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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크리켓 감독의 죽음

딸기21 2007. 3. 2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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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켓이라는 스포츠에 대해선 통 모르는데요, 영국 연방에 들어있거나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 아주 인기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영국과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4년마다 떠들썩하게 만들던 크리켓 월드컵이 이번엔 한 감독의 죽음으로 격랑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숨진 인물이 크리켓 세계에선 심벌이라 할 정도로 유명인사였던 것도 그렇지만 죽음을 둘러싼 과정이 심상치 않은데요. '스포츠 노마드(유목민)'로 세계를 돌아다녔던 화려한 인생 역정, 지휘를 맡았던 선수단의 불화와 예상치 못했던 패배, 성난 팬들의 공격, 예전 팀에서의 스캔들이 뒤섞여 소설같은 줄거리가 만들어진 것이죠.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밥 울머 감독


카리브해 호텔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크리켓 강국 파키스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밥 울머(58)가 숨진 것은 지난 18일. 영국계 인도인인 그는 이날 카리브해의 섬나라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 있는 호텔 방에서 의식을 잃은채 발견됐고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습니다.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파키스탄 팀은 그 이틀전 `2007 크리켓 월드컵'에서 첫 출전국인 아일랜드팀을 만나 3대0으로 참패를 했었습니다. 파키스탄 언론들은 울머가 "예상 밖 패배로 몹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며 상심한 나머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보도했었고요.


몇몇 언론들은 평생을 스타플레이어, 스타 감독으로서 영광 속에 살았던 울머가 패배의 충격과 파키스탄 팬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반면 울머의 아내와 가족들은 그가 자살했을리 없다면서 자메이카 당국에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습니다. 


23일 자메이카 경찰은 울머가 "손에 의한 압박으로 숨졌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교살당했다는 거죠. 경찰은 호텔방에 강제침입한 흔적이 없고 도난물품도 없는 것으로 보아 함께 방안에 있던 누군가가 그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경찰은 먼저 파키스탄 대표팀 선수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는군요. 파키스탄 지오(GEO)TV는 자메이카 경찰이 살인 용의자 1명을 체포했다고 보도했으나, 용의자의 국적이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AP통신은 파키스탄 대표팀 선수들이 부랴부랴 본국 정부에 `변호인 지원'을 요청했다고 보도, 팀내 갈등과 감독의 죽음 사이에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18일 젊은이들이 아일랜드에 패배한 크리켓 국가대표팀과 밥 울머 감독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AP


감독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파키스탄 대표팀 선수들



파키스탄 팬들의 분노와 여론의 뭇매

크리켓월드컵은 지난 13일부터 자메이카를 비롯한 서인도제도 8개국에서 열리고 있는데, 영국 호주 남아공 인도 파키스탄 등 16개국이 참가합니다. 국내에는 크리켓 인구가 거의 없지만 월드컵 시청자 수가 연인원 22억명에 이를 정도로 큰 행사라고 합니다. 영연방 혹은 옛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선 축구 월드컵만큼 인기있는 행사이고 LG전자도 이번 대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은 크리켓을 국기(國技)로 하고 있고 크리켓 월드컵에 온국민이 광분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이 패배하자 이슬라마바드와 카라치에서는 울머를 비난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언론들도 울머와 대표팀의 불화설을 제기하며 뭇매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울머가 급사하자 분위기는 `애도'로 돌변했습니다. 그가 뛰었거나 감독으로 있었던 팀들은 물론, 유명 선수들이 앞다퉈 애도를 표하면서 여론의 `희생양 만들기'를 역비난했다고 하고요. BBC방송을 비롯해 영연방 각국 주요 언론들은 연일 울머의 죽음과 관련된 뒷얘기를 톱기사로 다뤘습니다.

화려한 인생, 비참한 최후

울머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州)의 칸푸르에서 태어났습니다. 크리켓 선수인 아버지가 뛰던 그라운드 바로 옆 병원에서 출생, 날때부터 크리켓과 인연을 맺었고 만 3살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배트를 잡았다고 합니다. 12살때 영국으로 이주,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비롯해 여러 프로팀에서 뛰다가 1984년 은퇴하고 이듬해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참 여러군데 옮겨다녔는데요.

영국 워윅셔 팀 감독 등을 거쳐 1994년부터 5년 동안 남아공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그가 감독을 맡던 시절 남아공 대표팀에서 몇몇 선수들이 돈을 받고 승부 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들통나 파문이 일었지만 울머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울머는 국제크리켓협회 이사를 거쳐 2005년 파키스탄팀 감독이 됐습니다.

크리켓 하나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누볐던 울머의 인생은 카리브해에서 끝났습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분노한 파키스탄 팬들에 의한 것인지, 혹은 승부조작 스캔들이나 크리켓 순위 도박과 관련된 자들의 소행인지를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때를 풍미한 스타의 죽음은 영광 이면에 숨겨진 폭력과 투기, 부패 스캔들이 난무하는 스포츠의 그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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