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하니 대단히 문학적인, 내지는 만화적인 뭔가가 떠오르지?
어릴 적에, 그러니까 소녀 적에, 달을 너무너무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얼마나 좋아했냐면,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잠을 안 자고 달을 보고 있었으면 싶었고, 만져보고 싶었고, 달에 가서 살고 싶었다. 그냥 10대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후지디 후진 홍제동 개천가 볼품없는 난간에 올라서서 혹은 기대어서 산 위에 걸린 달을 쳐다보곤 했었다. 경치는 끝내주게 안좋았지만 달만큼은 보기 좋았으니깐. 역시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2층에서 본 거리’라는 노래가 있었지. 딱 제목만큼의, 그 부분만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는, 스쳐지나갔던 노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2층이다. 골목길을 내려다보기엔 2층이 딱 적당한 것 같다. 서울에서 살던 곳은 -- 결혼한 뒤엔 다가구 주택 1층에 살았고, 그 뒤로 아파트 18층과 15층. 골목 자체가 없는데, 2층에서 본 거리라는 것 따위가 있을 게 뭐람.
잊고 있었다. 고개만 잠시 돌리면, 골목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세탁기를 돌리러, 빨래를 가지러, 잠시 한모금 하러, 쓰레기를 버리러 문 앞에 나갈 때마다 골목을 돌아볼 수가 있다. 자꾸만 말을 걸어서 성가시게 만드는 다나카 할아버지의 2층집, 꽃가꾸기에 편집증적인 정성을 보이는 앞집 아줌마, 조선인임을 숨기고 사는 것으로 생각되는 옆집 가족, 우리와 같은 건물에 있지만 반대편 계단을 쓰는 삼남매네 집.
하마도 아니고, 달밤에 체조할 일도 없는 작자가 한밤에 계단어귀를 어정거리며 골목길을 찍어댄 이유는, 바로 달 때문이다. 실은 보름이 되기 며칠 전서부터 계속 만월을 기다렸다. 마치 그때만 사람이 되는 늑대처럼.
별볼일 없는 철제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달은 너무 멋있었다. 구름은 항상 그렇듯, 굉장히 빨리 움직여간다. 이곳의 구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양의 구름들이 달을 스치고, 뒤덮고, 눈가리고 아웅! 하면서 달려들 갔다. 달을 사진기에 담는 것은 역시나 나한테는 무리였다. 구름 사이의 저 하얀 빛덩이가 달이다. 달이 너무 환해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여지껏 이날만큼 눈부신 달은 본 적이 없었다.
일본 집들은 대체 왜 베란다에 유리를 안 다는 거야, 2중 섓시를 설치해놓으면 좋잖아! 겨울철 난방도 없는 집에, 2중창만 달아도 훨씬 따뜻할 것을...이라고 하면서 있는대로 욕을 했었는데 말이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는데. 베란다 창문도, 2중창도 없으니 이런 맛이 있다. 방안에 누워 창밖 휘영청 밝은 달을 볼 수 있다는 것. 달은 너무 밝았고, 방안에 들어와 자리에 누운 뒤에도 한동안 달을 보며 놀았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은 것도 모두 달님 때문이기에 다시 계단에 나가 달을 보고 원망을 해보고, 갑자기 가을처럼 시원해진 ‘달밤’을 신기해하고.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진 못했지만 어차피 나는 무사가 아니라 일시적 불면증에 걸린 골목길 아줌마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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