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때린 사람이 나빠요.

딸기21 2007. 3. 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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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놈이 바보지”

“그러니까 왕따가 되는 거 아냐” 
“일어나, 싸워! 힘을 기르는 거야!”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간 게 아니었다니까” 
“미국보다 후세인이 더 나쁜데 미국이 이라크 공격한 걸 왜 욕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일상생활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요. 세 번째,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서 (특히 청소년물에서) 많이 보이는 대사랍니다. 

네 번째, 오늘 일본 정부가 각료회의에서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내놓은 의회 답변서입니다. 다섯 번째는 프랑스의 지식인이라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아메리칸 버티고’라는 현기증 나는 책에 써놓은 글이고요.

섯가지 주장엔 약간씩의 차이는 있습니다. 적용될 수 있는 상황도 조금씩은 다르고요. 하지만 '가해자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선 똑같습니다. 

어떨까요.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문제’랍니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건 정말 싫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던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 때 ‘성교육’ 이라면서 어느 여선생님이 여학생들만 교실에 모아놓고 얘기했던 것이 제게 ‘피해자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을 씌운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기 통닭이 있어. 지나가던 사람이 먹었어. 그럼 그 사람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여자들은 통닭 같은 거야, 자기가 조심해야 해” 라고 했던 선생님의 그 말은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통닭 아니거든요. 모든 여자들, 모든 남자들, 모든 어린이들이 통닭이 아닌 것처럼. 

뭔가 참 잘 잊어버리고, 또 잘 잃어버리는 편이어서요. 언젠가 잔뜩 도둑맞고 풀죽어 있을 때 선배가 했던 이야기, “아무나 도둑맞냐, 너한테 문제가 있으니까 도둑맞지.” 이런 말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그러니까 저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아무나 나와서 ‘자유발언’을 하게 하는, 그러나 내용은 자유이되 한명씩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는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바로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도둑질한 사람이 나쁜데 왜 피해자를 탓하느냐고, 물건을 찾아주고 훔친 사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왜 당한 사람을 욕하느냐고요. 

① 사람들은 항상 강자의 편에 붙어 ‘약한 사람’을 탓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②당한 사람이 억울해 해봤자 법이나 제도는 강자의 편이니 얻을 것이 없다는 체념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 ③인간은 원래 악하니 피해를 입지 않게끔 스스로 방어하는 것은 개인의 의무이므로. 

어느 쪽일까요. 세 가지 다, 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당하는 사람이 문제야! 

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일본 드라마나 만화엔 그런 논리가 참 많아요. 이지메하는 아이들을 야단치는 대신 피해 학생에게 “너도 힘을 길러서 싸워 이겨!” 하는 선생(고쿠센의 귀여운 여선생이 동그란 눈을 하고 이렇게 말하지요) 같은 그런 종류 말입니다. 

일본이 한국인, 대만인, 네덜란드인 등등을 군 위안부로 끌고 가서 말로 할 수 없는 인권유린을 해놓고 언제 한번 진실한 사과, 속 시원한 이야기 한번 하는 적이 없는데요. 어디에선가 읽은 내용인데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 일본 정부는 자기네 여성들을 ‘미군 위안부’로 내보내려고 준비를 했었다더군요. ‘진 놈은 당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나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힘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람들에게 식민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니겠지요. 

일본 정부가 16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993년에 고노 요헤이라는 사람(당시 관방장관)이 그나마 ‘사과와 반성’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걸 ‘고노 담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베 신조 총리가 고노 담화를 부인하듯 “강제로 끌고갔다는 증거는 없더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망언 파동’이 다시 불거져 나왔는데, 거기 대해서 일본 사민당 의원이 질의를 했대요. 그랬더니 정부가 각료회의에서 “고노담화 때 나온 자료들 다 둘러봐도 일본 군인이나 관리들이 위안부 끌고갔다는 ‘속칭 강제연행’ 증거는 없더라”라는 답변서를 내놓은 겁니다. 

고노 당시 관방장관이 담화 발표 전에 "정부가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연행했다는 문서는 없었지만 본인 의사에 반해 모집한 것을 `강제성'이라 정의한다면 그런 사례는 많았다"는 발언을 했었는데, 이번 각의 답변은 그 중에서 `문서는 없었지만'이라는 문구만 뽑아낸 것인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가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것에는 변함없다”라고 하니, 각료회의가 무슨 ‘말장난 연구모임’도 아니고 말입니다. 

강제로 끌고 간 게 아닌데 자기 의사에 반해 끌려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그 끔찍한 곳에 발을 딛게 된 걸까요? 항상 이런 일 보면서 내 문제, 그리고 ‘우리나라 문제’를 생각하게 돼요. 저같은 경우 우리나라 우리민족 하는 말이 참 싫은데, 간간이 그런 생각 할 때를 돌아보면 대개 ‘우리나라가 저지른 나쁜 짓’을 생각할 때인 것 같습니다. 

먼저 ‘내 문제’부터 보자면, 피해자를 욕하면 안돼! 라고 하면서도 나 자신 피해자를 욕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냉정하게 따져 봐야지,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면밀한 분석이 필요해, 어쩌구 하는 논리를 끌어대면서 피해자 탓을 은근히 해대는 그런 짓. 

우리나라의 행태로 보자면, 우리가 당한 것에는 이를 갈면서도 또 우리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못난 놈’(월남 놈들 얼마나 못났으면 베트콩들한테 나라를 뺏기고) 탓을 하는 것, 너무 많아 꼽기도 힘들 것 같네요. 나도 쯧쯧, 세상도 쯧쯧. 낮에 앙리 레비가 오만 잘난 척 다해놓고 결국엔 전쟁예찬 하는 걸 보고 속이 좀 뒤틀렸는데, 저녁에 야근하면서 일본 얘기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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