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덴투폴리스는 브라질 남부 파라나 주에 있는 도시다. 면적 2308km², 서울 4배 크기의 땅에 5만2000명이 산다. 오스네이 스타들러 시장의 소셜미디어에 들어가보니 숲속에 흩어진 집들을 잇는 도로를 까는 모습, 수도관을 설치하는 사진들과 함께 색색으로 꾸며진 부활절 달걀이 올라와 있다. 동방기독교라고도 불리는 ‘정교’의 부활절이 지난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장식된, ‘파이산키’라 부르는 우크라이나식 부활절 달걀이 눈길을 끈다.
주민 75%가 우크라이나계인 이 도시의 가게 간판들에는 포르투갈어와 함께 우크라이나어가 적혀 있다. 브라질 우크라이나계 매체 ‘라디오 스보보다’에 따르면 2021년에는 시 의회가 만장일치로 우크라이나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지난해 이맘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유엔난민기구가 이달 15일 집계한 공식 통계를 보면 전쟁 1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떠나 외국으로 간 난민은 800만명이 넘고, 우크라이나 안에서 피란길에 오른 이들도 800만명에 이른다. 4100만 인구 중 1600만명이 집을 떠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체 어린이의 절반이 살던 집에서 떠났다는 통계도 있다.
18~60세 남성들은 정부의 출국금지령과 자발적 결정 등으로 대부분 남았기 때문에 국외로 떠난 난민의 90%는 여성과 아동들이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등 접경국으로 빠져나간 뒤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이동한 이들이 많다. 유엔난민기구 자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가장 많이 들어간 나라는 러시아(277만 명)다. 이어 폴란드(150만 명), 독일(100만 명), 체코(40만 명) 순이다.
Ukraine Refugee Situation - UNHCR data portal
유럽이 아닌 지역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캐나다는 70만명의 난민 신청을 받아 40만명 이상을 승인했다. 이스라엘, 이집트, 터키, 호주, 뉴질랜드로 간 이들도 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로도 우크라이나 난민 900여명이 이동해 갔고 그 중 50여명이 프루덴투폴리스에 둥지를 틀었다. 폭탄이 터지는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를 떠난 8살 소녀 아리나 하슐로바는 브라질 내륙 소도시의 학교에서 매일 체조를 연습하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남편을 남겨둔 채 두 아이만 데리고 떠나온 엄마 마리나는 밤에도 몇번씩 사이렌이 울리면 지하실로 뛰어들어가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곤 한다.
[NPR] Ukrainian refugees are finding home in a small city in southern Brazil
라리사 모스크비초바는 하르키우의 집 지하실에서 러시아군의 폭탄을 피해 일주일 동안 세 딸을 끌어안고 지냈다. 마침내 주어진 탈출의 시간, 30분 만에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챙겨 딸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교전이 끝나지 않은 이웃 도시 폴타바로 옮겨가서 피란민들을 국외로 탈출시켜주는 국제기구와 접촉했다. 처음 생각한 곳은 가까운 독일이나 폴란드였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머나먼 바다 건너 브라질에서 왔다. 라리사는 가족과 함께 프루덴투폴리스에 정착해 우크라이나식 쿠키와 파이를 만들어 팔며 살아가고 있다.
이 도시가 브라질의 ‘작은 우크라이나’가 된 데에는 연원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도로를 지으려고 당국이 노동자들을 이주시켰다. 1895년 경 우크라이나인 8000명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프루덴폴리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브라질 정부가 내륙을 개발하기 위해 외국에서 이민자들을 끌어모으던 때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인 갈리시아 지역에서 2만명의 빈농들이 ‘검은 흙이 있는 풍족한 땅’ 브라질로 이주했다. 브라질 정부는 뱃삯까지 대주면서 정착민을 모집했지만 이민자들이 도착한 곳은 문명과는 동떨어진 미개척지였다. 이민자들은 질병에 시달리며 낯선 기후 속에서 길을 닦고 농지를 개간했다. 세기가 바뀌자 브라질 정부는 상파울루에서 파라나를 거쳐가는 철도를 깔기 위해 다시 2만명 가까운 우크라이나인들을 데려왔다. 이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숫자에 9000명을 더했다.
우크라이나는 1917년 잠시 러시아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을 세웠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1922년 소련에 편입됐다. 소련에 저항했던 7000여명이 1950년대 초반까지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 이전의 이민자들과 비교해 교육 수준도 높았고 숙련기술자들도 많았지만 그들 상당수는 캐나다와 미국으로 재이주했다.
우크라이나계가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본국을 제외하면 러시아다. 러시아 330만명, 캐나다 140만명, 폴란드 120만명, 미국 100만명 순이다. 그 다음이 브라질이다. 60만명에 이르는 브라질의 우크라이나계 인구 가운데 35만명이 파라나 주에 산다. 프루덴폴리스뿐 아니라 쿠리치바나 우니앙다비투리아 같은 주변 도시들도 우크라이나계 인구 비중이 높다.
브라질 우크라이나인들의 70%는 지금도 ‘콜로니’라고 불리는 외딴 농촌 마을들에 거주한다. 빈농 출신 이주민들의 후손들인 까닭에 지금도 현대화된 브라질 대도시인들과는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덕에 고향의 종교와 언어와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가 침공을 당하자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대통령은 유럽국들보다도 앞서서 난민들에게 인도주의 비자를 내주겠다고 발표했다. 전쟁을 피해온 우크라이나인은 2년간 유효한 거주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작년 5월 첫 난민들이 프루덴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보우소나루는 직접 이 도시를 방문해 환영했다.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먼저 1997년 난민법을 제정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브라질에서 난민으로 등록돼 있거나 어떤 형태로든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은 60만명에 이른다. 그중 45만명이 베네수엘라인이다. 난민이나 망명자로 등록돼 있지는 않지만 베네수엘라에서 넘어와 살고 있는 사람 수는 더 많다.
[UNHCR] GLOBAL FOCUS- BRAZIL
최근 몇 년 간 베네수엘라에서 정치혼란이 가중되고 미국의 제재로 경제난이 심해지자 대규모 탈출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을 기꺼이 받은 남미 국가는 브라질 뿐이었다. 브라질은 난민 지위를 인정해주고 보호를 해줬으며, 당국의 지원을 포기하는 대신 ‘이주민’ 지위를 택한 사람들에게는 장기 거주허가를 내줬다. 일시적 보호가 아니라 메르코수르 거주협정(MRA)에 따라 브라질 국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주고 사실상 영구 체류자로 만드는 ‘정규화’ 정책을 폈다.
정부들은 난민과 노동이주자를 엄격히 구분하려 하지만 그런 이분법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난민과 이주자 사이에 선을 그은 뒤 한 줌의 난민들만 받아들이고 이주자들에겐 문을 잠그는 유럽과 브라질의 접근법은 크게 대비됐다. 이민자를 천대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따라쟁이로 유명했던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였지만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난민 정책을 펼쳤다는 칭찬을 받았다.
[EUI] Migrants or refugees? ‘Let’s do both’. Brazil’s response to Venezuelan displacement challenges legal definitions
가장 높이 평가받은 것은 2019년 국가난민위원회(CONARE)가 난민 심사 ‘인터뷰’를 없앤 것이었다. 범죄 기록이 없는 난민 신청자에게는 인터뷰를 요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하염없이 길어지던 심사 기간이 크게 줄었다. 서류를 갖추지 못한 난민들이 인터뷰를 피하기 위해 불법 입국하거나 그 과정에서 위험에 빠지는 일도 줄었다. 2020년에는 ‘환영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베네수엘라인 5만명을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을 환대한 것도 이런 난민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고, 나라를 떠난 우크라이나인들의 고통에도 시한이 없다. 피란이 아닌 강제이주를 의심케 하는 정황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9월 휴먼라이츠워치는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러시아로 끌려가고 있다”고 폭로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러시아 영토나 러시아군 점령 지역으로 강제 이송하는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우크라이나인이 9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서쪽으로의 이동이라고 편할 리 없다. 유럽연합(EU) 국가들 가운데 우크라이나 접경국들은 대부분 일단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불가리아, 체코, 리투아니아는 국경 문을 닫았다. EU는 난민들이 1년 동안 머물며 취업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임시 보호지침을 발동했으나 그 1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웨일즈의 우크라이나 난민센터들이 폐쇄됐다는 영국 BBC 보도에서 보이듯, 전쟁이 길어지면서 난민들을 대하는 서유럽의 분위기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BORGEN Magazine] Brazil’s Successful Refugee Policies: A Model for the World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에서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난민 이동을 불렀다. 이번 세기 들어와 시리아와 예멘의 대탈출을 비롯해 여러 번의 난민 엑소더스가 있었지만 한 나라에서 탈출한 사람의 비율로 보면 우크라이나가 가장 높다고 한다. 튀르키예의 해안에서 주검이 된 시리아 아이의 사진이 여전히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번엔 전쟁의 피해자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각국이 찾아낼 수 있을까. 프루덴투폴리스는 인구 구성이 워낙 예외적이라 치더라도, 브라질식 난민 제도가 해법의 실마리가 돼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이나마 난민 이슈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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