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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맛의 달인', 입에는 '인스턴트'

집 근처 대형 수퍼마켓에 갈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나라에도 백화점 수퍼마켓에 가면 모양 좋은 '완제품 음식'들이 진열돼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 살 때에는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도쿄에 와서 보니 사정이 좀 다르다. 수퍼마켓 1층에서는 방금 지어진 밥이나 초밥, 생선회를 밥 위에 뿌려놓은 '치라시 즈시', 달걀프라이를 얹은 오므라이스와 국수볶음을 도시락 모양으로 예쁘게 담아 판다. 라면이나 밥 위에 얹어먹는 소스 종류는 말할 것도 없고, 냉동식품도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닭고기와 감자 혹은 치즈와 새우를 넣은 고로케, 연근과 완두콩에 어묵을 묶어넣은 튀김, 검붉은 소스까지 뿌려져있는 냉동 햄버거,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당고(꼬치) 모양의 각종 튀김들....

테러 시대의 철학

테러 시대의 철학 지오반나 보라도리. 김은주, 김준성, 손철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9.11과 나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딸기네 책방 2004.09.24

보스포러스

이스탄불같은 도시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세상 모든 곳이 나름대로 '특별함'을 갖고 있겠지만, 이스탄불이야말로 특별하다. 도시가 갖고 있는 역사로 보자면, 사실 역사가 수천년씩 된, 이스탄불보다 훨씬 오래된 도시들도 많다.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들도 많고, 아름다운 도시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에 대해 '특별하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스포러스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을 찾은 여행객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바로 보스포러스다. 지도를 첨부하면 좋겠지만 귀찮아서... 걍 내가 그렸다. 아주아주 무식하게 그린 것으로, 실제 이스탄불 주변의 모습은 저것과 굉장히 다르다는 점을 우선 말씀드리며... (그럼 대체 왜 그렸단 말인가요) 이스탄불..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고모리 요이치 | 다카하시 데쓰야 (지은이) | 이규수 (옮긴이) | 삼인 | 2000-04-10 일본 지식인 18명의 '내셔널리즘 비판'을 묶은 것인데,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서경식의 에세이에서 극우파들의 주장이 투영되는 매스컴의 문제, 전쟁과 성폭력의 문제 등을 다소 잡다하게 엮어놨다. 일본 내에서의 역사논쟁을 상세히 알고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글도 있고 해서 전반적으로 재미는 없었다. '내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는, 서경식의 절규를 읽으면서 좀 울기는 했다. 1. 결국 역사란, 감출수 있는 것도, 감춰서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역사는 파헤치고, 읽어내고,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2. 모순은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가해진 가장 극단..

딸기네 책방 2004.09.22

요즘 먹고 사는 것들

내가 무슨 '요리'를 하겠냐고. 아무튼 나도 먹고 살고는 있다. 그것도, 오로지 내 손으로 만들어먹고 살고 있다. 인스턴트 식품도 요새는 잔뜩 사다먹고 있으나 기본은 역시나 내가 스스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것. 아지님도, 꼼꼼이도 음식을 못하니 할 수 없지. 날마다 '오늘은 뭐해먹을까' 주부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많지 않은데다, 내가 다니는 수퍼에서 파는 물건들로 재료가 한정돼 있으니 선택의 폭이 넓을리 없다. 국은 미역국, 조개국, 북어국, 시금치된장국, 가끔씩 된장찌개, 오늘은 감자국, 뭐 이런식이다. 며칠전에는 오뎅(어묵국) 끓이는 어묵이 싸게 나왔었다. 썩둑 썬 대파, 양파 반토막, 다시마, 무, 멸치, 마늘 두 쪽, 어묵을 넣고 푹푹 고았더니 제법 진국같은 맛이 난다...

나의 여행 로망스

여행기도 아직 다 안 올린 주제에 ^^;; 또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다면 좀 뻔뻔해보일지도 모르지만. 꿈은 자유다. 생각하는 건 내 자유라고... 1년여 전에 생각했던 나의 여행목적지들은 룩소르-알렉산드리아-페트라-예루살렘-다마스커스-이스탄불-바그다드-테헤란-이스파한-칸다하르-타지마할-앙코르와트 이런 거였다. 그런데 룩소르는 가봤고, 알렉산드리아는 '반드시 실망해줘야 하는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칸다하르는 걍 영화로 보면 되겠고, 페트라와 이스탄불, 바그다드는 가봤으니. 일정을 바꿔야겠다. ★ 한시절 나의 로망이 깃들어있는 자금성 ★ 둔황과 윈깡의 석굴들 ★ 와나캣의 여행이 메마른 내 마음에 불을 당겼다- 고비사막 ★ 앙코르와트 ★ 죽기전에 봐야만 하는 타지마할 ★ 이스파한과 테헤란 ★ 향료냄새가 날 ..

이스탄불, 술탄의 궁전.

여행기가 갑자기 너무 쏟아지듯 올라오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미뤄둘까 했는데, 더 미뤄두면 나리나리처럼 '몇년전 여행기'가 될 것 같아 그냥 올려요. :) 톱카프 사라이. 이스탄불의 구시가지, 유적들이 몰려있는 술탄아흐멧 거리에서 바다(마르마르해)와 면한 곳에 거대한 궁전이 있다. 술레이만 대제 시절을 비롯해, 오스만의 술탄들이 오랜 세월 기거했던 궁전이다. 지금은 성벽 아래에 철길이 지나가고, 해안 안쪽으로 물러나있는 듯 보이지만 예전에는 부지가 굉장히 넓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넓기는 넓다 ^^;; 톱카프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심장'이었고, 지금도 그런 느낌들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건물들을 놓고 보면 블루모스크같은 종교상징물에 비해 그다지 위압적이지는 않지만 안에 있는 유물들은! 한마디..

[스크랩] 투르니에, '심장이 내는 소리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 한마디 던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이라고! 투르니에 할아버지, 당신 참 대단한 분이셔요. 블리니 종합병원에서 초음파 심장검진을 받다. 대수롭지 않은 검사이거니 했는데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같은 불쾌한 소음이 기계를 통해 들렸다. 내 심장이 내는 소리라고 했다. 검사 결과 분명한 심장비대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미셸 투르니에, 에서 이래서 투르니..

딸기네 책방 2004.09.15

게으름에 대한 찬양- 러셀, 그리고 게으름.

이런저런 게으름...의 늪에 빠져 살고 있는 날들. 베이비박스에 '게으른 엄마의 변명'을 적었더니 또치 왈, 다른 엄마들도 딸기님처럼만 게으르면 좋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 버트런드 러셀의 을 읽었다. 러셀이 핵폭탄에 반대한 것을 알고 있고, 혼자 조용히 반대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명운동에 가두시위까지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없다. 영국 사람이라는 것 정도일까나. 맑스의 사위이기도 한 폴 라파르그의 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었다. 가만있자,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1996년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라파르그의 책과 러셀의 책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는데,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노예가 아닌 그리스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사색을 예로 든 것도 그렇고, 여가를 강조한..

딸기네 책방 2004.09.11

일본에 다시 돌아와보니... 천재지변이 무서워...

일본에 다시 돌아와보니 가을이다. 아직 낮기온은 30도를 넘어가지만, 그래도 아침저녁 바람이 달라졌다. 가을이 온 것은 좋은데, 돌아오자마자 태풍이다. 도쿄를 직접 지나쳐간 것은 아니지만 어제밤엔 바람이 대단했다. 집이 집인지라, 베란다 큰 창문을 내리 두들기는 바람 때문에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요새 꼼양이 시차적응 못해서 늦잠을 자는 바람에 이불에 두 차례 실례를 했다. 그 덕에 어제는 요를 꺼내어 빨아 널었는데, 소나기가 두 번 훑고 지나가 밤에도 빨래를 거둬들이지를 못했다. 베란다에 요를 널어놓고 큰 빨래집게로 묶어놨는데도 불안해서 아지님이 몇번이고 내다봐야 했을 정도. 이곳의 바람은 정말 장난 아니다. 게다가 지진. 간사이(오사카 고베 교토 등등이 있는 서쪽 지역) 쪽에 몇번 연달아 리히터규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