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나를 위해 짠 손, 남을 위해 큰 손- 이케아 창업주 잉그바르 캄프라드

딸기21 2006. 3. 2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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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으로는 절약, 한손으로는 자선.


스웨덴의 가구·생활용품 업체 이케아(IKEA)의 창업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80·사진) 회장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이지만 매일 전철로 출퇴근한다. 주말에 나들이를 할 때엔 15년 된 구닥다리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비즈니스 여행을 할 때에도 항공기 좌석은 언제나 이코노미석. 호텔에 묵을 때에는 객실 안의 바(Bar) 요금이 아깝다고 주변 편의점에서 물을 사다 마신다. 그러나 자린고비 노(老) 기업인은 유니세프의 최대 후원자 중 한 명이고, 이케아는 서유럽에서도 사회 기여가 많은 기업으로 손꼽힌다.

오는 30일로 여든 살이 되는 캄프라드 회장이 26일 스위스 SBC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 평생 몸에 밴 검약을 털어놨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뽑은 세계 부자 4위에 이름을 올린 그는 280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나더러 인색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 회사의 경영 원칙을 따르는 것뿐이다."

캄프라드 회장은 자신의 상징처럼 된 낡은 볼보승용차에 대해 묻자 "아직 15년 밖에 안 된 새 차"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스위스 로잔 근처에 있는 캄프라드 회장의 자택은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가구는 모두 이케아 제품. 인터뷰가 있기 바로 며칠 전에도 그는 로잔의 한 예술학교에 50만 스위스프랑(약 3억7000만원)을 기부했다.

기부를 할 때에는 큰 손이지만, 회사 살림에는 더없이 짠 손이다.
"이케아 그룹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돈을 버는 만큼 아끼는 것도 중요하다".
이케아 직원들은 이면지를 재활용하는 것이 생활화돼 있다. 이에 대해 캄프라드 회장은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이케아는 캄프라드 가문 사람들이 경영하는 비공개 기업으로 1943년 설립됐다. 전 세계 32개국 202개 매장에 종업원 9만명, 연간 매출액이 120억 달러(약11조7000억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가구판매업체다. 이케아(IKEA)라는 기업 이름은 캄프라드 회장의 이름(Ingvar Kamprad)과 가족농장인 엘름타르드(Elmtaryd) 농장, 고향마을 아군나이드(Aggunaryd)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케아의 주력상품은 소비자들이 직접 조립하는 DIY 제품을 비롯한 중저가 가구. 유럽에서는 이 회사의 카탈로그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라 불릴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다.


절약과 자선을 모토로 하는 캄프라드 회장은 `타고난 장사꾼'이다. 그는 5살 때부터 집 앞마당에 `가게'를 차려놓고 시계나 펜, 크리스마스 카드 따위 잡동사니를 팔았다. 그는 "마당에 심을 화초 씨를 팔아서 자전거를 산 것이 인생에서 거둔 첫번째 성공이었다"고 회고했다.
조금 자라서는 스톡홀롬에서 성냥을 사다가 동네에 팔았다. 17살에 학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자 아버지가 약간의 `상금'을 주셨다. 그는 그 돈으로 이케아를 창업했다. 처음엔 지갑, 시계, 보석류, 스타킹 따위를 파는 잡화 공장 겸 소매상이었지만 1947년부터는 가구사업에 뛰어들었다. 1951년 그는 가구만 남기고 다른 제품에선 손을 뗐다. 1953년 첫 전시장이 문을 열었는데, 사기 전에 소비자들이 직접 가구를 만져볼 수 있게 한 쇼룸은 큰 히트를 쳤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1950년대 주택 100만호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건설 붐은 가구 판매를 늘릴 호기였다. 아이디어는 한 직원에게서 나왔다. 가구를 분해해 납작한 상자 모양으로 포장, 고객들이 승용차에 싣고 가 집에서 조립할 수 있게 한 것. 창고 비용과 운송비용이 줄어든 덕에 제품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었고, 매장 공간도 절약됐다.
지금은 반(半) 조립식 가구가 할인점마다 넘쳐나지만 1960년대에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케아의 가구들은 지금도 `포장할 때 크기를 최소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디자인된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도 후회스런 과거는 있다. 캄프라드 회장은 1994년 직원들에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제목으로 긴 편지를 보내며 10대 시절 네오나치 그룹에 들어간 일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다.
그는 1998년 출간된 자서전에서도 네오나치 활동에 관해 상세히 털어놨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업을 키워온 캄프라드 회장은 "여든 살이 됐다고 해서 걱정할 일은 없다"며 "할 일이 너무 많아 죽을 시간이 없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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