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아이젠하워와 '군산복합체'

딸기21 2011. 11. 1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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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우리 군사조직은 내 전임자들 시절의 조직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릅니다.

최근까지 미국에는 군수산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평시엔 보습을 만들다가 필요한 때가 되면 칼을 만드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임시변통으로 국방의 위기를 해결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방대한 규모의 상시적인 군수산업을 창출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 더해 350만 명의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국방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간 군사안보에 쓰는 돈은 미국 기업들의 순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방대한 군사체계와 방대한 군수산업의 결합이라는 것은 미국에게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그 전체적인 영향력,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심지어 정신적인 영향력을 연방정부의 모든 사무실과 주정부 청사들, 모든 도시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성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속의 어두운 함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땅, 우리의 자원, 우리의 모든 삶이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회구조 자체도 이 문제와 결부돼 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군산복합체가 통제 불가능한 영향력을 갖게 될 수도 있기에, 정부의 여러 협의회들은 그 영향력을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 주어진 권력이 재앙처럼 발호할 가능성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의 ‘백악관에 보내는 고별 연설(Farewell to the White House)’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부터 8년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죠. 길다면 긴 임기를 마치면서 국민들에게 보내는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군산복합체 연설’입니다.

전쟁영웅, '군산복합체'에 경고를 던지다

어릴 때 보았던 ‘아이젠하워’라는 드라마인지 영화인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아이젠하워는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전쟁영웅으로 묘사됐습니다. 대학 시절 ‘군산복합체’라는 위압감 느껴지는 말을 처음 들은 뒤 다시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듣게 됐습니다. 전쟁영웅 아이젠하워가 군산복합체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 경고한 인물이라는 게 너무나도 역설적이면서, 또한 신기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젠하워가 저 연설을 한 것은 1961년 1월 17일입니다.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중계된 이 연설은 백전노장이 미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남긴 ‘예언’으로 유명하지요.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고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꼽힙니다.

아이젠하워는 임기를 사흘 남겨두고 행한 이 연설에서 비대해진 군부가 군수산업체들과 연결돼 국가의 방향성을 왜곡시키는 체제, 즉 군산복합체의 탄생을 경고했습니다. 두 차례 전쟁을 치르는 사이 비대해진 군부와 방위산업체의 결합을 우려하면서, 소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대결보다 상호의사소통을 늘리고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집권한 첫 해인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그 이후 동서 양 진영 간 냉전은 오히려 더욱 격화됐습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옛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블록과 전략방어무기들을 쌓아올리며 수십 년간 반목했습니다. 두 진영 간 ‘차가운’ 외교관계 속에, 핵무기 공격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공공정책이 과학기술 엘리트들의 포로가 될 수 있다"

아이젠하워는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기에, 정부와 결탁된 군산복합체가 확대되는 것이 냉전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냉전의 요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의 이 연설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라는 말은 냉전시대 군비경쟁과 대립을 부추기는 체제 내적 요인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됐습니다.

연설의 뒷부분을 마저 보지요.

(군사체계와 군수산업의) 결합이 이 결합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 절차를 위협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시해도 되는 것은 없습니다. 거대 산업과 군수기기를 적절히 그물 안에 집어넣고 우리의 평화로운 목적과 방법을 위해 쓸 수 있으려면 시민들이 늘 경계를 하면서 인지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보와 자유가 함께 번영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군수산업 태세에서 일어난 변화는 최근 수십 년간 일어난 기술혁명과 유사한 동시에, 그 기술혁명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술혁명의 중심인 ‘연구’는 점점 더 공식화되고, 복잡해지고, 비용도 늘고 있습니다. 연구 활동의 방향성을 결정하거나 수행을 하는 데에서 연방정부의 몫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지적 호기심을 대신해 정부가 발주하는 계약들이 연구의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낡은 칠판은 사라지고 수백 개의 전자 컴퓨터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국가가) 과학 연구와 발견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동시에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정반대의 위험성, 즉  공공정책이 그 자체로 과학기술 엘리트들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후임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났죠.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에 건설중이던 소련 미사일기지를 정찰, 사진을 촬영한 사실을 드러나면서 미-소 간 긴장이 고조된 사건입니다. 아이젠하워의 경고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쟁을 예고한 우울한 예언으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케네디 정부는 소련이 미국과 가까운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짓는 것은 무력시위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행한다면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것이며 3차 대전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불안에 떨었고, 미국에서는 주민들이 집 마당에 방공호를 파고 비상식량을 사다놓는 등 일대 혼란이 일었습니다.

양측은 긴박한 협상을 벌여, 소련이 기지 건설을 중단하고 미국이 그 대가로 터키에 있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를 철수시키는데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 사건은 세계가 언제라도 핵전쟁의 공포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음을 보여줬지요. 이 사건을 전후해서 ‘3차 대전’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출현한 군산복합체

군산복합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이젠하워로 알려져 있지만, 거대 기술과 결합한 군수산업이 군사부문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입니다. 무기를 생산·보유한 집단이 권력을 좌지우지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현대적인 의미의 군산복합체가 출현한 시기는 19세기 말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전까지의 무기생산업자들과 군산복합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평시의 생산’이 둘 사이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아이젠하워가 지적한대로, “평시에는 보습을 만들던 대장장이들이 전란 시에는 칼과 창을 만드는” 수준이라면 그것은 전근대적인 무기산업이라는 것이죠. 이와 달리 현대의 군산복합체는 평소에도 대규모로 무기를 생산해 화력을 비축해둡니다. 이 생산체제에는 수많은 부문·업체들이 수직-수평적 구조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군산복합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80-1890년대 영국·프랑스·독일 등에서였습니다. 땅과 바다 양쪽에서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분쟁이 일상화됐고, 결국 유럽 대륙에서 대전이 벌어지기까지 군비확장이 계속됐던 겁니다. 예측가능한 일이지만 군산복합체의 등장은 그 자체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독일의 팽창과 서유럽국들의 반격으로 일어난 프랑코-프로이센(프랑스-독일) 전쟁 같은 것이 그 예죠. 뒤이어 일본과 미국에서도 군산복합체라 부를 수 있는 거대 군수산업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영국 해군개혁을 주도했던 재키 피셔(John Arbuthnot ‘Jacky’ Fisher. 1841-1920)라는 장성이 있었습니다. 현대 영국 해군의 틀을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대포알을 실은 목조 범선들을 잠수함과 강철 전함,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변모시킨 주역입니다. 1914년 영국 최초의 ‘Sea Lord’ 작위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재키 피셔 장군은 군산복합체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영국 해군 무기체제를 개혁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군사적 용도로 통합되게끔 했고, 특히 군사-기술부문의 통합이 결국 군부와 첨단 민간기업의 결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평가입니다.

미국 발명가이자 기업가였던 새뮤얼 콜트(Samuel Colt. 1814-1862), 독일 철강회사 크루프(Krupp)의 사실상 창업자인 알프레드 크루프(Alfred Krupp. 1907-1967)(여기서 ‘사실상 창업자’라고 한 것은 알프레드의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창업을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들 대에 와서 회사 꼴을 갖췄기 때문), 노벨상 창설자로 잘 알려진 알프레드 노벨 같은 발명가·기업가들이 피셔의 해군개혁에 따른 무기체제 개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2차 대전 거치며 국가의 전 부문의 전시 체제가 된 미국

하지만 오늘날의 군산복합체들은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봐야죠. 이들이 성장한 결정적인 계기는 물론 2차 대전이었습니다.

2차 대전에 뛰어든 미국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고, 국가의 전 부문을 전시 체제로 만들었습니다. 베트남전이 끝난 뒤인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화된 과거를 깨고자’(역사학자 마이클 셰리의 표현입니다) 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다시 고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카터의 노력은 시행착오만 거듭한 끝에 실패로 끝나고... 미국은 더더욱 강고한 군산복합국가가 됐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전 세계 군사비 지출액의 40%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부 지출은 군산복합체의 손으로 고스란히 넘어갑니다. 더욱이 요즘은 기본적인 군사업무까지 민간에 위탁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오들오들매거진] 아프간의 민간 군사회사들
[오들오들매거진] 도마에 오른 전쟁대행산업
[오들오들매거진] 전쟁을 파는 회사들 - 피터 싱어 <전쟁대행주식회사>에서 발췌 


미국의 USA투데이와 공영라디오방송(NPR)은 2011년 1월 17일 아이젠하워의 연설 50주년을 맞아 그의 경고를 되짚으며 “군산복합체에 대한 그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진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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