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블레어의 굴욕

딸기21 2006. 12. 1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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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상 최연소 총리, 노동당 최다 임기 총리, 3연속 승리를 이끈 최초의 노동당 당수.

영국 정치사에서 여러 신기록을 갖고 있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번엔 다소 치욕적인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현직 총리로서 경찰 수사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 것. BBC방송, 가디언 등 영국 언론들은 노동당이 기업인들에게 돈을 받고 상원의원 자리를 팔았던 사실이 폭로되면서 블레어 총리가 14일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블레어 총리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집무실에서 2시간 동안 경찰관 2명의 조사를 받았다. 변호사는 대동하지 않았으며, 총리 혼자서 조사에 응했다고 총리실 측은 밝혔다.

경찰은 주로 지난해 작위 수여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노동당 지도부와 총리가 어떤 협의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것인지를 물었고, 블레어 총리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에서 현직 총리가 형사사건에 연루돼 경찰 수사를 받은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BBC방송은 전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월 노동당이 몇몇 기업가와 자산가들에게 돈을 빌리는 대가로 기사 작위를 팔았다는 폭로가 나오면서부터.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블레어 총리는 지난해 총선 직전 병원장과 부동산업자, 관료 등 돈 많은 지지자 12명에게서 총 1400만 파운드(약 260억원)를 빌려 선거자금으로 썼다. 돈을 빌려준 이들은 뒤에 작위를 받았고, 귀족으로 등록되면서 종신 명예직인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돈 받고 의원직을 판 꼴이 된 것.

여론에 밀린 총리는 뒷거래 상대였던 12명의 이름을 공개하고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대출을 받은 것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블레어 총리는 집무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는 `굴욕'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경찰청은 다음달 `작위 뒷거래 사건' 수사결과 발표할 예정인데, 블레어 총리를 상대로 추가조사를 벌일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블레어총리는 조사를 받은 뒤 곧바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유럽연합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1997년 `제3의 길'을 내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한 블레어 총리는 내년이면 집권 11년째를 맞는다. 그러나 젊고 강력한 신좌파 지도자로 떠올랐던 블레어 총리의 집권 이후 정치적 행보는 갈짓자를 그리고 있다. 친미 우편향 노선 때문에 `미국의 푸들'로 불리더니 당의 천덕꾸러기로 전락, 급기야 내부 반발로 물러나야 할 처지가 됐다. 본인은 내년 상반기에 퇴임하겠다고 했지만 떠날 시기를 못 박지 않아 자리에 연연한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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