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됐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의 지난 2분기 석유생산량은 1일 평균 963만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914만 배럴을 웃돌았다. 러시아 언론들은 `부동의 1위'였던 사우디를 제쳤다는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러시아는 고유가 속 오일달러 붐에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러시아산 석유가 세계 에너지시장의 판도를 바꾸기는 힘들 것이며 오히려 러시아 경제에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 달러 붐에 `빚잔치'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에 이르는 고공행진을 벌이면서 러시아는 쏟아져들어온 오일달러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최근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부채 237억 달러를 조기 상환했다. 이 부채에는 옛 소련시절의 것들도 포함돼 있다. 작년 2억3000만배럴의 석유를 수출한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현재 2500억 달러로, 세계 4위다. 러시아는 빚 갚기에 그치지 않고 파리클럽 가입 의사까지 밝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의 전환까지 시사했다. 고질적인 에너지 수급불안 외에 최근 들어서는 이란 핵문제로 인한 중동 정세 불안과 미국 알래스카 송유관 누출에 따른 유럽 에너지기업들의 고전 등까지 겹쳐 러시아가 어부지리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잔치를 벌이기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는 전체 수출의 35%, 세입의 52%를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액으로 메우고 있다. 따라서 유가에 변동이 있을 경우 국가재정도 요동을 칠 우려가 있다. 또 러시아가 1990년대 이래 석유를 너무 많이 파내 유전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석유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경우 이미 석유생산의 피크(정점)를 지나고 있으며, 여태까지 파낸 석유보다 남아있는 매장량이 더 적은 상태로 돌아서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석유로 번 돈을 인프라 확충과 산업 전반의 활성화에 효과적으로 투자하지 않는다면 과거 오일달러로 흥청거렸던 중동 산유국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 증산할까
OPEC에 따르면 러시아의 석유생산량은 2002년 하루평균 762만 배럴에서 이듬해 846만 배럴, 2004년 919만배럴, 지난해 944만 배럴 등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올해에는 965만배럴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석유생산량이 늘어난 `기술적인' 이유는 석유산업 현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옛 소련 붕괴 뒤 민영화했던 에너지기업들을 최근 다시 국유화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 산유량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쿼터(생산량 할당)제도에 있다. 사우디가 OPEC의 쿼터에 묶여있는 반면 러시아는 쿼터가 정해져 있지 않다. 러시아 석유전문가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OPEC을 이끌고 있는 사우디는 언제라도산유량을 늘릴 수 있지만 유가 밴드(유가 적정 가격대)를 유지하기 위해 쿼터를 정해놓고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다. 매장량으로 보면 사우디가 2617억 배럴로 2위 캐나다(1789억 배럴)와 3위 이란(1308억 배럴)보다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러시아의 확인된 석유매장량은 700억 배럴에도 못 미친다.
사우디 측은 산유국 1위 랭킹을 빼앗긴 것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다만 지나친 고유가 현상에 누차 우려를 표명해온 압둘라 국왕이 지난 26일 유가를 더 낮춰야 한다는 뜻을 시사, 증산을 결정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압둘라 국왕은 "우리가 고유가로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우디의 정책은 좀더 누그러진 수준에서 가격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미국, "에너지판도 변화 없다"
러시아는 근래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베네수엘라 등 `반미' 국가들과 친밀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 석유생산량의 4분의1 가량을 소비하는 미국은 러시아 산유량이 늘어난 것에 대해 `영향력 없다'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ABC방송은 27일 "러시아가 세계 1위 산유국이 됨으로써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도 긴장감이 돌 수 있지만 러시아에의 석유 종속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세계 에너지 시장에 미칠 영향도 거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석유전문가들도 수송 인프라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미국의 석유수입선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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