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에서 흑백 분리의 역사는 네덜란드 이주민의 후손인 보어(Boer)인들이 남아공을 지배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한편 금과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독점해 지배층으로 군림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네덜란드어에서 변형된 보어인(아프리카너·Afrikaner)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Afrikaans)로 ‘분리’를 의미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 백인정권이 공식화한 인종분리정책을 가리키는 말로, 흑백 차별을 법적·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체제였습니다. 1950년 만들어진 집단지구법령에 따라 인종별로 거주지역이 나뉘었으며, 이용할 수 있는 공공·교육시설도 분리되는 등 극심한 차별이 제도화됐습니다.
(후일담입니다만) 1994년 집권 뒤 과거사 문제에서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원칙을 내걸었던 넬슨 만델라는 과감히, 때로는 흑인 피해자들의 반발을 무릅써가며 백인 정권 잔존세력을 끌어안았지요. 한때 자신을 테러범으로 몰아붙였던 보타와도 만나 화해 의지를 알린 바 있습니다. 2006년 11월 보타가 숨지자 만델라는 아낌없는 애도로 화해의 뜻을 다시 세상에 알렸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인구 대부분인 흑인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남아공에 대한 비난의 의미로 각종 제재를 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남아공은 1988-90년 사이에만 4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강제분리를 골자로 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흑인들을 사회적·정치적으로 배제한 채 백인들로만 이뤄진 남아공 정부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농장처럼 돼있는 빅토르 베르스테르 교도소 안의 작은 집에 수감됐고, 석방될 때까지 거기 머물렀습니다.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빅토르 베르스테르 교도소 시절 채소와 꽃을 가꾸던 일을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1990~94년은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백인 아프리카너 강경우파들은 반발했고, 만델라와 ANC의 투쟁을 물밑 지원했던 많은 백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정치적 동요를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갑자기 기세를 펴게 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갈등과 다툼이 빚어졌습니다. 특히 ANC의 주축이면서도 흑인 중에서는 소수파인 코사족과, 흑인 주류를 차지하는 줄루족 간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망고수투 부텔레지(Inkosi Mangosuthu Buthelezi. 1928)가 이끄는 잉카타자유당은 남아공 최대 부족인 줄루족 흑인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잉카타자유당은 코사 족 등 여러 부족이 한데 모인 ANC와 갈등을 일으켜, 만델라 석방 뒤 민주선거가 치러지고 흑인정권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흑-흑 유혈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런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인종차별 정책을 펴온 나라가 내전 없이 ‘민주적 정권교체’에 합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의 희망이 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는 경찰이 개입해 인종 간 충돌과 폭력을 부추겼는지를 공식 조사하고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선거를 실시, 국회를 구성하자는 내용의 이해각서(Record of Understanding)에 서명했습니다. 이듬해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는 평화적으로 인종차별을 끝내고 남아공의 민주주의를 이룬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흑인들은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인 1994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으며, 이 선거에서 ANC는 의회 400석 가운데 252석을 거머쥐었습니다. 흑백 타협으로 만들어진 새 헌법은 의회가 대통령을 뽑도록 규정했으며 만델라는 모두의 기대 속에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342년간의 백인통치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상 첫 자유선거,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의 '공동 정부'
만델라는 타보 음베키(Thabo Mbeki. 1942-)와 함께 데 클레르크를 통합 정부의 초대 부통령으로 임명했습니다. 음베키는 만델라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 투쟁을 벌인 고반 음베키(Govan Mbeki. 1910-2001)의 아들이지요.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만들어, 오랜 투쟁 동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 1931-) 주교(사진 ▶)에게 맡겼습니다. 시행착오와 비판도 많았지만 TRC는 훗날 다른 나라들에서도 과거사 진상규명의 모델이 됐습니다.
만델라는 남아공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인들을 갑작스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의 지식과 기술과 관료체계와 자본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급진적인 흑인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만델라는 백인들과의 공존 노선을 밀고 나갔습니다.
자칫 대규모 유혈사태나 심지어 내전으로까지 갈 수도 있었던 혁명적인 시기를 비교적 안정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만델라의 굳은 의지와 지도력 덕분이었다고 남아공 사람들은 입을 모읍니다. 만델라의 남아공은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슬로건으로 삼았습니다.
만델라는 94년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이미 77세의 고령이었습니다. 4년의 재임 뒤 대통령직은 타보 음베키에게 넘어갔습니다.
끝나지 않는 만델라의 여정
만델라는 어려운 시기 국가를 연착륙시켰지만 남아공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궤도에 올라서는 듯 보였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에이즈였습니다. 에이즈가 전국에 급속히 퍼져, 노동가능 인구의 4분의1 이상이 에이즈로 숨지는 상황이 됐습니다. 부모를 잃은 ‘에이즈 고아’들이 넘쳐났습니다. 에이즈는 남아공의 경제를 갉아먹고 성장 잠재력을 잠식했습니다.
만델라는 퇴임 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에이즈와의 싸움을 선언했습니다. 구호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고아들을 돕고, 자신의 명망을 활용한 이벤트들로 기금을 모아 에이즈 예방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시에 이라크 전쟁 반대, 아프리카 분쟁 조정 등의 활동을 하며 명실상부 ‘국제사회의 원로’ 역할을 했지요. 89세 생일이던 2007년 7월18일에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버마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치,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전 아일랜드 대통령, 방글라데시 빈민운동가 겸 금융운동가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등을 ‘회원’으로 하는 ‘디 엘더스(The Elders·원로들)’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만델라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습니다.
데 클레르크는 1996년까지 부통령을 지낸 뒤 1997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데 클레르크 재단을 운영하면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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