 "절대주의 국가의 화려한 의례와 상징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전제 아래(물론 이같은 전제는 에릭 홉스봄 등의 선배들에게서 나온 것이며 저자의 독창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 일본의 ..

딸기네 책방 2004.09.30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 서남동양학술총서 20 백영서, 전형준, 정문길, 최원식 엮음 / 문학과지성사 상상의 공동체? 내셔널리티의 문제는, 참 뭐라 단언하기 힘들다. 누구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고, 이건 오만가지 책들에서 인용되는 걸로 봐서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상상 나부랭이'로 치부해버리기엔 덩치가 너무 크다. 하지만 '민족이란 무엇이다'(그것을 '국민'으로 번역하든 '민족'으로 번역하든)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해도, 분명한 것은 있다.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국민, 민족, 부족, 종족, 인종, 종파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규정된다. 이름을 지은 사람이 타인이든 자신이든 간에, 이런 이름들이 따라붙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

딸기네 책방 2004.09.28

테러 시대의 철학

테러 시대의 철학 지오반나 보라도리. 김은주, 김준성, 손철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9.11과 나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딸기네 책방 2004.09.24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고모리 요이치 | 다카하시 데쓰야 (지은이) | 이규수 (옮긴이) | 삼인 | 2000-04-10 일본 지식인 18명의 '내셔널리즘 비판'을 묶은 것인데,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서경식의 에세이에서 극우파들의 주장이 투영되는 매스컴의 문제, 전쟁과 성폭력의 문제 등을 다소 잡다하게 엮어놨다. 일본 내에서의 역사논쟁을 상세히 알고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글도 있고 해서 전반적으로 재미는 없었다. '내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는, 서경식의 절규를 읽으면서 좀 울기는 했다. 1. 결국 역사란, 감출수 있는 것도, 감춰서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역사는 파헤치고, 읽어내고,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2. 모순은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가해진 가장 극단..

딸기네 책방 2004.09.22

[스크랩] 투르니에, '심장이 내는 소리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 한마디 던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이라고! 투르니에 할아버지, 당신 참 대단한 분이셔요. 블리니 종합병원에서 초음파 심장검진을 받다. 대수롭지 않은 검사이거니 했는데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같은 불쾌한 소음이 기계를 통해 들렸다. 내 심장이 내는 소리라고 했다. 검사 결과 분명한 심장비대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미셸 투르니에, 에서 이래서 투르니..

딸기네 책방 2004.09.15

게으름에 대한 찬양- 러셀, 그리고 게으름.

이런저런 게으름...의 늪에 빠져 살고 있는 날들. 베이비박스에 '게으른 엄마의 변명'을 적었더니 또치 왈, 다른 엄마들도 딸기님처럼만 게으르면 좋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 버트런드 러셀의 을 읽었다. 러셀이 핵폭탄에 반대한 것을 알고 있고, 혼자 조용히 반대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명운동에 가두시위까지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없다. 영국 사람이라는 것 정도일까나. 맑스의 사위이기도 한 폴 라파르그의 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었다. 가만있자,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1996년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라파르그의 책과 러셀의 책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는데,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노예가 아닌 그리스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사색을 예로 든 것도 그렇고, 여가를 강조한..

딸기네 책방 2004.09.11

반지제왕- 골룸을 만나던 날

반지제왕,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서 읽고 있다. 이미 10년전쯤에 처음 소설책을 구입한 이래 수차례 '완독'에 실패한 것은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내겐 이 책이 그닥 흡입력이 없었다. 솔직히 앞부분, 지겨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1편은 버섯마을같이 생긴 귀여운 호빗네 마을만 기억나고, 2편은 거의 기억이 안 난다. 3편은 제법 장관이어서 재밌게 봤다. 스펙터클에 압도되기도 했고. 하지만 (반지팬들께는 죄송하지만) 뭐 그렇게 감동적인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없는 영화'라는 점도 맘에 안 들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것 같지도 않고. 그 영화 만드는데 돈이 꽤 들어갔을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소설가의 '느낌'이 나에..

딸기네 책방 2004.07.31

후지따 쇼오조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은이) | 이홍락 (옮긴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은지는 오래됐다.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를 위한’ 독후감이다.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나에게, 아무 말 없이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반드시 독후감을 정리를 해야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리뷰를 쓰기가 참 힘들었다. 이 책, 몇마디 말로 정리해버릴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었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리뷰 3편, 별이 열다섯개. 거기에 지금 내가 별 다섯개를 더 붙이고 있다. 몇편 안 되는 리뷰이지만 이렇게 일관되게 ‘별 다섯개’를 받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우기 재미난 소설책도 아니고, 뭔가 대중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킬 요소 따위란 눈..

딸기네 책방 2004.06.17

요새 읽은, 그러나 정리가 잘 안 되는 책들

재미난 책들을 읽었는데 꼼꼼히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에 온 이래로, 나는 '글'이다 생각되는 것을 거의 적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어쩐지, 이 곳에서의 내 생활은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새 일본 드라마 'Long Vacation'에 푹 빠져 있다. 도쿄에서 보내는 나의 1년은, 아마도 내 인생에 드물게 찾아오는 'Long Vacation'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서른세살까지의 생활에 너무 푹 젖어있어서인지, 나는 도쿄에서의 생활을 아주 즐겁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 생활의 '비현실성'을 더더욱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차분히 뭔가를 정리하고, '예전처럼' 생각한다는 게 힘들기만 하다. 라이브러리를 멋대로 방치해둔 자의 변명 아닌 변명인 동시에, 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와 몇가지 기억들

진주 귀고리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은이) | 양선아 (옮긴이) | 강 | 2003-08-25 주변의 평에 비하면,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베르메르...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학교 때 마구잡이 발표 수업이 있었는데, 미술에 대해 아무거나(!) 주제를 잡아서 발표하면 되는 거였다. 그때 나는 베르메르에 대해 발표를 했었다. 내용은 개판이었으므로 여기서 까발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본 경험도 있다. 어릴 적 우리집 2층 마루는 엄마의 화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실이 따로 없었던 엄마가 그림 도구를 널려놓은 공간이었다. 엄마는 어릴적 나한테 이런저런 자세를 취해보라고 하셨었는데, 제일 많이 했던 것은 흑염소 옆에 가서 서있는 것과..

딸기네 책방 200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