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46

[구정은의 '현실지구'] 세계 경제는 러시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의 4층집. 빨간 발코니와 빨간 간판에 “인도 최대 경제 마하라슈트라” “웰컴 투 마하라슈트라”라는 글이 쓰여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에 맞춰 인도 마하라슈트라주가 매입한 건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집의 이름은 ‘러시아 하우스’였다. 러시아의 포럼 참석자들이 숙박을 하기도 하고, 참석자들을 불러모아 경제발전을 선전하고 투자를 받고 거래를 트는 데에 쓰던 공간이었다. 경제무역장관을 지내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막심 오레슈킨, 푸틴 측근 겐나디 팀첸코가 지분을 가진 화학회사 시부르 등이 이 건물을 사서 2018년부터 운영해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다보스에 대표단을 못 보내게 된 올해 이 ..

[구정은의 '현실지구']석유에서 햇빛으로, 걸프의 변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한 2022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보며 한 해를 보낸다. 전쟁 속에서 세계는 안녕했을까. 남의 나라 전쟁보다는 코로나 터널이 끝나가는 것에 한 숨 돌리며 안심한 이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비애에 시민들은 공감과 연대를 보냈으나 국가들 간에는 이 전쟁을 놓고 힘겨루기 혹은 편가르기가 벌어졌다. 그래도 에너지 대란이나 식량대란은 오지 않았다. 유럽은 난방비가 올라가 추운 겨울을 맞았다지만 화석연료로 돌아가는 대신에 ‘탈탄소, 탈러시아’로 더 빨리 더 굳세게 가려는 듯하다. 에너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국 정부의 핵심 관심사가 되고 지정학적 변수가 된다. 이를테면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밀착 같은 것..

[구정은의 '현실지구'] ‘우주에서 보이는 산호초’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계곡.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박트리아라는 고대 왕국이 있었던 이곳에는 간다라 불교미술의 찬란함을 보여주는 유적과 성소들이 있었다. 2001년 3월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된 탈레반 정권은 거대한 불상들을 파괴했다. 인류 전체의 비극이었다. 2003년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 유적지를 ‘위험에 놓인 유산’ 목록에 올렸다. 이라크의 사마라. 바그다드 북쪽 130km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지만 한때는 거대한 압바스 제국의 수도였다. 아름다운 사원과 ‘바벨탑’ 이미지의 원형이 된 거대한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탑)가 있는데 미군과 수니파 반군의 충돌 와중에 역시 파괴를 겪었다. 유네스코는 사마라도 2007년 ‘위험 유산’에 집어넣었다. 시리아의 팔미라. 고대 셈족의 사원터에 기원 전후..

[구정은의 '현실지구'] "그래도 중국" 베이징에 간 베트남 총비서와 독일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이 확정됐다. 예상됐던 일이지만 경제가 커진 것과 거꾸로 가는 중국의 과거회귀는 놀라울 정도다. 민주화의 전망이 사라져가는 중국을 국제사회가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두 나라 정상이 베이징의 문을 두드렸다. 한 사람은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 중 하나이면서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을 따라온 베트남의 실권자이고, 또 한 사람은 독일 총리다. 오랜 악연을 뒤로 하고 최고의 환대를 받은 베트남 정상의 모습과 독일 총리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유럽의 논란은 ‘시진핑의 중국’을 마주한 세계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지난달 30일 응우옌 푸쫑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베이징에 도착하자 중국은 21발의 예포로 환영했다. 양국 정상이 마스크 없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환영식에서 만나 악..

[구정은의 '현실지구'] USB로 애플 때린 유럽

유럽의회가 4일(현지시각)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충전 포트와 커넥터를 USB-C 타입으로 통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4년부터 애플 제품에만 쓰이던 독자적인 충전장치는 유럽에서 팔지 못하게 됐다. 애플은 2년 안에 제품 디자인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랩톱은 2026년까지 충전 포트를 통일하면 된다고 유예기간을 좀 더 줬지만 결국 2024년 시한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른 형태의 충전장치가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전 모델을 다 폐기해버리면 환경적으로도 나쁘다. 그래서 다른 장치들의 ‘단계적 퇴출’을 유도하기로 했다. 어쨌든 디지털 기기마다 충전장치가 달라서 C타입, B타입, 애플 타입 전선줄을 줄줄이 늘어놓고 살아야 했던 소비자들에겐 반가운 소리다. 유럽에서 ‘강제 통일’이 시..

[구정은의 '현실지구'] 레바논은 왜 우크라이나 옥수수를 거부했을까

배 한 척이 터키 남쪽에 멈춰섰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선적을 둔 ‘라조니’라는 화물선이다. 배에 실린 것은 옥수수, 힘겨운 국제협상 끝에 우크라이나에서 나온 곡물이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바다에 떠있다. 러시아의 봉쇄로 우크라이나에 묶여 있던 곡물들이 이달 들어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실은 배 두 척은 터키로 향했다. 아일랜드, 영국, 이탈리아, 중국으로 향한 선박도 있다. 8월 1일 첫 출항 이후 40만톤 가까운 곡물이 배에 실려나갔다. 우크라이나 항구들이 러시아군에 봉쇄당한지 다섯 달이 넘어가면서 식량 불안이 커졌다. 유엔은 이 봉쇄를 풀고 세계의 밥상 걱정을 덜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했다. 터키가 중재한 협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모르스크 등 3개 항구를 거점으로 곡물 수출을 ..

[구정은의 '현실지구'] 보스니아와 우크라이나, 학살과 사과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민족갈등이 터져나와 극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스레브레니차라는 곳에서 세르비아군이 주민들을 끌고 가 학살한 뒤 구덩이에 한데 묻었다. 희생자가 8000명이 넘었고, 모두 무슬림 보스니아 남성들이었다. 유엔이 파견한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들은 세르비아군을 막지 않았다. 27년이 흐른 뒤인 지난 11일, 보스니아를 방문한 카샤 올롱그렌 네덜란드 국방장관은 당시 학살을 방치한 자국 군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장관은 "끔찍한 대량학살의 책임은 세르비아 군대에 있지만 국제사회가 주민들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 것 또한 확실하다"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당시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발칸 ‘제노사이드(..

[구정은의 '현실지구'] 아프리카, 난민, 르완다.

르완다 남서부에 위치한 니융궤 열대우림. 서쪽으로는 키부 호수와 콩고민주공화국, 남쪽으로는 부룬디 국경과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 복판에서 가장 잘 보존된 열대우림 중 하나다. 2004년부터 이 일대 1000여㎢ 숲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침팬지와 원숭이 등 12종의 영장류를 비롯해 숱한 동물들이 살아가는 숲을 가로지르는 능선은 나일강과 콩고강 사이의 분수령을 형성한다. 키부 호수를 따라 북쪽으로 옮겨가면 비룽가, 멸종위기종인 고릴라들이 사는 곳이다. 아프리카 하면 흔히 떠올리는 밀림이 바로 이런 곳들이다. 유럽에도 ‘정글’이 있다. 영국과 마주보는 프랑스 도시 칼레. 영국으로 건너가려는 이주민, 난민들이 이곳에 모여든다. 칼레의 밀림이 형성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해협 아래 터널을 이용해, ..

[구정은의 '현실지구'] 피노체트 헌법과 칠레의 싸움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는 칠레 북부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의 항구 도시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1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스페인에 맞선 독립전쟁 당시에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칠레는 19세기 말 '태평양 전쟁'으로 이 지역을 장악했고, 1904년 '평화우호조약'을 통해 분쟁을 끝냈다. 은과 질산칼륨 광산을 주변에 둔 주요 수출항이기도 하지만 칠레 입장에선 독립과 영토 주권에 관련된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엔 후안차카가 있다.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Quechua) 말로 '슬픔의 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마치 고대의 석조사원처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 버려진 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은 고대의 성채..

[구정은의 '현실지구'] 미-중 패권다툼에 '땅뺏기'까지 벌어지는 솔로몬제도

처음 섬에 발을 들인 유럽인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찾아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파푸아뉴기니 부근에 있는 솔로몬제도. 9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남태평양의 이 나라는 어쩌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까. 156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닿은 스페인 선원 알바로 드 멘다냐는 대단한 보물이 있을 줄 알고 기독교 구약성서 속의 ‘부자 왕’ 이름을 따서 솔로몬 섬Islas Salomón이라 명명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섬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한 ‘식민지 역사’가 시작됐다. 3만년 전부터 라피타Lapita라 불리는 태평양 섬 원주민들이 살아온 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배들의 방문이 이어지더니 19세기 말에 영국 땅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과 영국 군대가 솔로몬제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