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의 만류와 국내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15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연미복 차림으로 격식을 갖추고 야스쿠니 신사 본전을 방문, 15분간 참배하면서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라 서명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2000년 집권 때부터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지만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15일 참배’는 피해왔다. 그러나 ‘퇴임 전 마지막 찬스’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참배를 강행했다. 일본 총리가 종전기념일인 8월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총리 이래 21년만이다.
요미우리신문은 고이즈미 총리가 6년 만에 ‘8·15 참배 공약’을 지켜낸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신사 회랑을 거닐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 본인의 엇나간 ‘자부심’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도 이날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찬반 양론이 부딪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이같은 행동은 차기 총리 자리를 거의 굳힌 아베 관방장관에게도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정치권 내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극비 여론조사 뒤 ‘여론 무시-참배 강행’
일본 정부가 고이즈미 총리의 15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앞두고 2차례 극비리에 여론조사를 실시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했다.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가늠하기 위한 이 조사에서는 질문은 ‘총리가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단 하나의 문항 뿐이었다.
첫 번째 조사 결과는 찬성이 반대를 웃돌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는 지난달 중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더 한차례 조사를 하는 편이 좋겠다’며 재조사를 지시했다. 고이즈미가 첫 번째 조사결과를 보고받기 직전인 지난달 20일 쇼와(昭和)천황이 A급 전범의 야스쿠니 합사에 불쾌감을 표시했었다는 도미다 아사히코(富田朝彦) 전 궁내청장관의 메모가 나오면서 일본 내 여론은 야스쿠니 참배 반대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이를 계기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신중론이 퍼졌다.
고이즈미 총리는 천황의 심경을 전한 이른바 ‘도미다 메모’가 여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예상대로 이달초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반대여론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여론을 따르기보다는 평소처럼 ‘적극적인 행동으로 설득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고이즈미를 보통 ‘포퓰리스트’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얘는 반포퓰리스트, 확신범이다)
야스쿠니신사는 15일 하루 참배자가 약 25만8000명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작년 같은날 참배인원보다 5만3000명이나 늘어난 수치라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신사 측은 그러면서 총리의 신사참배를 줄곧 반대해온 아사히신문의 취재를 제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치권 양분
초당파 국회의원들이 만든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들은 15일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참배에는 이 모임의 회장인 가와라 쓰토무(瓦力) 전 방위청장관과 오쓰지 히데히사(尾?秀久) 전 후생노동상 등 자민·민주·국민신당 의원 56명이 참가했다.
이와 별도로 야스쿠니신사 내에서 열린 ‘전몰자추도중앙국민집회’에는 ‘고이즈미 칠드런’으로 불리는 자민당 초선의원들이 만든 ‘전통과 창조모임’ 소속 의원 6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면서 치하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총리도 고이즈미 총리의 행동을 “잘 한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공산당, 일본신당 등 야당 지도부 인사들도 일제히 고이즈미 총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거나 회견을 가졌다. 연립여당의 한 축인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대표는 물론이고, 자민당 내 유력인사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간사장 등도 참배를 비판했다.
주요 언론·지식인들은 ‘헌법 위반’ 비판
아사히신문은 “야스쿠니 참배,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는 제하의 16일자 사설에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우려와 반발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반대 여론까지 무시한 야스쿠니 참배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일본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도쿄대 교수는 일본교육회관 등 도쿄 내 2곳에서 이날 연달아 강연을 하면서 야스쿠니 문제에서는 총리의 참배와 A급 전범 합사만이 초점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와 관련해 ‘공양이라고 하면서 공용차를 타고 내각총리대신이라 서명하며 참배를 한 것은 사적행위일 수가 없으며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 히라야마 세고(平山正剛) 회장도 “국정 최고책임자인 총리가 종교법인인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한 것은 국가의 종교활동을 금지한 헌법 20조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일본 법원들의 판결은 엇갈리고 있는 상태다.
경제단체들, “다음 총리는 삼가달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와 관련, 일본 재계는 간접적으로 우려를 표현하며 차기 총리에 ‘신중한 태도’를 주문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회장을 맡고 있는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福士夫) 캐논 회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대해 “개인의 판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며 직접적인 코멘트를 피했다.
그러나 지난 5월 고이즈미 총리에게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었던 경제동우회 기타시로 가쿠타로(北城恪太郞) 대표간사는 “다음번 총리는 우리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과의 상호이해와 신뢰를 구축할 수 있도록 외교정책을 입안, 실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 이번 참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차기 총리의 참배 중단을 다시 촉구했다. 일본상공회의소측도 “이웃나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차기 총리의 과제”라고 지적하며 같은 입장을 밝혔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