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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아이캔베리,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딸기21 2024. 10. 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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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G. 존 아이캔베리, 홍지수 옮김.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10/4


재미있었다.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은 우드로 윌슨의 말이면서 아이캔 베리의 주장을 담은 제목이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위기는 얼마나 심각할까? 새로이 성장하고 새로운 주도 세력이 등장하면서 역전될 수 있는 위기일지도 모른다. 전후 국제 질서가 구축된 초기 몇 십 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그리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혹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의 패권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덜 미국적으로 변하면 덜 자유주의적으로 변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자체를 뒷받침하는 논리에 대한 의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위기는 한층 더 한 시대의 획을 긋는, 계몽주의 원칙과 자유주의적인 근대성의 와해를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 될지도 모른다.
-33-34


그래서 저자는 시간 범위를 저~~ 멀리로 끌어올린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출범한 시기는 1989년도 아니고 1945년도 아니다. 200여 년에 걸친 이러한 여정 사이사이에는 위기가 끊이지 않았고 전쟁과 경제공황과 반동적인 운동으로 전복되고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늘 세계정치의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국제질서를 둘러싼 21세기 투쟁에서 핵심적 지위를 유지하려면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논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과거를 회복하고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35


책은 윌슨(굉장히 도덕주의적이었지만 제국주의나 인권문제 등에서는 별로 도덕적이지 않았던)와 루스벨트(굉장히 실용적이고 국제주의와 국가 내부의 사회적 목표를 결합시켰던)를 비교하면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여기서 ‘진화’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강점이자 본질이다. 결론은 정반합, 둘의 결합과 재구성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되살릴 해법이 될 것이고.

1차 대전 후 질서를 뒷받침한 핵심적 개념들은 새로울 게 없었다. 전후 질서의 핵심적인 개념들은 19세기 대부분 기간 논의되었고 19세기 국제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에 반영되었다. 전후 질서의 핵심에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주도로 조직화된 개방적 상거래, 국제법, 분쟁 해결 장치들이 특징인 국가공동체라는 구상이 있었다.
윌슨이 구상한 국제질서를 구체적으로 보면 근대성, 자유 민주주의, 제도, 진보적인 변화라는 일련의 가정을 토대로 한 개념 들이 종합된 진화하는 체제였다. 윌슨이 구상한 질서는 자유민주주의는 우월하며 근대 세계의 심오하고 진화하는 특징인 "문명"이 국제사회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당기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가정을 전제로 했다. 국제질서가 국가들을 사회화시키고 진화시킨다는 논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윌슨은 전후 보상, 주권, 제국 등의 문제를 유럽 지도자들에게 양보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들에 서는 양보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윌슨주의적 국제주의는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두고 한 세기 동안 갑론을박이 있었다. 어찌 보면 그저 윌슨이 일을 망쳤다. 미국 상원은 문구를 명확히 다듬은 결의안을 담은 조약을 통과시킬 의향이 있었고 미국 정치 주류는 고립주의 정서를 표방하지 않았지만, 윌슨은 타협을 거부했다. 더 깊이 파고들면, 윌슨의 자유주의적 국제주 의 구상은 지탱하기가 불가능했다. 서구 진영 자체가 안정적인 지정학적 토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윌슨의 구상은 훗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노력의 이정표가 되었다.
-168-169


윌슨의 한계는

윌슨이 보기에 세계가 계속 근대화의 길을 가도록 하는 데 중요 한 요소는 국제기구의 구속력 있는 조건이나 실행 장치가 아니라 그러한 장치들을 담은 규범과 기대였다.
-198

진보주의는 통일된 전통이나 운동이 아니라 산업화 사회와 근대 민주주의로의 지향성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 당시 진보주의자들은 평화운동과 국제법 운동 등을 비롯해 다양한 국제주의 운동에 이미 관여하고 있었다.
-198

전후 국제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제도와 정치공동체는 자유민 주주의를 뒷받침하도록 조직화되어야 한다. 이는 윌슨이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계"를 만들자고 호소한 유명한 발언의 뜻이다. 국제질서 는 자유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성격을 띠어야 개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를 확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생존 가능한 여건을 조성하자는 뜻이다.
-199


윌슨의 두 얼굴.

윌슨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구상은 숨막힐 정도로 야심만만한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계몽주의 원칙과 도덕적 맹목성이 뒤섞인 해괴한 구상이었다.
그는 당시에 만연했던 제국적 인종적 위계질서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국가들과 국민들의 자결권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는 붕괴한 유라시아 제국들의 유럽 지역에 속한 주민들만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보호령"으로 지정되었다.
제국적 인종적 위계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윌슨이 남북전쟁 후 미국에서 인종적 서열을 지지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예상 가능하다. 학자로서 그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시대에 흑인 시민들에게 동등한 민권과 참정권을 부여하는 노력을 비판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공직 사회의 인종분리정책을 관장했고, 한 전기 작가의 말마따나, "인종적 정의 문제에 소극적이고 냉담하고 사실상 무관심했다.”
윌슨의 평화구축 구상은 W.E. B. 듀보이스 등 인 권운동가들을 비롯해 진보주의 운동 진영의 명망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듀보이스는 1912년 대선에서 윌슨을 지지했지만, 윌슨의 첫 임기에 실망하고 1916년에는 윌슨을 지지하지 않았다. 듀보이스는 파리에서 윌슨의 접견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하우스 대령과 만났고 미국 대표단에게 아프리카의 미래와 인종 평등의 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에서 그는 유럽도 유럽의 정치도 인종이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점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파리에서 윌슨은 자신이 주장하는 자결원칙과 국가평등의 원칙을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윌슨은 유럽의 제국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의 평화 구상에는 제국을 제거하는 조치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208-209

전후 평화구축의 원칙으로 그가 제시한 자결주의와 국가평등 은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반제국주의였다. 그러나 파리에서 윌슨은 자신의 구상 실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논하게 되자 제국에 반대하 는 입장을 재빠르게 타협해버렸다.
제국주의적 제도들의 종식을 호소하기 위해 평화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단은 독일이 중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영토를 일본에게 이양하는 비밀 조약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서명한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중국은 베르사유조약에 조인하지 않았다.
미국이 전략적으로 억눌러야 한다고 한 대상은 생산적인 식민지 팽창으로서의 제국주의도, 백인이 유색인종 위에 군림하는 체제 로서의 제국주의도 아니고 세계를 여러 개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려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대결로서의 제국주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윌슨은 인권과 인종 평등에 대해 그리 대범한 구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국제연맹 조약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현실적인 이유로 그는 (일본이 제안한) 인종 평등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영국은 이를, 특히 호주에서, 위협으로 간주했다. 조약에 대한 영국의 지지 를 잃을까 겁이 난 윌슨은 이 인종 평등 결의안이 기각되도록 만전을 기하기 위해 만장일치 조항을 발동시켰다.
윌슨의 자유주의적 반식민주의의 한계는 비서구 진영에서 "윌슨의 순간"이 반짝했다 금방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210-211


윌슨의 실패에 대한 학자들의 백가쟁명.

케인스는 제약 없는 자본주의와 소련과 유럽에서 부상하던 국가주의 경제체제 사이의 절충점을 모색했다.
하이에크의 이론은 잠복했다가 1970년대에 선진 산업화 진영 전역에서 공감대가 이루어졌던 케인스 이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하이에크의 이론은 단순히 국가가 경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근대 국가가 동시에 발전했다는 사실은 19세기 시장체제로의 귀환은 불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이에크는 제약 없는 시장을 뒷받침하는 여건들을 구축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이론과 케인스의 이론은 둘 다 결국 보다 포괄적인 정치적 과제와 결부되었다.
칼 폴라니는 케인스보다 한술 더 떠 세계시장 체제의 붕괴에 대해 거대담론을 제시했다. (폴라니가 보기에) 양대 세계대 전 사이의 기간 동안 발생한 위기는 이처럼 시장이 국제체제 안에 삽 입되어 있는 복잡한 체제가 붕괴된 결과이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역사학자 E. H. 카는 《위기의 20년, 1919-1939》를 출간했다. 카
는 베르사유조약에 관여한 우드로 윌슨과 자유주의 평화구축자들이 힘의 현실보다 이상향적인 구상을 토대로 전후 질서를 구축하려다가 위기의 씨앗을 심었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파괴한 19세기 정치질서는 합리적인 보편적 원칙이나 윤리적 기준을 토대로 한 게 아니었다. 그 질서는 힘의 구조, "그 시대의 경제 발전과 관련된 국가들" 특유의 힘의 균형을 토대로 구축되었다.
-232-233


이제 루스벨트 시대.

윌슨 세대의 자유주의적 국제주 의자들은 E, H. 카가 묘사한, 이상향을 추구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국가들은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이익이 존재했고 국제연맹은 이러한 공동 의 이익을 배양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30년대와 제2차세계대전을 겪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인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진들은 이러한 구상의 대략적인 윤곽을 계속 수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1919년 자유주의자들이 한 경험과 전혀 달랐다.
국제관계라는 학제가 양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동안 서서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외교관들이 패착을 두고 이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가 떨어지면서 학자들이 외교정책 전문가 역할을 할 공간이 열렸다. 뉴욕에 있는 외교협회와 런던에 있는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채텀 하우스) 같은 기관들이 설립돼 정부에 전문지식과 조언을 제공했고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에도 연구기 관들이 창설되었다. 국제연맹도 국제주의적 사고의 본거지가 되었다.
-237


민주국가 내부의 사회적 목표와 국제주의의 이상을 통합시킨 것을 저자는 ‘루스벨트 혁명’이라고 부른다.

근대 민주국가 는 이제 다른 여러 사회의 안보와 안녕에 보다 취약한 동시에 이들과 보다 통합되어 있다고 간주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기 전날 제대로 작동하는 입헌 자유민주주의국가는 몇 개국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 민주국가는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이행하고 있었다. 국민은 점점 더 국가가 복지와 안보를 제공하기를 기대했다. 근대국가의 정당성-국가 지도자들의 운명이 선거에서 결정된다는 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용과 기회를 제공하는 역량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252

루스벨트는 1936년 미국이 "결핍과 빈곤과 경제적 혼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국내에 새로운 진보주의적 연합의 구축을 관장해야 했다. 민주당, 노동운동, 사회운동, 정치적 이익집단들 모두 미국의 자유주의를 재가동시키는 데 동원되었다.
1930년대에 영국에서도 노동단체, 사회단체, 진보주의 성향의 개혁가들로 구성된 비슷한 연합체가 만들어졌고 포괄적인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밀어붙였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서 정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경제와 사회에 대해 중앙집권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비버리지 보고서).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나라들도 사회개혁과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을 추진했다.
산업화 진영 전역에 걸쳐 자유민주주의국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국가운영 방식을 찾아야 했다. 근대 민주국가는 점점 산업자본주의의 불안정을 관리하는 역할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253-254

국제질서의 목표는 단순히 전쟁을 예방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근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여건을 개선하는 노력을 촉진해야 했다. 자유민주 진영의 전문가들은 서로 상대방의 정책들을 연구했다. 그들은 또한 소련과 권위주의 정권들이 국가가 통제하고 중앙정부가 기획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자 이를 예의주시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사고가 정치적 권리와 사회보장의 증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의회에서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기념비적인 발언을 했다. "폭정의 새로운 질서"가 패배하고, "세계는 인간이 반드시 누려야 할 네 가지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러한 개념들을 한층 더 발전시켜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의 초안을 작성했다.
-256


냉전 시기 사회적 목적과 점점 더 결합된 안보 개념.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안보'를 해석하는 방식이 점점 변했다. 미국에서는 대공황과 뉴딜로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세계대전의 폭력과 파괴력으로 "국가안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두 용어 모두 단순한 기술적 용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국민의 건강, 복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할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반영했다. 이러한 책임은 윌슨시대의 진보주의적 입법에서부터 1935년 사회보장법 그리고 1946년의 완전고용법 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법안과 조치들에 반영되었다.
-265

국가안보라는 용어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만들 어졌는데, 경제, 정치, 군사적 영역 전반에 걸쳐서 국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상시 동원체제와 활동을 뜻하는 새로운 구상을 표현한 용어다. “국가안보"를 위해 미국은 기관들을 조율하고, 재원을 마련하고, 계획을 세우고, 동맹을 구축하는 등 외부 환경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1947년 국가안보 법안은 이러한 새로운 구상을 구현한 법으로서, 냉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관과 부서들을 재편했다.
-266


전후 패권 질서의 구성 요소와 논리들.

첫째는 19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해 지속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개념인 경제적 개방성의 논리였다. 개방적 무역은 경제 성장과 상호의존성 증진에도 기여하면서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개방적인 시장을 지지하는 또 다른 집단은 정부 안팎의 전략 기획가와 안보 사상가들이었다. 경제학자들은 국무부의 의뢰로 외교위원회가 실시한 기획 연구에서 "대권역(grand area)"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이 문제를 탐색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번영하려면 "대권역"은 얼마나 넓어야 할까? 경제학자들은 전 세계를 아울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방기획자들과 전략가들도 미국의 전후 안보는 개방성과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접근에 달려있다며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이러한 논쟁에 참여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예일대학교 지정학 이론가 니컬러스 스파이크먼(Nicholas Spykman)이다.
-292

둘째, 제도적 협력의 논리도 있었다. 이제 미국은 상호의존적인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 사회. 정치 적 문제들을 관리하도록 도와줄 새로운 국제기구들을 창설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러한 기구들은 경제와 안보에서 국가들 사이의 상호의 존성이 증가하는 데 따른 대책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자유주의적 가 치를 확산시키는 게 목적이라기보다 기술 관료의 전문성과 실용성을 근대 세계가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는 데 활용할 기능적인 도구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294


그리고 정말 중요한~

셋째, 개방성과 사회적 경제적 안보를 양립시키려는 노력, 사회적 타협의 논리가 있었다. 1930년대 이후로 산업화 민주주의국가들 은 경제 안보와 사회적 안녕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확 대해왔다. 근대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점점 이러한 노력에 의해 규정되고 정당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뉴딜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하면서 동시에 개 방적인 세계경제 체제 구축을 뒷받침하기는 까다롭다. 이 두 목표가 서로 완전히 상호보완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정치적 타협 혹은 사회적 타협이 비롯되었다. 국민들이 보다 개방적인 세계경제 체제 하에서 살겠다고 합의하면, 정부는 고용보험, 직업재훈련, 은퇴 후 노후지원 등과 같이 근대복지국가가 쓰는 수단을 통해서 국민의 삶을 안정시키고 보호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전후 체제 설계자들은 경제적 개방성과 사회 보장을 동시에 촉진하는 국제질서에 대해 국내에서 지지를 구축하고 다른 국가들 내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할 방법을 모색했다. 전후 세계경제 관련 기구들은 산업화 민주주의국가들이 자국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라고 권장하도록 설계되었다.
-296-297


일본이 전후 미국의 패권 질서에 합류할 수 있게 된 데도 비슷한 종류의 타협이 있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민족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군부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영국대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 바람에 전쟁의 책임을 모면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집권 자민당의 당수를 맡은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정치적 좌익 사이에서 절충점을 모색했다. 리처드 새뮤얼스가 주장하듯이, "좌익은 동맹관계를 받아들이고 우익은 현법 제9조를 받아들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여건을 터득함으로써가 아니라 급속한 경제성장과 경제발전을 통해서 국제체제에서의 권위와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311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제국과 제국주의.

제국주의라는 오명은 2세기 내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현 시대까지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따라다녔다.
정치적 좌익이자 수정주의 역사관에서 비롯되는 비판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개념들과 과제들이 미국을 비롯해 서구 강대국들의 뿌리 깊은 제국주의적 특성을 바꾸는 데 기여한 바가 거의 없고, 19세기 제국과 20세기 초의 제국들은 단절되기보다는 지속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선의 비판은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 종종 우드로 윌슨을 꼽는다.
또 다른 한 부류의 비판은 현실주의 전통 내에서 비롯된다. 일부 현실주의자들은 자유주의는 그 핵심에 운동가적인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은 한 세기 동안 해외에서의 위험하고 오도된 모험주의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군사개입과 이상주의적 성전을 감행하는 한 편 냉철하게 국익을 계산하는 의무를 방기했다. 이들이 보기에 큰 비용을 치르고도 실패한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극치였다.
-322


이런 비판 중에서 공화주의에 바탕을 둔 전통을 현실주의자들과 연결짓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화주의적 전통에서 나온 개입에 대한 비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는 19세기 평화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데, 윌리엄 제임스, 마크 트웨인, 월터 리프먼, 윌리엄 풀브라이트와 같이 다양한 인물이 천명한 입장이다. 공화국 또는 오늘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 일컫는 대상은 군사력과 전쟁이 야기하는 비자유적 힘에 취약한 정치체이다. 군사력 을 동원하면 국가의 행정 권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고, 시민의 자유, 견제와 균형, 법치를 위협하는 효과를 낳는다. 전후시대에 미국이 국가안보를 중요시하는 나라로 부상하면서 공화주의적 자유는 위 험에 처했다. 전 세계적으로 지속적인 군사개입의 형태로 구현되는 비공식적 제국을 비롯해 제국의 추구는 같은 이유로 위험하다.
-323


아이켄베리의 주장은

첫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유럽제국의 등에 올라타 20세기에 진입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여러모로 서구 제국에 순응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개념과 과제들은 근대 세계의 면모를 만든 다른 강력한 힘인 민족주의, 자본주의, 패권, 제국에도 연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제국과 제국주의에서 분리시킨 힘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힘은 지정학적 힘인데… 국제질서의 관련된 개념 과 규범의 지형이 바뀌면서 제국주의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4대 자유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과 종전 후 자유민주 진영 내에서 일어난 지적 규범적 변화의 일부를 공식화하고 가시화했으며 …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은 공교롭고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함께 서구 제국주의시대를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셋째, 세계가 제국을 기반으로 한 질서에서 베스트팔렌 국가체제로 이동하면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중심도 이동했다. 이는 근대시대에 일어난 대대적인 변화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문제가 남았다. 자유주의적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수정주의적인가? 이는 본질적으로 제한 지향적인 현실주의자와 좌익 진영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심오한 차원에서,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인 듯하다.
-325


윌슨에 대한 부연 설명.

미국에서 월슨의 자유주의에도 문명과 인종의 위계질서 개념들이 녹아있었다. 윌슨의 인종차별주의와 그의 자유주의를 양립시킬 방법은 이 두 가지를 서로 분리해서 보는 방법이다. 그의 인종차별주의는 미국의 노예제도와 남북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윌슨의 자유주의는 남부 출신인 그가 인종에 대해 지닌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윌슨이 자결 원칙을 수용하기로 한 결정은 남북전쟁 후 남부 주들의 재건에 미국 연방정부가 너무 고압적으로 관여했다고 비판해온 그의 입장의 연장 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코로넥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윌슨은
'어떤 국민이든 자기들 나름대로 정치체를 결정하고 강대국과 마찬 가지로 약소국도 제약받지 않고, 협박받지 않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하는 세계상을 제시하면서 사실상 미국 남부의 주장을 미국의 주장으로 바꿔 세계무대에 올린 셈이었다.“
-342


하지만 문명, 문명세계라는 개념은 변화했고 국제질서도그 변화를 따랐다.

전후 국가, 국민, 주권, 문명이라는 개념들은 사람들 간에 사회적인 위계질서가 있다고 본 19세기 개념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주권평등의 개념이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음을 인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또한 "국민의 권리"라는 개념이 점점 부각된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즉, 모든 인간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해, 양도할 수 없는 본질적인 권리를 지닌다는 주장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대 비서구로 구분하는 대신 자유민주 진영과 비자유 진영으로 새롭게 구분하게 되었다. 근대성은 이러한 정치적 공간의 양쪽 진영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문명국가들로 구성된 서구체제와 낙후되고 문명화되지 않은 그 밖의 세계를 정당화한 낡은 개념은, 비유럽인들이 서서히 "문명국가들의 공동체"에 합류했기 때문에 붕괴된 게 아니다. 문명국들-독일, 일본, 러시아-이 비문명세계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349


국제 기구와 제도들은 한번 구축 되면 그 자체로 강화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미국이 가입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만 배웠던 국제연맹에 대해서 다르게 평가 하는 글들을 최근 많이 읽고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제국주의와 거리를 두게 만든 하나의 요인으로 저자는 국제연맹을 뽑는다.

셋째, 양대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기구들은 전문가와 운동가들이 제국에 맞서는 투쟁에 사용할 발언대와 역량을 조성해주었다.
수전 피더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국제연맹이 신생국가들을 안정화하고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위임체제를 운영하는 일을 하면서 공식적인 제국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공식적인 주권국가의 세계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피더슨은 구체적으로 국제연맹의 상설위임위원회를 살펴보고 있다. 이 위원회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이 전쟁에서 잃은 아프리카, 중동, 태평양 지역 영토들을 관리하기 위해 1921년에 설립된 체제다. 위임체제는 잔존 제국 세력들이 추구 하는 목표들을 직접 바꾸지는 못했다. 피더슨에 따르면, "새로운 점이 있다면 국제 외교, 홍보, 이 체제가 제시한 담론의 수위와 장치였다." 위임체제는 "국제화"의, 특정한 정치적 사안들과 기능들을 국가나 제국으로부터 국제 영역으로 이관하는 절차이자 수단이었다.  위임체제를 설계한 이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체제는 자결권을 옹호하고 베르사유 전후 처리 방식의 수정을 바라는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밀어붙일 수단이 되었다. 위임체제는 제국주의 통치의 어두운 면을 폭로할 방법을 모색한 국제주의자, 인도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의견을 개진할 발판이 되었다.
-360


인도의 사례.

인도는 국제연맹을 이용해 1947년 독립하기 전 권리를 확보하고 인정을 받았다. 영국은 베르사유 회의에서 존재감을 강화하고 표결에서 자국의 비중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다른 강대국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인도를 포함해 영국령들에게 별도로 대표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과 더불어 여전히 영국 식민지였지만 이 회의의 숙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고 "법적 평등"을 근거로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국제연맹 규약은 평화조약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인도는 31개 창립 회원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법적으로 자치국가가 아니면서도 국제연맹의 창설회원국 이 될 권리를 확보했다.
인도는 공식적인 주권국가가 아니었지만, 조약에 조인할 권한을 행사했고 1920년 이후로 거의 모든 국제회의에 참가했다. 인도는 국제연맹의 회원으로서 1921년 해군무장에 관한 워싱턴회의에 참석했 고, 워싱턴조약에 서명했으며, 국제노동기구, 상설국제사법재판소를 비롯해 국제연맹 관련 기구들에 가입이 허용되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조약을 비롯해 수많은 다자간 조약에도 조인했다.
1945년 인도는 유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초청받았고 신설된 유엔 기구의 창설회원이 되었다.
-361

유엔은 제국으로부터의 탈피를 보다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유엔은 보편적 회원 자격이라는 개념을 주권국가들로 구성된 세계에 명문화하고 신생국가들을 탈제국주의 베스트팔렌 질서에 통합시키고 인정하는 법적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유엔은 국제주의 개념들을 구현한 기구로 널리 인식되지만, 유엔이 이룬 최대 성과는 주권국가체제가 세계적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유엔은 이따금 표결을 통해, 또 총회 결의안을 통해서 탈식민지화 과정을 지원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1960년 식민지 국가와 국민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선언이다. 그러나 유엔이 한 가장 중요한 기 여는 대부분이 아주 취약한 처지였던 수많은 신생국가와 주권회복 국가들이 국제사회에 진입할 틀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362


자유주의를 제국주의와 연결시키는 비판은 받아들이지만, 이라크전쟁을 자유주의와 연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억울한지 설명을 많이 붙여놨다.

이라크전쟁의 이념적 기원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일까? 이라크 침공이라는 패착을 설계한 주요 인물은 어느 모로 보나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차관이었다. 이러한 관료들 가운데 그 어느 인물의 정치적 이념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 세 인물에게 이라크전쟁의 일차적인 목적은 미국의 국익에 중요한 지역에서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보존하고 확장하는 일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부시 행정부의 대이라크 정책은 분명히 현실주의였다. 저명한 현실주의 학자들은 전쟁에 반대하면서 미국의 자만과 대전략을 설득력 있게 비판했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에는 현실 주의적 관점에서 이라크전쟁을 찬성하는 주장도 있었다.
-372-373


그래서,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아이켄베리의 결론은

20세기에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서서히 그러다가 갑자기 베스트팔렌 국가체제의 토대 위에 그들이 추구하는 과제들을 이식시켰다. 이러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데 있어서 미국은 이 체제 내의 가장 막강한 국가로서 그리고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구현한 국가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세계적인 "대권역"이 필요 했는데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 구축된 제국들이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국은 다른 강대국처럼 행동했다.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국제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의 미치는 범위와 규모 때문에 결국 세계의 제국주의적 체제를 반대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세계 패권국 논리에서 이러한 변화와 연대했다.
공식적인 제국은 20세기 후반에 사라졌지만 미국의 개입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 시대 내내 거의 끊임없이 이루어진 군사적 개입에 연루되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은 개입주의를 정당화했지만, 개입주의를 제약하는 개념과 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은 제국을 추구하고픈 충동이 내재돼 있다든가 강제로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너무 나약해서 다른 의제들과 쉽게 타협해버린다는 점이다.
-376-377


냉전 시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추구한 질서는 경제적 개방-사회적 목표-안보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저자의 시각에서 나토를 키워드로 하는 안보 공동체는 단순한 군사적인 동맹을 넘어선다. 그런데 냉전이 끝남으로써 당초 서구 진영의 내부 질서로 구축됐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세계질서가 돼버렸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했다. 중국은 이 체제에 경제적으로는 걸쳐 있지만 체제 밖에서 성장해 온 이례적인 존재였다.

중국은 이 동맹체제 바깥에서 힘을 키웠고, 국가 규 모 자체만으로도 세계경제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운신의 폭이 생겼다. 따라서 중국은 탈냉전시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안쪽과 바깥 쪽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중국은 이 질서가 안정적으로 기능하는데 반드시 필요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세계경제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질서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들 정도로 이 질서의 바깥에-그리고 자유민주 진영의 바깥에-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405


그럼 판국에 미국은 스스로 골칫거리가 됐고.

냉전 동안 미국의 힘은 세계체제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국이 갑자기 일극체제의 주역 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의 힘은 예전만큼 제약을 받지도 않았고 기능적이지도 않았다. 미국의 패권적인 힘에 대해 새롭게 갑론을박이 일었다. 무엇이 미국의 힘을 제한할까? 미국이 개방적이고 규정을 토 대로 한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약속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미국의 이라크전쟁과 세계 대테러 전쟁은 이러한 우려를 악화시켰다.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의 힘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다시 극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기존의 규정과 제도로 이루어진 체제를 벗어나 힘을 행사할지 여부는 더 이상 관건이 아니었다. 그 질서 를 훼손하기 위해 얼마나 그 힘을 이용할지가 관건이었다.
-406


미국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온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흔들린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 불평등과 격차 등등 사회적 목표의 훼손을 꼽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자유주의적 질서가 직면한 위기는 사회적 목적과 내장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의 위기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서에 합류 하면 이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보다 나은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사이 자유주의적 질서가 세계에 확산되면서 이러한 안보 공동체 기능이 잠식되었다. 자유주의적 질서가 추구하는 사회적 목적인 민주국가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보호와 사회적 발전은 퇴색했다. 자유주의 질서는 안보 공동체라기보다 자본주의적 거래를 위한 규정과 제도들을 뒷받침하는 토대처럼 보였다.
-408


그럼에도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는 내구성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비자유주의적 국가인 중국조차도 이 질서의 대안이 될 만한 구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질서는 저절로 생기지 않고 자유주의적 질서는 자생적이지 않다. 그러나 시대에 맞게 변하고 개혁된 자유주 의적 국제질서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지지자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이게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내구성이 비롯되는 궁극적인 원천이다. 이 질서가 와해되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후 자유주의 질서의 토대에 과부하가 걸리고, 외연이 확장되고, 사회적 목적들이 훼손되었지만, 개방적이고 규정을 토대로 한 협력이라는 깊은 논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자유민주주의국가들은 과거에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늘 대처했던 방식 그대로 대처하게 된다. 즉,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를 재건하고 강화 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420-421


개입 문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두 부류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방어적인 부류와 공격적인 부류이다. 방어적 자유주의는 자결권의 규범과 국가가 자국 나름의 제도와 독트린을 유지할 권리를 근간으로 하는 자 유주의적 경향이다. 공격적 자유주의는 다른 사회들의 질서를 재정 비하는 조치를 포함하는 보다 최근에 등장한 보편화 의제다.
인권과 범국가적인 테러리즘 부문에서 직면하는 딜레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는 국가에 그 가치를 강요하는 문제라기보다 어떤 상황하에서 국제공동체가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좋다규…
ㅆㅂ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계속 편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미국 리버럴들의 모든 주장은 힘을 잃는다.

너무나 개방된 국제체제의 난제- 모두가 참여할 수 있지만, 생각이 비슷한 나라들로 구성된 예전 클럽 스타일의 체제에 비해서 책임성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

자유민주주의국가들로 구성된 클럽의 정당성이 공유하는 사회적 목적에 있다면, 개방적 체제의 정당 성은 베스트팔렌 주권 원칙에 내재된 보편주의에서 비롯된다. 개방적 체제의 단점은 실행에 있다. 어떤 나라든 마음대로 가입하고 탈퇴할 수 있는 체제라 면, 회원으로서 이득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원으로서의 가치와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질서가 지닌 클럽의 특성은 어느 정도나 재건되어야 하고 재건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국가 간의 보다 심층적이고 배타적인 협력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클럽 내에서 조건부 회원가입의 장치들과 규범과 원칙을 이행하는 장치들을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443


그리고 더욱 어려운 과제.

비자유주의적 강대국을 상대하는 일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손꼽힌다.
한 가지 선택지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서 수정주의적 색채를 덜어냄으로써 비자유주의적 국가들을 수용하는 방법이다. 이 전략을 실행하려면 단일한 세계 자유주의 질서라는 구상에서 한발 물러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에 친화적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자결권, 관용, 이념적 다원주의라는 "방어적" 자유주의의 원칙들을 토대로 공존을 강조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훨씬 보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보다 공격적으로 비자유주의적 국가들에게 맞서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은 베스트팔렌 국제주의를 기반으로 중국과 러시아와 협력할 기회를 모색하면서 무기통제, 환경, 세계 공유지와 같이 공통으로 직면한 기능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한편, 자유민주 진영의 협력을 공고히 하고 강화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혼합형 전략을 추구할 수도 있다. 관건은 생각이 비슷한 나라들 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일신하고 방어하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제도와 기능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일이다.
-445-446


결론적으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세계가 이상적인 사회를 향 해 행진한다는 거창한 구상보다는 자유민주주의국가들을 안전하게 만든다는 보다 실용적이고 개혁지향적인 접근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454

윌슨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기여한 바는 국제주의 사상의 다양한 지류들을 통합했다는, 다양한 장 치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로 만들었다는 점이라면, 루스벨트가 기여한 바는 윌슨이 통합한 거대한 구조물을 실용적으로 다듬고 시대에 적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나는 둘 다 옳고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방법은 다르지만 말이다.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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