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콘 때문에 인도가 시끌벅적했다. 발단은 대만 반도체칩 제조회사 폭스콘이 인도의 베단타와 조인트벤처 사업을 하기로 했다가 “안 하겠다”며 지난 10일 뒤집어엎은 것이다. ‘아이폰 만드는 회사’로 유명한 대만의 폭스콘은 지난해 인도에 칩을 생산하는 합작 공장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업규모가 195억달러에 이르는 프로젝트였다.
물 건너간 이유는 베단타 측과 협상이 원활치 못해서였다고 한다. 로이터통신은 합작회사의 기술파트너로 유럽의 칩 제조업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확정하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견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폭스콘이 베단타의 재정상태를 못미더워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베단타는 원래 전자제품이나 정보기술(IT)과는 관련 없는 광업회사다. 인도의 고아, 카르나타카, 라자스탄, 오디샤 등에서 철광석, 금, 알루미늄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광산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빚이 많다는 소문이 돌더니 올들어 신용평가회사 무디스가 베단타 모기업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1년 새 순부채가 2배 이상 뛴 사실도 재무보고서를 통해 확인됐다.
[Business Today] Chip dreams: Persistence will be key for India
빚이 늘어가는 베단타와 관계를 끊더니, 폭스콘은 하루만인 11일 “최적의 파트너를 찾고 있다”면서 “인도가 강력한 반도체 제조 생태계를 만들어낼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인도 시장에 투자한다는 계획엔 변함이 없으며 다만 다른 파트너를 물색중이라는 얘기다. 새 협력상대를 찾아내 인도 정부가 지원하는 생산연계 인센티브(PLI)를 다시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폭스콘은 “인도 투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이 사달이 나면서 인도의 성장 가능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인도의 벵갈루루와 하이데라바드는 IT 산업으로 유명하고, IT 인재들을 키우는 유수의 대학들이 해마다 인력을 배출한다. 그 덕에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인도 출신 고급인력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런 저력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여전히 미국 기업들의 하청업체 혹은 ‘글로벌 콜센터’ 취급을 받는다. 저임금 노동력을 발판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아웃소싱을 담당해왔을 뿐 반도체 칩 생산 같은 제조업 기반을 만들지는 못했다.
[Eurasian Times] India’s Semiconductor Powerhouse Dream ‘Shattered’?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는 잠재력을 현실로 끌어올리겠다면서 지난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팹(생산시설) 생태계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100억달러의 인센티브를 쏟아부어 “2026년까지 인도의 반도체 시장을 630억달러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가장 덩치 큰 프로젝트를 내놨던 폭스콘이 베단타와 갈라서버렸다. 모디 총리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손잡고 만들 공장은 모디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구자라트 주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인도의 야심찬 ‘반도체 드림’에 외부에서는 고개를 갸웃한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3개 기업이 인도 정부에 공장 설립안을 내놨는데 하나는 베단타-포스콘 합작회사였고, 또 하나는 아랍에미리트의 넥스트오빗벤처스가 중심이 된 국제 콘소시엄이었다. 이 팀은 이스라엘 반도체 회사인 타워 세미컨덕터를 기술파트너로 삼아 30억달러 규모 칩 공장을 짓겠다 했는데 미국 인텔이 타워를 인수하면서 계획이 붕 떴다. 인텔은 독일에 칩 제조공장을 짓고 폴란드에 조립·테스트시설을 세운다는 계획을 지난달 발표했으니 인도로 다시 방향을 틀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또 하나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IGSS 벤처스였는데 역시 30억달러 규모의 공장 설립안을 낸다더니 어쩐 일인지 중단했다.
[The Tribune] India must recalibrate its chips strategy
인도 정부가 하나 기대하는 것은 미국 메모리반도체 회사 마이크론과 반도체 조립공장을 세우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일이다. 모디 총리는 이를 지난달 미국 방문의 최대 성과로 홍보했다. 그런데 마이크론이 최대 8억2500만 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용 대부분은 인도 측이 낸다. 이 또한 구자라트에 짓기로 했는데, 인도 정부와 구자라트 주 정부가 총 27억5000만달러를 투자한다니 말이다. 게다가 마이크론과 합의한 것은 생산공장이 아니라 조립, 포장, 테스트 시설이다.
인디안익스프레스 등은 폭스콘 공장이 무산된 12일 “한국의 SK하이닉스가 인도에 반도체 조립, 테스트 시설을 만드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삼성과 SK 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이 주도하고 있다. 인도의 글로벌 프로젝트에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인 삼성, TSMC, 인텔 같은 기업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인도 측은 마이크론을 내세워서 폭스콘이 던진 정치적 충격을 무마하려는 모양새이고 여기에 SK하이닉스도 등장한 것인데, SK하이닉스는 ‘사실무근’이라며 보도를 부인했다. 또 인도 대기업 타타그룹이 반도체 제조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 주도로 NEC와 히타치 등 19개 기업이 출자한 반도체 회사 르네사스가 관심을 보였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역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의 20%가 인도 출신이다. 하지만 지적재산권은 대부분 외국기업이 갖고 있다. 미국의 매출 상위 10대 반도체 회사들은 인도에 디자인 센터를 두고 있으나 생산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도는 단순한 반도체 생산기지를 넘어서 ‘지적 재산의 토착화’를 원한다. 그런데 구상이 휘청거리는 것은 이 원대한 기획 자체가 경제적 타당성에 근거하기보다는 지정학적 틈새를 겨냥해서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인도는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중국과 대만 관계도 전에 없이 험악해진 상황을 틈타 5년 안에 인도를 세계의 반도체 허브로 만들겠다고 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자국내 칩 제조에 약 28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중국 반도체 업계에는 계속 제재를 추가하고 있다. 모디 총리는 작년 5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핵심·유망기술 이니셔티브(iCET)를 발표했고 지난달 방미에서도 기술협력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인도의 핵 문제다.
[Hindustan Times] A road map to propel US-India chips push
냉전 시기 핵개발에 나선 인도는 그 때문에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90년대 말부터 관계가 풀리긴 했지만 미국은 국방과 우주기술의 수출을 규제하는 몇몇 조항들을 지금까지도 인도에 계속 적용하고 있다. 상업용 반도체의 핵심분야에서 협력을 해야 하는데, 인도는 핵확산방지조약(NPT) 가입을 거부해온 까닭에 국제사회의 기술협력 체제에서 아직까지 따돌림 당하는 처지다. ‘IT 강국인데 반도체는 못 만드는 나라’가 된 것도 첨단기술에서 소외돼온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인도가 늘 자랑하듯 ‘전략적 자율성’을 가진 비동맹 국가로서 생명공학과 우주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어느 정도는 스스로 성공을 거뒀으나 글로벌 생산체인에서 언제까지나 하류에 머물 수는 없다. 인도는 미-중 반도체 전쟁을 틈타 미국과 기술 교류를 늘리면서 규제를 풀어가고 싶어하지만, 중국과 사이가 나쁘기로서니 미국이 이 문제에서 인도에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다.
지정학적 계산에 따라 공장을 돌릴 수는 없다. 칩을 만들려면 공장이 있어야 하고,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며, 숙련된 인력이 많아야 한다. 생산한 칩을 소비할 자국내 시장도 필요한데 인도는 아직 역부족이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라는 벵갈루루가 성장하던 1980년대에 이미 펀자브주에서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1989년 의문의 화재로 시설이 불타버렸다. 미국의 '칩4 동맹'에 들어가 있는 한국, 일본, 대만과 비교하면 인도의 기술수준은 20년 정도 뒤쳐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The Indian Express] India and the US-China chips war
중국은 2019년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계획을 세우고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렸다. 인도는 이를 베낀 듯 '메이드 인 인디아' 프로젝트를 내놨다. 이제와 지정학적 기회를 노리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서 다시 지정학이 인도의 발목을 잡는다. 미국은 ‘반도체 동맹국’들을 압박해 중국과의 거래를 줄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가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면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의 상당수를 중국으로부터 사들여야 한다.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려니 대만이 필요해진 인도는 타이베이와 관계를 강화하려 애쓰고 있다. 인도와 대만의 교역액은 2001년 10억 달러를 약간 넘었던 것에서 2021년 70억 달러 이상으로 늘었다. 최근에는 대만 대표사무소가 뭄바이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동안 중국을 의식해 대만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인도였다. 대만은 최대 반도체 회사인 TSMC가 인도에 거점을 만들 수 있도록 하려고 애썼고 자유무역협정과 양자투자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인도가 여러 정치적, 산업적인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딜레마에 빠진 인도를 중국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의 노동력이 칩과 전자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라면서 “인도가 야심찬 계획을 세운 것은 미국의 설득 때문이었겠지만, 지정학 중심의 발전경로는 막다른 골목일 뿐”이라고 적었다. “미국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제조업 기반을 닦아라, 그러기 위해 중국을 포함한 파트너들과의 협력부터 시작하라”고 충고하면서 코끼리가 나룻배에 칩을 싣고 힘겹게 노저어 가는 삽화를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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