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새물결. 11/10
바우만의 책은 늘 좋다. 특히 이 책은, 내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쓰레기는 워낙 관심 많은 주제라 (내 첫 책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의 테마이기도 하고) 이 책은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비노의 책을 모티브 삼아 에세이를 쓰기로 해놓고 계속 게으름피우고 있는데, 바우만의 이 책을 펼치자마자 칼비노가 나온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당위들'이 부족한 적은 결코 없었다. 현대사는 '좋은 사회‘라는 모델을 다량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이었다. 다양한 이 들 ’당위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생산적 역할이 주어지는지가 ‘좋은 사회' 의 판별 기준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X세대의 생애 동안에 벌써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잉 여'라는 생각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실업 unemployment의 접두사 'un' -건강하지 못한 unhealthy 또는 '불쾌한unwell’ 에서의 uni 처럼 -은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반면 '잉여'라는 개념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 이상한 것, 잠깐 건강하지 않게 된 것이나 일시적인 하락 등의 의미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잉여'는 그러한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고 속삭이며 그러한 상태가 일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31
잉여' 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그리고 쓰레기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실업자' , '노동 예비군'의 목적지는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 쓰레기 더미이다.
-32
'인구 폭탄‘이 폭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대부분 현재 지구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곳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는 1제곱 마일당 55명이 거주하는 반면 스텝 지대와 러시아의 영구 동토 지대까지 포함하더라도 전 유럽에는 1제곱 마일당 평균 261명이 살고 있으며, 일본에는 1제곱 마일당 857명, 네덜란드에는 1,100명, 타이완에는 1,604명 홍콩에는 14,218명이 살고 있다. 최근 포브스 부편집장이 지적한 대로 중국과 인도의 전체 인구가 미국 본토로 이주하더라도 인구 밀도는 영국, 네덜란드 또는 벨기에의 인구 밀도를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를 '인구 과잉' 국가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몇몇 아태 지역 경제 강국들 Pacific Tigers'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이나 아프리카의 '인구 과잉'에 관한 경종은 끊이지 않고 있다.
-86
권력이 바로 이런 식으로 자기 근거가 되는 규율의 광맥을 캐내고 있다면(사실 그렇다) '공인된 두려움'을 생산하는 것이 이 힘의 효력을 높이는 열쇠가 된다. '공인된 두려움' 은 다른 모든 책략과 마찬가지로 매개자 없이는 소용이 없다. 공인된 두려움은 오직 고안될 수 있을 뿐이다.
현세의 권력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그에 맞서서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위협을 창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을 창조하는 일에 성공하면 할수록 보호에 대한 수요 또한 그만큼 더 늘어나고 강화된다.
-98-99
현대 사회에서 존재의 취약성과 불안전성 그리고 심각하고 벗어날 길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서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은 삶의 여정이 시장의 힘에 노출됨에 따라 한층 더 명백해진다.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 적 조건을 도입하고 감독하고 보장하는 일 외에 정치 권력이 충분한 양의 '공인된 공포'를 영구히 공급하는 데 더 간섭해야 할 일은 없다.
이러한 정당화는 현대적 형태의 정부가 '복지 국가' 로서 자기규정을 하고 있는 데서 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가 권력 에 대한 복종은 국가가 개인의 불행과 재난에 대비한 보험 증서를 보증하는 것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지금 정치 권력에 대한 그러한 공식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국가의 보호 기능은 고용이 불가능한 소수의 사람들과 병약자들만 포함할 정도로 차츰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소수 집단마저 사회 적 보호 문제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로 재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시장의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이 갈수록 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100-101
안전에 대한 폭발적인 우려는 사회 국가가 제공하던 집단 보험이 느리지만 꾸준히 감축되고 노동 시장에 대한 규제가 급속히 철폐됨에 따라 이미 축적되어 있었다. '안전 에 대한 위협' 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이주자들은 사 회적 지위의 갑작스러운 동요와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한 우려의 눈길을 돌리기 위한 편리한 대안적 초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우려가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근심과 분노를 발산할 비교적 안전한 출구가 되었다.
과거 사방에 만연한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흡수하던' 민담 속의 악마와 악령의 이미지들은 '위험과 리스크‘로 변형되었다.
이주자들(지구의 저 먼 곳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뒷마당'으로 내던져진 인간 쓰레기)과 우리가 겪은, 국내에서 발생한 공포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공포 사이에는 일종의 '친화력'이 있 다. 모든 자리와 지위가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더이상 믿음직하지 않을 때 이주자들을 보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된다. 이주자들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예감, 자신들도 장차 일회용 쓰레기로 버려지리라는 예감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 -이다.
-108-109
지구의 변경 지역의 인간 쓰레기인 난민들은 '의부인의 화 신'이며, 절대적 외부인이며, 제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곳 보통 사람들이 여행할 때 쓰는 지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에 있는 외부인이다. 한번 외부이 면 영원한 외부이다. 감시탑이 있는 든든한 울타리만이 난민들의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무한히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유일한 수단이다.
이미 ‘내부'에 있는 잉여 인간들은 또다른 이야기다. 쓰레기 처리장은 그들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지역 내부에 설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처리장은 모든 또는 대부분의 대도시에 등장한다. 도시의 게토 또는 오히려 와캉의 통찰에 따르면 ’하이퍼게토'가 그것들이다.
-148
국가는 우선 생산 과정에서 탈락(일시적일 것이라고 간주 된)한 개인들을 떠맡았던 집단 보험을 폐지함으로써 그에 응했다. 일단 재활용 전망이 희미하고 불확실해지기 시작하고 정규적인 재활용 설비가 탈락자와 애초에 편입조차 되지 않은 자들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부적당해 보이자 ‘좌우를 넘어선' 지원은 재빨리 사라졌다.
두번째로, 국가는 안전한 쓰레기 처리장을 새로 설계하고 건설함으로써 위의 요구에 부응했다. 사회 국가는 점진적이지만 무자비하고 지속적으로 ‘요새 국가'로 전환되었다.
-156
죽음은 현대인들의 시야에서 제거되었으며, '더이상 보이 지 않는다.‘ 죽음은 더이상 위엄을 갖춘 채로 정당한 존경을 받으면서 맞이되어야 할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 아니라 권총에 맞거나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는 것 같은 유감스러운 재앙 정도로 강등되었다.
일단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상 생활에서 후퇴하거나 사라지자 그것은 그것이 일깨워야 할 소중한 영혼의 침묵도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즉각 삶에 대한 공포로 대치되었다. 다시 이 삶에 대한 공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소유하려는 해갈되지 않는 갈증과 '진보'에 대한 숭배로 점철된 '삶에 대한 계산적 접근 방식’을 초래한다.
-181
'예언 시대의 종언'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인 간들이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선택의 필요가 없는 태평하고 마음 편한 상태와 자신의 행위가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로 귀결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낙원'이라고 불렀다.
필멸의 삶을 세계의 영원성과 연결하는 과제를 떠맡고, 격렬하게 흘러가버리는 인간적 성취들의 일시성에서 견고성과 지속성의 부스러기를 추출(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하는 것은 이제 인간들이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는 문화의 임무가 되었다.
-190
오늘날 모든 대기와 지체와 지연은 열등함의 낙인이 된다.
특권의 표지(아마 가장 강력한 계층화 요인들 중의 하나인)는 지름길에 대한 접근, 즉시 요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 사회적 위계에서의 상승 정도는 원하는 바(그것이 무엇이든)를 지체 없이 당장 얻을 수 있는 능력의 향상에 의해 측정된다.
-191
기다리는 것은 수치이며, 기다리는 것의 수치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기다림은 나태함과 낮은 지위의 증거로 지목되며, 거절의 징후이자 배제의 신호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자기가 진짜 필요한 존재가 못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의식 수준과 결코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직관 - 이 이제 표면으로 떠올라 수많은 파문 을 일으키게 된다. 왜 나는 내가 탐내는 것을 갖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가? 나의 소망은 응당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가?
그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만큼 존중받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필요하고 환영받는 존재인가? 아니면 냉대받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이미 퇴출당하는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사람들이 비밀리에 작성한 잉여 인간 목록에 다음으로 이름이 오를 사람이 나인가?
-199
사회 통합을 지탱하던 전통적 구조들이 빠르게 해체되는 상황에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들이 우리의 구명 조끼나 구명선이 될 수 있다. 팔Ray Pahl은 선택의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우정-'선택에 기반한 사회 관계의 원형'- 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정을 후기 현대 생활의 '사회적 호위' 라고 부른다.
-226
우리는 버려지는 것, 쓰레기장으로 갈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절실히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성이다.
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어 지구화의 힘들' 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겉보기에 무작위적이고 임의적이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이동하고 떠돌고 있다.
-234
불안감이 연기 속으로 전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불안감이 너무 많고 또 끊임없이 보충된다.
타고 남은 잔해는 또다른 차원인 생명 정치의 평면으로 떨어져내려, 허물어지는 인간적 결속과 해체되는 집단적 연대에서 스며나오는 유사한 공포와 뒤섞인다.
-235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 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
장기간에 대한 생각이 없는 곳, '우리는 다시 만날 것' 이라는 기대가 없는 곳에서는 운명을 공유한다는 느낌도, 형제애도, 대열에 합류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맞추어 행진하려는 충동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연대감이 싹트고 뿌리내릴 가망은 거의 없다.
세닛을 다시 인용하면 '순전히 일시적으로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를 두게 한다'- 즉 보다 밀접하게 관여하려는 것에 분개하고 지속적으로 헌신하려는 것을 경계하게 만든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머무를지 확신하지 못하며, 지금 우리와 한자리에서 교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확신하지 못한다.
-236
옛날의 빅브라더는 포함 - 사람들을 대열에 정렬시키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통합- 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 -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 - 이다.
옛날의 빅브라더와 새로운 빅브라더는 공항의 여권 심사대에 나란히 앉아 있다. 다만 새로운 빅브라더는 입국자들의 여행 서류를 꼼꼼히 검사하는 반면 옛날의 빅브라더는 출국자들의 여행 서류를 다소 형식적으로 검사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242
20세기 내내 우리 조상들은 빅브라더의 가공할 권력에 맞 서 싸우며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울타리와 감시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면서 선택의 시간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따라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들의 자손인 우리가 해답을 찾아야 할 중대한 문제는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 두 빅브라더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인가 하는 질문이다. 즉 포함/배제의 게임이 공통의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유일한 방식인지, 그리고 그러한 게임이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가 결과적으로 취하게 될 - 부여받을 -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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