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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체임벌린 <아시아 1945-1990>

딸기21 2024. 10. 2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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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
The Cold War's Killing Fields : Rethinking The Long Peace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 김남섭 옮김. 이데아. 10/23


좀 엉성하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4.3 부분 오류(옮긴이가 상세히 바로잡아놓음)를 보니 다른 지역 얘기도 살짝 신뢰가 떨어지긴 하지만.



이 냉전의 유혈 지역은 이 시기 전쟁의 중심축 역할을 했는데도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분명하게 규정된 공간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냉전사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냉전을 '장기 평화'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강대국 간의 전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가리키는 것이었다. 개디스에게 제3세계의 충돌들은 초강대국 간의 경쟁을 대리전의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는 냉전이 대체로 계속 차 가운 상태로 남아 있게 하는 데 일조하면서 국제 질서에 얼마간의 안정을 제공했다. 그러나 포스트식민주의 세계의 수많은 사람에게 1945년 이후의 시기는 야만적인 전쟁으로 얼룩졌다. 학살은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집중되었고, 식별 가능한 패턴을 따라갔다. 탈식민지화 과정이 지역 지배를 위한 초강대국 투쟁과 정면으로 충돌하자, 아시아의 남부 가장자리 전역에서 이 시대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장들이 생겨났다. 냉전의 이 유혈 지역에서 포스트식민주의 혁명가들이 새로운 세계를 주조하고자 몸부림치는 동안, 강대국 군대들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야만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6-7

라틴아메리카가 워싱턴의 제국 작업장이고 동유럽이 모스크바의 사회주의 실험실이었다면, 접전이 벌어지던 남부 아시아의 국경 지방은 초강대국들의 봉쇄 전략과 새로운 형태의 혁명 및 저항을 위한 활동 무대 역할을 했다. 양국은 상대방을 억제하는 투쟁에서 대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동맹자들을 찾아 지구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냉전 전략들
로 인해 이 충돌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두 초강대국은 개입했고, 이는 자주 그들의 장기적인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8

냉전 시대의 충돌은 비전투원들에게 특히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군은 도시 전체를 굶겨서 항복을 받아냈고,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 마을 사람들을 살육했다. 파키스탄 병사들은 방글라데시 지식인들을 학살했고,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를 집단노동수용소로 변모시켰다. 전쟁범죄와 민간인 잔학 행위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또 부수적으로 발생한 피해도 아니었다.
-24

그러나 제3세계 행위자들은 초강대국 게임에서 단순한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초강대국이 지지한 정치적 이념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싸웠다. 지역 세력은 꼭두각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초강대국 영향의 지구적 네트워크를 교묘히 조작하기를 갈망하는 자발적 참여자로서 냉전 투쟁에 가담했다.
-25-25

월터 리프먼은 봉쇄를 "전략적 괴물“로 흑평했다.
워싱턴이 봉쇄 전략을 설명하는 방식은 저명한 미국의 국제관계학자 니컬러스 존 스피크먼의 저술과 놀랍도록 닮았다. 사후 출간된 《평화의 지리 The Geography of the Peace》에서 스피크먼은 '주변 지역rimland'이라고 부른 지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중동을 거쳐 아시아 몬순 지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0세기 지정학의 또 다른 대가인 해퍼드 존 매킨더의 저술에 기반을 둔 일반적인 이론들은 유라시아 심장지대heartland를 세계 정치의 중심축으로 바라보았다.
-76

한국전쟁

이승만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남한에서 10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정치범이 처형되었다. 7월에 서방 기자들은 대전 외곽의 한 마을에서 7000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보도했다. … 죄수들은 구덩이 가장자리로 끌려간 뒤 시신이 바로 대기 중인 무덤 속으로 떨어지도록 머리에 총을 맞았다. 미국 관리들은 공개적으로는 학살 소식을 감추거나 책임을 공산군에게 떠넘겼다.
미군이 8월에 창원시 진해구 앞바다에 부패한 시신들이 떠다닌다고 보고했는데, 이 시신들은 사로 잡힌 공산주의 간첩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미 공군 대령은 "탄약이 부족했다"라고 회상했다. "간첩들을 바다로 끌고 나가 등 뒤로 손을 묶고 배 밖으로 밀어버렸다."
-198-199

중국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학살의 속도가 빨라졌다.평양을 떠나기 전에 한 미국 기자는 남한 장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포로 수백 명을 즉결 처형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목격했다. "한쪽으로 몇몇 북한군이 땅에 박힌 튼튼한 기둥에 헝겊 인형처럼 걸려 있었다. 처형된 이 사람들은 햇살을 받으며 매달려 있었다." 평양 동남쪽으로 약 80킬로미터쯤 떨어진 신천에서 대한민국 군대는 약 400명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창고로 몰아넣은 뒤 아들과 남편이 숨어 있는 장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며 심문했다. 음 식과 물을 주지 않았고, 물을 달라고 간청하자 인분을 던져 주었다. 며칠 후 건물에 석유를 뿌려서 불태워 버렸다.
-230

한국 개입은 무엇이 냉전의 지속적인 동력이 될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것은 주변적인 전략적 중요성밖에 없는 것 같은 지역이 주요한 지정학적 발화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204

베트남

호찌민이 한 미국 기자에게 말했듯이, 충돌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전쟁"이 될 터였다. "만일 호랑이가 계속 조용히 서 있다면, 코끼리가 강력한 상아로 호랑이를 깨부술 겁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냥 있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낮에는 정글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훌쩍 뛰어올라 가죽을 찢고 살 덩어리를 물어뜯을 겁니다. 그런 다음 어두운 정글 속으로 다시 훌쩍 되돌아갈 겁니다. 코끼리는 서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겁니다. 인도차이나의 전쟁은 바로 이렇게 될 겁니다." 호찌민은 프랑스 관리들에 대해서는 더 직접적이었다. "당신네는 우리를 10명 죽일 것이고, 우리는 당신네 한 명을 죽일 겁니다. 결국 기진맥진해지는 것은 당신네입니다." 베트남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냉전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257

1959년에 정권은 농촌 전역에 '농업도시 Agroville'를 조성하는 야심찬 정책을 시행했다. 3년 뒤 케네디 행정 부는 '전략촌 프로그램 strategic hamlet program’을 채택했다. 이 프로젝트는 약 1500만 명의 마을 사람들을 정부가 통제하는 정착촌으로 이주시키기로 계획했다. 버나드 폴 기자는 이 프로젝트를 "비공산주의 세계에서 시행된 가장 거대한 사회공학의 사례"라고 묘사했다.
이 공동체 개발 프로젝트는 농민들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농민들은 흔히 집을 버리고 정부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집을 건설하면서, 대대로 물려받은 땅, 더 나아가 쌀농사를 짓던 논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제로 응오딘지엠의 농업도시와 케네디의 전략촌 때문에 많은 농촌 주민이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298

중국과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양상을 베트남에서 식별할 수 있다면, 개발 도상 세계에서 미국의 냉전에 나타난 새로운 역동성도 마찬가지로 식별 가능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에서 근대화를 실행하는 과제에 미국의 사회과학적 지식을 쏟아 붓겠다는 결의였다. 케네디 행정부 내의 월트 휘트먼 로스토와 그의 동맹자들은 군사작전으로 뒷받침되는 근대화를 이용해 개발 도상 세계에서 혁명 세력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놓기를 희망했다.
-307

하노이도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1956년에 토지개혁 운동에 반대하는 폭력적 움직임이 군대를 동원해 진압해야 하는 광범위한 반란의 물결로 비화했다. 처참한 토지개혁 운동의 결과 수천 명이 사망했다. 8월에 호찌민은 운동의 실수를 공식적으 로 인정했으나, 이미 피해가 막심했다. 토지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던 하노이의 지배 집단(즉 쯔엉찐, 호찌민, 팜반동, 응우옌잡)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이제 이전의 이 "오류들"을 바로잡는 "교정"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하노이의 권력이 호찌민과 응우옌잡에서 당내의 새로운 인사들로 크게 이동하는 사태를 낳았다. 이 재편성의 주요 승리자는 교정 운동의 지도자인 레득토와 레주언이었다.
-299

인도네시아

베이징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자금을 댄 반면, 모스크바는 인도네시아 공군과 해군에 지원과 훈련을 제공했고, 워싱턴은 인도네시아 육군과 연계를 확대했다.
1963년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일방 행동'을 개시했다. 이는 토지 개혁 프로그램 시행을 강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농민들을 동원하기로 계획된 유사 마오쩌둥주의 운동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아주 크게 성과를 거두면서, 인도네시아 대지주들의 적대감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 대지주 중 많은 이들이 무슬림 종교 지도자와 귀족이었다.
1960년대 전반에 공산당이 힘을 얻자 당의 반대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의 두 경쟁 단체인 인도네시아 국민당과 '나들라툴 울라마'를 오른쪽으로 내몰았다.
-340

1965년 찌는 듯한 여름 내내 수카르노는 계속 워싱턴을 도발했다. 7월 말에 그는 가까운 미래에 핵폭탄을 제작하겠다는 의향을 드러냈다. 8월에 수카르노가 반제국주의 "베이징-평양-하노이-프놈펜-자카르타 축"을 선언하자 인도네시아가 중국 진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미국의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했다.
-345

살해당한 사람들의 수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낙하산 특공연대 사령관 사르워 에디는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300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사망자 수를 가장 체계적으로 세려고 시도한 자료에서는 100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학자들이 가장 흔히 인용하는 수치는 50만 명이다. 군대가 많은 학살을 세심히 조직했지만, 지역민들이 실제 살해의 대부분에 책임이 있었던 것 같다. 지역민들은 칼과 몽둥이 같은 단순한 무기를 사용했다. 나치 독일과 민주캄푸치아처럼 대량 학살을 부추긴 다른 국가와는 달리, 인도네시아는 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356

파키스탄-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독특한 지위를 누렸다. 냉전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파키스탄은 중국의 주요 경쟁국 중 하나인 인도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50년대부터 파키스탄은 워싱턴이 남아시아와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했을 때 중요한 행위자로 활동했다. 또 모스크바와 인도의 따뜻한 관계도 미국과 파키스탄 지도자들을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떠미는 힘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닉슨은 이슬라마바드에 대한 친밀감과 뉴델리에 대한 특별한 경멸감을 발전시켰다.
-404

영토만이 파키스탄을 두 개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었다.
매우 건조한 산악 풍경이 서파키스탄에 지배적이었던 반면, 동파키스탄은 초목이 무성하고 열대성 기후에다 평지였다. 동파키스탄은 벵골인들이 다수인 지역이었으나 서파키스탄은 펀자브인, 파슈툰족, 신드족 및 여러 소규모 인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르두어는 서파키스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였지만,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대부분 벵골어를 말했다.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국경 너머의 인도 서벵골 주에 사는 수백만 명의 벵골인들과 이 언어를 함께 썼다. 동파키스탄은 인구가 약 7500만 명이었고, 서파키스탄은 약 550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정치적•군사적 권력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은 서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이었다.
-405

닉슨이나 키신저와는 달리 아처 블러드와 다카의 직원들은 미국의 동맹국이 수천 명의 비무장 시민을 도륙하는 동안 말없이 지켜보려고만 하지는 않았다. 1971년 4월 6일, 블러드는 대외 정책 기관을 뒤흔든 전신을 워싱턴에 보냈다. 29명의 영사관 직원이 서명한 이른바 이
'블러드 전보'는 동파키스탄에서 벌어지는 잔혹 행위에 대해 워싱턴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420

1971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두 남아시아 국가의 극심한 경쟁에서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앞으로 두 나라는 각자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또 미군, 중국군, 파키스탄군의 새로운 연합이 탄생했다. 이 제휴 관계는 향후 10년에 걸쳐 진화하여 1980년대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성숙기를 맞이할 터였다. 권위주의적인 이슬람 정권, 세계에서 인 구가 가장 많은 공산주의 국가, 자유민주주의 초강대국이 이슬람 반란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불가능할 것 같은 동맹을 맺은 사실은 포스트식민주의 혁명의 정치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방글라데시에서 자행된 파키스탄 제노사이드는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퇴조함에 따라 포스트식민주의 세계에서 인종적• 종교적 폭력이 부활하는 현상을 미리 보여준 또 하나의 징후로 기능했다.
-467-468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수도에서 권력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사이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동부 삼림지대에서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보호를 받았다. 이 실체가 흐릿한 운동의 사령관은 살롯 사Saloth Sar라는 이름의 남자였는데, 세계는 그를 폴 포트라는 가명으로 알게 될 것이었다.
프랑스 수도에서 사는 좌익 캄보디아 학생 그룹인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어울렸으며, 곧 정치 활동을 학업보다 중시하게 되었다. 사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저술에 매혹되었고, 인습 타파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찬양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후 더욱 강렬해졌다. 청년 사에게 마르크스주의의 매력은 혁명을 약속한 데 있었다. 그가 파리에서 동료 학생 급진주의자인 이엥 사리를 만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476

지역 권력을 장악하려는 하노이의 시도를 막기 위해 포드 행정부는 크메르 루주와 화해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지지하고 싶어 했다. 1975년 말에 키신저 국무장관이 태국 외무장관에게 말했다. "우리의 전략은 베트남에 대한 장벽으로서 중국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카터의 국가안보 자문관인 브레진스키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나는 중국에 폴 포트를 지지하라고 권했다. 폴 포트는 혐오스러운 자였다. 우리는 그를 결코 지지할 수 없었으나 중국은 할 수 있었다."
-536

이란

이란 혁명은 20세기의 광경이라기보다는 15세기의 광경처럼 보였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참모 중 한 사람이 쓴 대로, "민중 혁명이 신정국가 수립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믿기 힘들 정도로 어리석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란 혁명은 철저하게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이란은 중동에서 워싱턴의
'쌍둥이 기둥' 중 하나로서 기능했다. 소련의 남부 변경 지대를 지키는 이란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방어벽이었다. 1953년부터 샤는 미국의 핵심 안보 파트너 역할을 했다. 이 관계는 테헤란에 최고급 무기 체계를 공급하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한 닉슨 행정부 아래에서 더욱 긴밀해졌다.
-612

아프가니스탄

7월 3일, 카터는 아프가니스탄 반란자들을 지지하는 CIA의 제한된 선전과 심리전 작전을 인가했다. 또 반란자들에게 제3국 정부들, 특히 파키스탄을 통해 비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것도 승인했다. 카터는 소련 침공 약 6개월 전에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전사들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대규모 비밀 작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669

이란에서 발생한 인질 위기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연결함으로써 카터는 백악관이 서남아시아가 지역적 위기의 한가운데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음을 시사했다.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는 외부 세력의 기도는 미국의 필수적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러한 공격은 군사력을 포함하여 필요한 수단이라면 무엇이 든 동원해서라도 격퇴될 것입니다." 대통령의 약속은 '카터 독트린'으 로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이 세계에 페르시아만과 그 주변 지역을 자신의 안보 방어선 내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천명하는 선언이었다.
-679

소련 침공이 있고 불과 며칠 뒤 1980년 1월 이집트 정부는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이집트 관리들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위해 훈련소를 설치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3주 후 약 1만 명이 "소련이여, 카불은 당신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라는 기치 아래, 국가가 관리하는 카이로의 알아즈하르 모스크에서 열린 반소련 시위에 참가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들이 군중에게 연설했고, 이슬람 학생들은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카이로에 요구했다.
아랍 세계의 무슬림 그룹들이 소련 개입에 반대해 조직되기 시작하는 동안, 파키스탄은 소련 점령에 맞 서 지구적인 지하드로 성장할 저항의 주요 발판을 제공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인 무함마드 지아울하크가 총지휘를 맡게 될 것이었다.
지아울하크는 1970년 9월에 '검은 9월'로도 알려진 요르단 내전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맞서 정부군을 이끌었을 때 두각을 나타냈다. 이 발령으로 그는 또 참패한 1971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부터도 떨어져 있게 되어, 패배의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은 몇 안 되는 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남을 수 있었다.
1977년 7월에 지아울하크는 인기를 점점 잃어가던 부토에 맞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를 체포하고 파키스탄을 군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권력을 잡자, 지아울하크는 이슬람을 국가와 군부에 도입하는 포괄적인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이슬람 정당인 자미아티이슬라미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군부 내에 이슬람을 제도화했다.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학교의 수는 1971년 약 900개소에서 1988년경에는 8000개소 이상으로 늘었다. 지아울하크는 또 정보기관인 삼군통합정보부 ISI의 직원도 1978년 약 2000명에서 1988년경에는 약 4만 명으로 늘렸 다. 그의 통치 말기에 삼군통합정보부는 파키스탄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침투한 거대하고 무서운 조직으로 성장했다.
-687-688

파키스탄은 재빠르게 이 지역에서 "미국 정책의 전략적 허브'로 변신했다. 지원이 엄청나게 쏟아지면서 지아울하크 정권을 받쳐주었으나, 불법 무기 암시장이 번성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의 수중에 들어간 무기들은 트럭으로 배달되었다. 그리고 트럭은 무기를 내려놓으면 다시 파키스탄으로 향할 아프가니스탄 헤로인을 실었다. 전쟁은 카라치를 마약 밀거래자와 삼군 통합정보부 요원, 아프가니스탄 반란자, 외국 정보원들이 득실거리는 도시로 변모시켰다.
민족주의 세력과 세속 세력은 삼군통합정보부와 깊은 연계를 맺고 물자를 더 잘 공급받는 이슬람 경쟁자들과 겨루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슬라마바드의 목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이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군통합정보부 관리들은 무자헤딘 세력의 분열을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 CIA-삼군통합정보부 프로그램은 아프가니스탄에 무기를 쏟아붓는 것 말고도 군벌주의와 이슬람화, 분열을 부추기고,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파키스탄의 영향력을 끌어올렸다.
-690-691

레바논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과 1976년 시리아와의 전쟁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노력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1970년대 말에 전례 없는 수준의 국제적 인정을 획득 했고, 레바논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했다. 게릴라들은 '리타니 작전‘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레바논 영토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남부에서 유엔 평화유지군, 그리고 베이루트의 그린 라인으로 시작되었고 반쯤 요새화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사이의 경계에 의해 보호를 받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레바논이 종파 거주지들로 나눠지면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은 서베이루트로부터 남레바논까지 걸쳐 있는 사실상의 극소 국가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 영토 내에서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은 이른바 '파하니 공화국Fakhani republic'을 건설했다. 정식 정부 구조를 갖춘 이 공화국은 관료 제도와 금융 기반 시설을 완비하고, 서베이루트의 파하니 구역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망명 국가였다. 그와 동시에 이 단체는 자신의 군사 부문을 재래식 군대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국제 전선에서 해외 군사사절단의 수도 늘렸다. 이들은 제3세 계 전역의 혁명 그룹에 자문관과 교관들을 보냈다. 특히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장교들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국민회의 게릴라, 이란 혁명가, 짐바브웨 해방 전사와 함께 활동했다."
-743-744

시리아의 개입은 국가의 재정을 상당히 고갈시켰다. 게다가 폭력과 불안정이 지속되면서 피난민들이 계속 시리아로 유입되었고, 이는 침체한 경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아사드는 레바논에서 노선을 완전히 바꿔, 보수적인 마론파와의 곤혹스러운 동맹을 그만두고 무슬림 및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의 관계를 미봉책으로나마 개선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완강한 독자 세력으로 남았고, 다마스쿠스의 의지를 따르지 않으려 했다. 개입으로 인한 긴장 때문에 시리아에서는 국내 분규도 더욱 격화했다. 레바논 개입이 초래한 경제적•정치적 분노에 기대어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은 아사드 정권에 더욱 맹렬하게 저항했다.
예상대로 1976년부터 시리아에서 내부 폭력이 격화했다.
-746

폭력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틀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은 이 새로운 세력들 을 통제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서남아시아는 새로운 혁명 전략과 초강대국 개입의 중심 무대로 등장했다. 백악관이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신속 전개 합동 특수임무부대'를 '중부사령부'로 통합한 반면, 크렘린은 소련 남부 전역(전쟁 지역)에서 군사력을 확대했다.
-760

헤즈볼라

에후드 바라크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레바논에 들어갔을 때 헤즈볼라는 없었다. 남부의 시아파는 향기 나는 쌀과 꽃으로 우리를 환영했다. 헤즈볼라를 만든 것은 그곳에 우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란과 마찬가지로 헤즈볼라는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영향을 모두 거부했다.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시아파 전사들이 레바논의 베카 계곡에 있는 바알베크 기지에서 이란 혁명수비대로부터 광범위한 훈련과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이 긴밀한 제휴 때문에 헤즈볼라는 이란의 대리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샀다.
-794-795

이란-이라크 전쟁

CIA 분석관들은 이 모든 것이 이라크에서 권력 구조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보고했다. "사담 후세인의 타도를 종교적 의무라고 굳게 믿는" 이란의 공격을 받고, 바그다드 정권은 "두려움 뿐 아니라 '가족 과 부족적 유대"에도 의존하게 되었다."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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