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세계 경제는 러시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딸기21 2023. 1. 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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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의 4층집. 빨간 발코니와 빨간 간판에 “인도 최대 경제 마하라슈트라” “웰컴 투 마하라슈트라”라는 글이 쓰여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에 맞춰 인도 마하라슈트라주가 매입한 건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집의 이름은 ‘러시아 하우스’였다. 러시아의 포럼 참석자들이 숙박을 하기도 하고, 참석자들을 불러모아 경제발전을 선전하고 투자를 받고 거래를 트는 데에 쓰던 공간이었다. 경제무역장관을 지내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막심 오레슈킨, 푸틴 측근 겐나디 팀첸코가 지분을 가진 화학회사 시부르 등이 이 건물을 사서 2018년부터 운영해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다보스에 대표단을 못 보내게 된 올해 이 집의 운명은 바뀌었다. 

 

https://twitter.com/ishaantharoor


마하라슈트라주가 사들인 이 건물에서 19일 조찬 모임이 열렸다. 우크라이나 갑부 빅토르 핀추크가 주최한 모임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나와서 미국 CNN방송 진행자 파리드 자카리아와 대담을 나눴다. 또다른 방에서는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미국 테크기업 팔란티르 측과 만나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도록 도와준 팔란티르의 데이터 소프트웨어에 찬사를 보냈다. “예년 다보스포럼에서는 기업인들이 러시아하우스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러시아의 과두기업가들과 거래를 했다. 하지만 올해 러시아하우스는 우크라이나 의원들이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서방에 무기를 요청하는 곳이 됐다.” 폴리티코가 전한 풍경이다.


러시아가 벌인 전쟁이 다음달이면 1년이 된다. 철 지난 제국주의 야심을 다시 불러내 이웃나라를 공격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푸틴의 러시아에 맞서 국제사회가 한 것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주거나 무기 살 돈을 주는 것, 그리고 러시아를 제재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원은 일관되거나 신속하지 못했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도 ‘아직까지는’ 큰 효과는 없었다. 


수치로 보면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의도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작년 국내총생산(GDP)이 8~10%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실제론 3~4% 위축에 그쳤다. 물론 전쟁 전 2~3% 성장이 예상됐던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인들의 손실은 크지만 말이다.

 

{"originWidth":929,"originHeight":523,"style":"alignCenter","caption":"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speaks during a news conference after a meeting of the State Council on youth policy in Moscow, Russia, December 22, 2022.  Sergey Guneev


국영기업과 주요 은행들은 국제결제시스템(SWIFT) 거래가 막히고 공급선이 끊기고 외국 계정이 차단될 것에 대비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며 미리 준비를 했다. 마이크로칩 금수조치에 정보기술 분야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봤지만 예상보다는 나았다. 러시아는 전쟁 전에도 오랫동안 제재를 받아왔고, 자급자족 시스템을 어느 정도는 만들었어놓은 상태였다. 국내 밀 생산에 투자해 자급률을 높이고, 서방 대신 중국과 개도국들을 통한 '수입 대체경로'를 찾아왔다. 로이터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서방 기업들이 발을 뺀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3분의1은 중국차가 차지했다. 스타벅스가 떠난 자리에 ‘스타스 커피’가 들어서는 식으로 브랜드가 바뀌었을뿐, 식료품점 선반에는 여전히 재고가 있으며 ‘삶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고립을 자초했지만, 전쟁으로 에너지값을 올린 덕이 컸다. 러시아가 석유와 가스를 팔아 번 돈은 작년 1~11월 1642억 달러,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늘었다. 그러나 에너지를 뺀 수출은 20% 줄었다. 러시아 정부는 ‘푸틴의 돈지갑’인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으로부터 받는 채굴세를 올려 곳간을 채웠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진다면? 그래도 러시아가 버틸 수 있을까. 세계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모스크바타임스] The Cost of War: Russia's Economy Faces a Decade of Regress

 

가스값이 오른 덕분에, 가스프롬은 지난해 상반기에 그 전 2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2조5000억 루블의 기록적인 순이익을 냈고 국가가 그 절반을 가져갔다. 하지만 하반기 수익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가는 하락세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작년 3월 유럽에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40달러로 치솟았지만 연말에는 70달러로 반토막났다. 러시아의 기준유종인 우랄 유가는 배럴당 50달러 수준이다. 브렌트유와의 가격차이는 점점 커지고 있다.

 

주요7개국(G7)과 유럽연합, 호주는 지난해 12월부터 배럴당 60달러 이상은 안 주겠다며 ‘유가상한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우랄 유가는 그보다 싸다. 푸틴 대통령이 “예산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친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2주 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올해 석유와 가스로 버는 돈이 24% 줄어들고 예산적자는 당초 예상치인 GDP의 2%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People walk on a bridge in Krasnogorsk outside Moscow, Russia November 14, 2022. REUTERS/Evgenia Novozhenina

 

미국 윌슨센터 등의 분석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하락할 때마다 러시아 정부 수입은 1조 루블 줄어든다. 유럽은 러시아산 원유 뿐 아니라 석유제품 수입도 2월부터 중단할 예정이고, 러시아 정부는 산유량을 줄여야 하나 고민 중이다.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고 인플레 압력은 커졌다. 전쟁 직전 러시아의 금리는 20%였다. 중앙은행은 작년 내내 금리를 낮추다가 인플레 우려가 커지자 10월에 금리인하를 중단했다. 올해에도 루블화는 계속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전쟁 비용은 갈수록 불어난다. 지난해 러시아 정부의 총지출은 당초 계획보다 많은 30조 루블(540조원)을 넘어섰다. 군사비 지출은 3조5000억 루블로 정해져 있었지만 훌쩍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GDP의 5%를 초과해 소련 붕괴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재정이 모자라면 국부펀드 돈을 끌어다 쓰는 방안과 대출이라는 방안이 있다. 재무장관이 거론한 대책도 이 두 가지다. 그런데 국부펀드 규모가 크다 해도 화수분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1일 기준 러시아 국부펀드의 유동자산은 약 7조6000억루블, 러시아 GDP의 5.7%였다. 그런데 작년에 정부가 쓴 돈 가운데 2조루블은 국부펀드에서 끌어다 쓴 것이었으며 그 대부분인 1조5000억루블은 연말 한 달 새 가져다 쓴 거였다. 국부펀드 돈도 서방 계좌에 묶인 것이 많으니 군사비 조달도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가스프롬 세금을 올린 것뿐 아니라 정부는 스베르방크와 로스네프트 같은 국영기업들로부터 가져가는 배당금도 올렸고, 국민들 연기금도 당겨쓰고 있다. 

 

[YALE] Europe Does Not Need Any Russian Gas


그래도 모자라는 전쟁자금은 채권을 발행해서 메운다. 지난해 국채를 팔아 3조 루블 넘게 모았는데 대부분이 작년 4분기에 이뤄졌다. 조달을 쉽게 하려고 변동금리형 채권을 늘리다보니 그 비율이 어느새 40%에 육박한다. 모두 빚이고, 갚기에 부담스런 빚이다. 현재 러시아의 국내 부채는 GDP의 12%에 불과하지만, 그 빚을 갚는데 드는 비용이 예산 지출의 5%를 차지하게 된다. 푸틴 정부의 3개년 재정계획에 따르면 올해 총지출은 작년과 비슷하지만 돈 쓸 곳이 바뀌었다. 안보분야 지출이 작년에는 예산의 24%였는데 올해는 9조5000억 루블, 33%로 늘게 됐다. 전쟁비용에 덧붙여질 것으로 보이는 ‘비밀 예산’도 16%에서 22.4%로 늘었다. 

 

[YALE] Europe Does Not Need Any Russian Gas


그러면서 사회분야 예산, 경제발전에 투입해야 할 예산은 줄이니 국민들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시베리아와 우랄 산맥, 중앙 러시아는 특히 심각한 예산 부족에 빈곤이 일상화된 곳들이다. 몇몇 지역은 동원된 군인들의 장비 보급비를 줄이려고 징병한 사람들을 자원봉사자로 취급한다는 뉴스도 있다. 

 

지난해 산업생산이 거의 줄지 않았다고 러시아 정부는 주장하지만, 무기생산과 군사지출을 끼워넣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22~50세 30만명이 전쟁에 끌려간 바람에 GDP가 0.5% 줄었다는 분석도 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러시아를 떠난 사람이 50만에서 100만명 사이라는데, 그 노동력 손실과 두뇌유출은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구의 첨단 제품을 낡은 국산품으로 대체하면서 이미 산업생산에서는 퇴행이 시작됐다. 모스크바타임스는 “10년 동안 침체를 겪었는데 ‘잃어버린 10년’을 한번 더 겪게 됐다”고 적었다.

[YALE] Europe Does Not Need Any Russian Gas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전쟁을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경제침체라는 징벌로 때워야 할 판이다. 그들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하는 것은 어쩌면 글로벌 경제에서 러시아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포린폴리시의 표현을 빌면 “세계 경제는 더 이상 러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021년 러시아는 하루 700만 배럴의 석유와 연간 2000억 입방미터의 가스를 수출했다.  러시아산 가스의 83%가 유럽으로 갔다. 연방정부 수입의 약 절반이 거기서 나왔다. 최소한 러시아는 에너지 분야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러시아는 루블화 결제를 거부한 나라들에 가스 공급을 끊고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을 셧다운했다. 유럽은 전체 가스 공급의 40~45%를 러시아에 의존했는데 그 비중이 작년에는 7~8%로 떨어졌다. 

 

[Wilson Center] Putin’s War Costs: Changing Russia’s Economy

 

푸틴은 에너지를 인질로 잡고 유럽을 길들이려 했지만 이 겨울 유럽은 얼어붙지 않았다. 2016~2021년 유럽인들은 평균적으로 겨울철 한 달 반 동안 저장고에 있는 가스의 17.5%를 썼다. 그런데 윌슨센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후 첫 겨울에 저장고에서 가져다 쓴 가스는 12.5%에 불과했고 비축량은 오히려 전보다 늘었다. 연말 몇 주 동안 휘발유값은 더 떨어졌다. 날씨 덕도 있었지만 중동산 액화천연가스(LNG)를 더 사들이고 재생에너지 비율을 늘리며 러시아 의존을 줄이려한 것도 효과를 봤다. 

 

이 겨울이 지나도록 유럽에 저장된 가스의 최소 절반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올해 안에 앞으로 두 겨울을 쓸 가스를 쟁여둘 수 있을 것이고, 그와 연동돼 기름값도 작년보다는 안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는 유럽시장을 스스로 내팽개쳤다. 중국으로 가는 가스관이 제 기능을 하려면 5년은 더 걸릴텐데 말이다.

 

ST. PETERSBURG, RUSSIA — January 12, 2022. Gazprom's Adler Thermal Power Station. www.wilsoncenter.org


석유시장에서도 러시아는 ‘을’이 돼버렸다. 지난해에 유럽이 사지 않은 만큼 인도, 중국, 터키가 러시아 기름을 사갔다. 그래서 수출한 기름 양은 비슷하지만 덤핑판매를 했다. 이 나라들은 가격상한 같은 것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30달러 이상 싼 가격에 수입해간다. 러시아 우랄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라 하지만 실제로는 브렌트 가격의 절반인 38달러 선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에너지값이 올라가서 러시아 경제는 끄떡없다는 모스크바의 자신감이나 일부의 낙관론에는 ‘반값 석유’의 진실이 빠져 있는 것이다.


올해 다보스포럼에서도 ‘러시아 없는 세계경제’는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포럼에 참석한 어느 서방 관료의 말처럼, 현재로서는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장기적으로 대체할 만한 것이 있는지 의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자리가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러시아는 지난 몇 년간 비즈니스 기회를 확대해 온 아프리카의 외교에 매달리고 있다. 러시아는 2019년 소치에서 첫 러시아-아프리카 경제포럼을 개최했다. 또 크렘린과 연계된 용병회사 바그너를 이용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바그너는 말리, 리비아, 마다가스카르 정부와 보안계약을 맺었다. 


1년새 파괴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제재는 러시아를 갉아먹고 있다. 무기 프로그램에 필요한 반도체를 얻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고, 국방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있는 이란이나 북한이 러시아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불투명하다. 러시아인들은 경제고립이라는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고, 세계는 ‘러시아 없는 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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