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80

크리스 밀러, <칩워>

칩워 크리스 밀러. 노정태 옮김. 부키. 11/1 재미있었다. 전형적인 칩의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 영국에 본사를 둔 암ARM이라는 회사에서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이, 미국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반도체 설계도를 디자인한다. 설계도는 대만의 설비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서는 일본에서 온 극히 순수한 실리콘 웨이퍼와 특수한 가스를 사용한다. 원자 몇 개 정도의 두께로 새기고, 배치하고, 측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공작 기계가 반도체 설계도를 웨이퍼에 그려 넣는다. 이런 장비를 제작하는 선도적인 기업은 다섯 곳으로 하나는 네덜란드, 하나는 일본, 나머지 셋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칩은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치는데 테스트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

무스타파 술레이만, <더 커밍 웨이브>

더 커밍 웨이브 THE COMING WAVE 무스타파 술레이만, 마이클 바스카 정리. 이정미 옮김. 한스미디어 10/26 첫 번째 책 준비할 때부터 인공지능 자율주행 로봇 기술 등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어왔는데 ChatGPT 이후에 확실히 우려를 담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알파고로 유명한 딥마인드 공동창업자가 쓴 것인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줄 치고 스크랩할 부분이 많아진다. 아세모글루의 책이 디지털 디스토피아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더 디테일한 기술적인 측면과 구체적인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생산적이고 유능한 존재로 만드는 핵심을 소프트웨어, 즉 알고리즘으로 추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나는 2010년 여름 런던의 러셀 스퀘어R..

폴 토머스 체임벌린 <아시아 1945-1990>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 The Cold War's Killing Fields : Rethinking The Long Peace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 김남섭 옮김. 이데아. 10/23 좀 엉성하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4.3 부분 오류(옮긴이가 상세히 바로잡아놓음)를 보니 다른 지역 얘기도 살짝 신뢰가 떨어지긴 하지만. 이 냉전의 유혈 지역은 이 시기 전쟁의 중심축 역할을 했는데도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분명하게 규정된 공간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냉전사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냉전을 '장기 평화'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강대국 간의 전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가리키는 것이었다. 개디스에게 제3세계의 충돌들은 초강대국 간의 경쟁을 대리전..

딸기네 책방 2024.10.23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권력과 진보>

권력과 진보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10/8 서둘러 다 읽고 출장 갔다 왔더니 아세모글루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탔네? ㅎㅎ 그동안 출간된 책들을 재밌게 읽은 사람으로서 어쩐지 반갑다. "공유된 번영"의 사례들은 기술 진보 자체에 내재된 요인에 의해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던 결과가 아니었다. 공유된 번영은 기술 진보의 방향과 사회적으로 이득을 분배하는 방식이 협소한 지배층의 이익에만 복무했던 제도적 배열에서 멀어졌을 때, 오로지 그랬을 때만 생겨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상보다 생활 수준이 높은 이유는 우리 앞에 있었던 산업 사회 국면들에서 시민과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해 테크놀로지와 노동 여건에 대해 상류층이 좌지우지하던 선택에 도전했고 기술 향상..

딸기네 책방 2024.10.15

존 아이캔베리,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G. 존 아이캔베리, 홍지수 옮김.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10/4 재미있었다.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은 우드로 윌슨의 말이면서 아이캔 베리의 주장을 담은 제목이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위기는 얼마나 심각할까? 새로이 성장하고 새로운 주도 세력이 등장하면서 역전될 수 있는 위기일지도 모른다. 전후 국제 질서가 구축된 초기 몇 십 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그리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혹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의 패권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덜 미국적으로 변하면 덜 자유주의적으로 변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자체를 뒷받침하는 논리에 대한 의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

딸기네 책방 2024.10.04

마틴 울프,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마틴 울프. 고한석 옮김. 페이지2북스. 9/30 인간은 엄청나게 번성했지만, 나머지 영장류는 그러지 못했다. 지구상에는 침팬지 30만 마리, 서부고릴라 20만 마리, 오랑우탄 7만 마리 미만의 영장류가 살고 있을 뿐이다. 인간, 그리고 인간이 기르는 가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포유류의 96%를 차지한다. -42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쿠데타를 시도 한 이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공화당이 증거도 없이 대선 결과를 불법이라고 비난하며 트럼프를 지지하기로 한 이후, 민주주의의 침체'는 더 이상 적절한 표현이 아니게 됐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대공황 전야'라는 표현이 2021년 미국과 전 세계 민주주의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2016년에 미..

딸기네 책방 2024.09.30

에릭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에릭 울프. 박광식 옮김 뿌리와이파리. 5/4 홉스봄의 에 서평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마침 국내 번역본이 있길래 바로 주문을 했다. 책은 정말 좋다. 그러나 번역이... 번역이... '괴랄'하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거의 모든 문장이 목에 걸려서 읽기가 느무느무 힘들었다. 이 책에서 내놓는 주요 논증 하나는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사회들 대부분이 유럽 팽창의 결과물이지 앞선 진화 단계들의 순수한 응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양식 개념의 여러 효용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우리가 이 개념을 이용해 체제 내 관계들은 물론 체제 간 관계들까지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사용해 한 생산양식, 곧 자본주의가 지금의 우위에 오르기까지 다른 생산양식들과 상호작용을 하..

딸기네 책방 2024.05.04

아이켄베리, <승리 이후>

승리 이후. G. 존 아이켄베리. 강승훈 옮김. 한울. 4/13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아이켄베리를 여러번 언급하셔서 사서 읽었다. 재미있었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의 주요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첫째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힘을 억제하는 국가의 능력과 메커니즘은 변화해왔다. 그 결과 주요한 전쟁 이후에 출현한 질서의 성격 역시 변화해왔다"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전략적 억제'를 실행하는 승전국의 능력은 과거 몇 세기를 걸쳐 진보해왔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에 관해 자의적이고 무차별적인 행사를 억제하고 승전국에 바람직한 영속적인 전후질서를 고정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제도전략에 의존하게 된 것은 1815년의 전후구축이 최초의 예였다. 둘째는, 정치적 관리 메커니즘으로 제도를 활용하려는 주도국의 인센티브..

딸기네 책방 2024.04.14

박건영, <국제관계사>

국제관계사 박건영. 사회평론아카데미. 4/7 정말 재밌었다. 몇 년 새 현대 세계사 책을 좀 읽었지만 사실상 유럽사였는데 이 책은 국내 학자의 책이라 아시아, 한국과의 연관성이나 맥락을 잘 설명해줘서 넘넘 좋았다.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도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고. 뒤에 가서 공개된 문헌 자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20세기 세계사 책으로 최고다!!!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안보와 동맹이라는 전략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면 전쟁의 책임 소재가 모호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독일과 관련하여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생존을 위해 할 수 없이 엮여 들어갔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관련 비밀문건이 공개되면서 독일의 책임을 부각하는 관점이 크게 대두하였다. 독일이 의도적으로 ..

딸기네 책방 2024.04.08

E H 카, < 20년의 위기>

E H 카, 김태현 편역. 녹문당. 3/16 E H 카가 전간기에 쓴 글과, 2차 대전 직후에 쓴 글을 함께 묶었다.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국제정치학을 현실주의로 견인해온 학자라고 하지만, 카가 말하는 것은 ‘두 날개가 모두 필요하다’ 쪽에 가깝다. 아주 재미있었다. 명료하고, 날카롭고. 전쟁은 여전히 군인들의 문제였고 국제정치는 외교관들의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와 같은 경향은 끝이 났다. 전쟁은 더 이상 직업군인들의 일만이 아니게 되었고 국제정치가 직업외교관들의 손에 의해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뚜렷한 물증 없이) 밀실외교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주로 영미의 대중은 국제정치를 대중화하려는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밀실외교가 성행했던 이유는..

딸기네 책방 2024.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