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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1차 대전 기간 인도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인도방어규제법(Defence of India Regulations Act)이라는 것을 도입했습니다. 일종의 전시 비상계엄령 비슷한 억압적인 법률이었습니다.
당초 이 법은 한시적인 것이었고, 인도인들은 전쟁이 끝나면 영국 제국 안에서 어느 정도 독립성이 보장된 자치령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3월 영국 당국은 롤랫 법(Rowlatt Act)을 만들어 인도방어규제법을 연장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배신당한 인도인들과 영국의 학살
법률가 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훗날 세상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위대한 간디)’로 알려진 그가 인도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것은 1914년입니다. 간디는 인도국민의회(Indian National Congress)의 자치(Home Rule) 운동을 주도하면서 영국 제국주의를 향해 인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요구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간디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Gujarat) 주의 해안도시 푸르반다르(Poorbandar)에서 주 선임장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평화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의 고향인 구자라트는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폭력과 유혈충돌이 극심한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네 번째 아내였습니다.
간디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내며 인도인 이주민 공동체를 위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신심 깊은 힌두교도였던 그는 정의롭지 못한 법과 제도에 비폭력 불복종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간디의 저항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간디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간디를 중심으로 한 인도인들의 저항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인도 곳곳에서 피바람이 몰아칩니다. 대표적인 것이 잘리안왈라 바그 사건입니다.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는 인도 펀자브(Punjab) 주의 암릿사르(Amritsar)에 있는 공원 이름입니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롤랫 법이 도입되자 배신감을 느낀 간디는 인도인들을 이끌고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운동을 시작합니다. ‘진실한 힘’, ‘영혼의 힘’이라는 뜻인 사티야그라하는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이었습니다.
‘진실한 힘’, ‘영혼의 힘’ 사티야그라하
인도인들과 식민통치 당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인도인들은 북부 인도의 추석 명절 ‘바이사키(Baisakhi)’인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제국주의 병력은 공원에 모인 2만명의 사람들을 포위한 뒤 경고도 없이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이 학살에서 380여명이 숨지고 1500여명이 다쳤습니다.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주 고라크푸르(Gorakhpur) 근교의 농촌 마을인 차우리 차우라(Chauri Chaura)의 사건도 있지요.
1918-22년 인도에서는 간디의 영향을 받아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노동자, 빈민, 농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평화로운 저항운동으로 출발했던 시위는 간디가 호소했던 ‘비폭력’ 원칙을 넘어서 반제국주의·계급주의 투쟁으로 옮겨갔고, 영국 식민통치 당국은 강경진압에 나섰습니다.
봄베이(오늘날의 뭄바이), 마드라스(오늘날의 첸나이), 아흐메다바드 등지에서 잇달아 진압병력과 시민들이 맞부딪쳤습니다. 1922년 2월 차우리 차우라 마을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자 주민들이 경찰서를 불태우고 경찰 22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농민 12명을 보복살해했다.
여기서부터는 간디의 전술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이 일었던 부분입니다. 전형적인 ‘피의 악순환’이 일어나자 간디는 의회 지도부와의 협의 없이 독단으로 저항운동 일정 전체를 취소해버렸습니다. 궁지에 몰렸던 영국 총독과 식민통치 당국은 이때를 기화로 저항운동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으며 간디는 음모죄로 체포됐습니다. 간디의 혐의는 ‘투쟁을 짓누르기 위해 정부가 채택한 억압수단들’에 대해 3편의 글을 발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이라는 사자가 우리 얼굴에 피투성이 발톱을”
1922년 2월 23일 간디는 <젊은 인도>에 ‘갈기를 흔들며’라는 제목의 선동적인 글을 썼습니다. 간디가 쓴 일련의 ‘선동문’ 중 세 번째 글이자, 영국 제국주의 권력을 향해 가장 신랄한 공격을 퍼부은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서 간디는 “영국이라는 사자가 우리 얼굴에 대고 피투성이 발톱을 흔들어 대는데 어찌 타협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당국은 간디가 인도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실상 간디는 첫 번째 글을 쓸 때부터 체포를 각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간디는 은행가 출신으로 <젊은 인도(Young India)> 신문 편집·발행인을 맡고 있던 샹칼랄 반케르(Shri Shankarlal Ghelabhai Banker)와 함께 형법 124조A항 위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1922년 3월 18일 구자라트 주의 중심도시 아흐메다바드(Ahmedabad)의 순회법정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삼엄한 경비 속에 펼쳐진 이 재판은 이후 ‘큰 재판(The Great Trial)’으로 불리게 됩니다. 판사는 영국인 로버트 브룸필드(Robert Broomfield)였습니다. 간디와 샹칼랄 반케르에게는 변호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훗날 유명해진) 진술을 통해 스스로를 변호했습니다.
간디는 어째서 영국 식민통치에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영국에 맞서는 방식으로 비폭력 비협조라는 저항을 택하게 되었는지 법정에서 설명했습니다. 요약해 소개합니다.
“모든 희망은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펀자브에서 일어난 범죄는 분칠에 가려졌을 뿐이고, 죄인들은 벌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공직에 남아 있습니다. 몇몇은 인도 돈으로 연금까지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포상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개혁조치들은 영국이 정말로 마음을 바꿔 추진했던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인도를 더 쥐어짜 부(富)를 뽑아내고 더 오랫동안 노예상태에 두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는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영국과 연결돼 있다는 것 때문에 인도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기력해졌다는 겁니다.
무장해제당한 인도로서는, 영국과 무력 분쟁에 나서고 싶어도 압제에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도자들 중 어떤 분들은 인도가 자치령(Dominion) 지위를 얻는 데에만 몇 세대가 지나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도는 너무 가난해져서 기근에 맞설 힘조차 거의 없습니다.
영국인들이 오기 전만 해도 인도의 수백만 농가에서는 얼마 안 되는 자원으로나마 실을 잣고 천을 짰습니다. 이런 농가 수공업은 인도 경제에 핵심적인 것이었는데 이제는 거짓말처럼 비정하게 파괴되었고 영국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은 비인간적인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이들도 거의 굶어 죽어가는 처지이지만 자신들이 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사람들이라 해도, 자신들이 인도의 대중에게서 이익을 빨아내는 외국 착취자들을 위해 일하는 덕에 연명하고 있다는 걸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영국 통치당국이 세운 인도 정부는 인도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뭅니다.
궤변도, 왜곡도 아닙니다. 수치를 들여다보면 시골 마을들이 해골처럼 앙상해졌다는 증거를 맨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늘에 신이 계시다면, 역사에서 불평등으로 기록될 이 인류에 대한 범죄에 영국과 인도 시골마을들 모두가 뭐라도 해법을 내놔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 나라의 법은 그 자체가 외국 착취자들을 위해 종사하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일은, 영국인이나 그들을 위해 이 나라 정부에서 일하는 인도인들이나, 자기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점입니다. 영국인이나 인도인 관리들 중 많은 분들이 이 세상에서 고안된 최적의 시스템에 따라 행정을 하고 있다고 충직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도가 느리지만 꾸준하게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미묘하면서도 효율적인 공포의 체제(system of terrorism)를 운영하면서 한 손으로는 잘 조직된 무력을 과시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모든 권력을 동원해 자치를 할 힘을 빼앗으며 보복을 가합니다. 사람들을 거세해버리고, 본심과 다르게 행동하는 습성을 심어 놓습니다. 식민당국의 관리들은 무지와 자기기만에 더해 이 경악할 습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이 체제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간단하게라도 드러내보고자 애썼습니다. 특정 관료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감을 가진 것은 전혀 아니며, (영국) 국왕 개인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나는 이전의 어떤 체제보다도 인도에 더 큰 해악을 미치고 있는 이 정부 자체에 불만을 갖는 게 옳다고 보는 겁니다.
영국 통치 아래에서 인도는 어느 때보다도 씩씩함을 잃었다고 나는 믿었고, 그래서 이 체제를 편드는 건 죄악이란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인도가 씩씩함을 읽지는 않았음을 알리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내겐 소중한 특권입니다.
영국 통치 아래에서 인도는 어느 때보다도 씩씩함을 잃었다고 나는 믿었고, 그래서 이 체제를 편드는 건 죄악이란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인도가 씩씩함을 읽지는 않았음을 알리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내겐 소중한 특권입니다.
사실 나는, 비협조 운동을 통해서 인도와 영국이 지금의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줌으로써 양측 모두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악(惡)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善)을 돕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악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의도적으로 비협조를 표현하곤 했습니다.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폭력적인 비협조는 악을 배가시킬 뿐이며 폭력으로만 지탱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폭력과 완전히 결별해야만 악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둬들이는 일이 되리라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 생각에, 악(惡)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善)을 돕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악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의도적으로 비협조를 표현하곤 했습니다. 나는 우리 동포들에게, 폭력적인 비협조는 악을 배가시킬 뿐이며 폭력으로만 지탱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폭력과 완전히 결별해야만 악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둬들이는 일이 되리라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비폭력에는 악에 대한 비협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법에 따라 내게 내려질 수 있는 벌 중 가장 높은 벌을 스스로 청하여 달게 받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부러 짊어지는 죄이자, 시민의 지고(至高)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과 배석판사님들, 당신들이 근거를 두고 있는 법이 사악하다는 것과 내가 실제로는 결백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들 앞에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악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들이 복무하고 있는 이 체제와 법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며 나의 행동이 영연방에 해악을 입히는 것이라 믿는다면 내게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십시오.”
물론 간디의 저항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이 진술은 너무나 짧지요.
간디의 비폭력 저항노선의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도 많습니다. 이 진술의 앞부분에서 간디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만, 간디는 1차 대전 시기 영국과 독일이 싸우자 영국 편에서 ‘신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도 간디가 식민통치 당국에 유화적으로 접근한다는 반론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노선의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도 많습니다. 이 진술의 앞부분에서 간디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만, 간디는 1차 대전 시기 영국과 독일이 싸우자 영국 편에서 ‘신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도 간디가 식민통치 당국에 유화적으로 접근한다는 반론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큰 재판’
간디의 사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때론 종교적인데다 심지어 피학적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 진술에서 드러나듯, 간디의 저항 방식은 최고형량을 자청하는 식이었습니다. 간디는 뒤에 감옥에서 영국인 총독에게 신발을 만들어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일견 기이하게 비칠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간디를 남다르게 만든 부분인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1942년의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브룸필드 판사는 이 재판 몇 년 전 또 다른 인도인 저항운동가 발 강가다르 틸라크(Bal Gangadhar Tilak)가 선동죄로 6년형을 선고받았던 선례에 따라 간디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감형된다면 나보다 더 기뻐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샹칼랄 반케르는 징역 1년에 벌금 1000루피를 선고받았다. 간디는 판결 뒤 “판사님이 내릴 수 있는 가장 가벼운 벌을 내렸다고 생각한다”며 판사가 자신을 정중히 예우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간디의 전기를 쓴 인도 출신 저술가 요게시 차다(Yogeshi Chadha)는 ‘큰 재판’에서 들려준 간디의 진술에 대해 “‘농부 겸 직조공’이 잠시 과거의 직업인 법률가로 돌아갔다 온 셈이었다. 마치 그가 제국을 기소한 것 같았다. 판사는 법정을 떠나면서 초라하고 빈약한 허리옷을 입은 피고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고, 피고도 마주 절을 했다. 간디는 자비롭게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고 썼습니다(요게시 차다, <마하트마 간디 GANDHI> 471쪽).
"마치 그가 제국을 기소한 것 같았다"
간디는 2년 못 미치는 기간 동안 복역하고 1924년 2월 수술을 받기 위해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석방되자마자 민족회의에서는 힌두 진영과 무슬림 진영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갈라졌고, 유혈충돌이 뒤따랐습니다.
간디는 두 종교세력 간 폭력을 끝내기 위해 3주간의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1928년 간디는 민족회의의 지도자로 선출됐습니다. 본격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에 들어간 간디는 불복종의 표시로 200킬로미터를 행진했고, 이 시위로 6만 명 이상이 체포됐습니다. 간디는 다시 3년간 감옥에 보내졌습니다.
인도가 자치의 꿈을 이룬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였습니다. 하지만 1947-1948년 독립과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적인 이유로 갈라지면서 1차 카슈미르 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힌두 극단주의자에 암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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