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모런트 베이 폭동

딸기21 2011. 11. 20.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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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10월 11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동부의 모런트 베이에서 폴 보글(Paul Bogle)이 이끄는 흑인 남녀 200~300명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모런트 베이 폭동 Morant Bay rebellion 은 자메이카 역사의 분기점이 됐으며, 영국에서도 거센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영국에는 자메이카 등 카리브 지역에서 온 흑인들이 많지요. 얼마전 벌어진 '런던폭동'에도 자메이카계 이민자 가정 출신 젊은이들이 많이 가담했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폭동의 성격은 논란거리로 남아 있으며 흑인노예사와 식민지 연구의 주제로 자주 인용됩니다.

폭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자메이카 흑인들의 처지를 살펴봐야겠죠. 
1834년 영국에서 노예해방법(Emancipation Act)이 통과됨에 따라 자메이카에서는 4년 뒤인 1838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됐습니다. 해방된 노예들은 일자리와 고용주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얻었으며 투표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극빈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높은 ‘투표세’를 낼 수 없었고, 이렇게 해서 선거에서 사실상 배제됐습니다. 1864년 자메이카 선거 때 흑인과 백인 인구의 비율은 32대 1로 흑인이 많았으나 전체 43만6000명의 인구 중 투표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2000명에 불과했고 그 대부분은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모런트 베이 폭동을 이끈 폴 보글


1865년 무렵의 자메이카 경제는 2년에 걸친 가뭄 때문에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해방노예들과 그들의 후손들 사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노예제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해 영국 침례교 선교협의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of Great Britain)의 에드워드 언더힐(Dr. Edward Underhill) 사무총장은 본국의 식민지 행정기구에 서한을 보내 자메이카의 비참한 현실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편지를 전해받은 자메이카 총독 에드워드 아이어(Edward Eyre)는 즉시 거기 실린 내용들을 부인하면서 자메이카의 흑인 빈민들이 ‘언더힐 모임’을 조직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이어는 농지 없는 흑인 농부들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영지를 불하해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것마저 가로채 멋대로 조작했습니다.
 
여왕은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더욱 열심히 일할 것만을 종용하는 답신을 보내왔는데, 농부들은 아이어가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유한 뮬라토 정치인이었던 조지 윌리엄 고든(George William Gordon)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널리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농민들을 북돋웠습니다. 고든을 따른 사람들 중의 하나가 교회 집사였던 폴 보글이었습니다. 





1857년 인도 벵골 폭동 뒤 벌어진 학살사건의 영향 때문에 자메이카의 영국인들은 흑인 폭동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0월 7일 한 흑인이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플랜테이션 농장을 가로질러 갔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투옥되는 일이 일어나 흑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기 항의해 스토니 거트(Stony Gut) 마을에서 시위를 했던 흑인들 중 한 명이 체포됐습니다. 성난 시위대는 감옥을 부수고 체포된 사람을 빼냈
습니다. 이 시위를 주도한 보글 등 28명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보글은 이에 맞서 경찰서를 공격했습니다.

10월 11일, 보글은 시위대를 이끌고 모런트 베이로 행진했
습니다. 시위대가 법원 앞에 이르자 소규모 백인 민병대가 나타나 총기를 난사, 시위대 7명이 숨졌습니다.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고, 시가지는 시위대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인 민병대원과 장교를 포함해 18명이 충돌로 숨졌습니다. 흑인 폭동 참가자는 2000명으로 늘었으며 시위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백인 목장주 2명이 사망했고 다른 목장주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시위대가 민병대와 충돌했던 모런트 베이의 법원 건물. 지금도 불에 탄 채로 남아 있다.


존 아이어 총독은 정부군을 보내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시위대를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보글은 모런트 베이에서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군대는 조직적 저항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아이들이나 모두 눈 앞에서 학살했습니다”.
총 439명의 흑인들이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보글을 비롯한 354명이 붙잡혀 처형됐
습니다. 일부는 재판도 없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임신부를 포함해 600명의 흑인들이 채찍형을 받고 투옥됐습니다. 폭동과는 관계가 없었던 고든도 체포돼 10월 23일 재판 이틀만에 교수형에 처해습니졌다.

자메이카의 폭동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에서는 거센 논란이 벌어졌으며 아이어 총독의 처사 대해 찬반 양론이 일었습니다. 1866년 8월 아이어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연회를 열었으나 비판론자들은 그를 살인자라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아이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메이카 위원회(Jamaica Committee)를 만들어 아이어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자유주의자 존 브라이트와 찰스 다윈, 존 스튜어트 밀, 토머스 헉슬리, 토머스 휴즈, 허버트 스펜서 등이 자메이카 위원회에 합세했습니다. 반면 보수파 토머스 칼라일과 찰스 킹슬리, 찰스 디킨스, 존 러스킨 등은 아이어를 옹호했습니다. 아이어는 살인죄로 기소되긴 했으나 재판은 결국 열리지 않았습니다.

자메이카가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모런트베이 폭동'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점진적인 자치'를 거쳐 영국령 서인도 섬들의 연합인 '서인도연합(Federation of the West Indies)'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것이 1958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연방을 떠나 자메이카라는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탄생합니다. 모런트 베이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독립, 그 이후  
독립한 직후 자메이카는 연평균 6%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잘 나가는 듯했습니다. 알렉산더 부스타만테(Alexander Bustamante), 도널드 생스터(Donald Sangster), 휴 쉬어러(Hugh Shearer) 등 괜찮은 총리들이 초반 10년을 맡아 이끌었습니다. 보크사이트와 알루미늄 같은 자원이 있었고, 영국인 관광객들은 꾸준히 자메이카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졌고 킹스턴 주변에는 도시빈민이 늘어갔습니다.

Riot police West Kingston, Jamaica
지난해 5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서 경찰들이 마약갱 체포작전을 벌이고 있다. Reuters Tv/Reuters  

작은 섬나라이고 식민모국의 경제에 영향을 맡이 받는 구조이다보니, 1970년대 석유파동과 세계경제의 부침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중남미 다른 나라들처럼 1980년대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고, 글로벌화의 파고 속에서 지금은 분위기 좋은 휴양지이자 마약갱들이 설치는 섬으로 변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서 '두두스 코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한 마약갱을 잡기 위해 경찰과 마약조직원들이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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