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유럽 최대 첨단기술 기업 ASML 최고경영자 크리스토퍼 푸케가 소셜미디어 ‘링크드인’에 글을 올렸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유럽 기술 주권’을 강화한다며 내놓은 제안들을 환영한다면서도, 유럽연합의 ‘전략 프로젝트’들은 “산업계의 필요에 맞춰야”하며 기업이 주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적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6월 3일 반도체,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역량을 강화하는 ‘유럽 기술 주권 패키지’를 발표했다. 유럽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원해주며 첨단기술 산업을 키울 계획인데 그 프로젝트들에 유럽을 대표하는 첨단기술 기업이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미국은 첨단기술을, 중국은 공급망을 틀어쥐고 세계를 무대로 경쟁을 벌인다. 유럽은 안보에선 미국, 경제에선 중국을 빼놓고 홀로서기가 불가능해진 지 오래다. 그래서 걱정하기 시작한 것 또한 오래됐다. 10년 전인 2016년 6월 유럽연합은 ‘외교안보 글로벌전략’에 전략적 자율성을 명시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유럽의 ‘독립’은 2020년 3월 유럽위원회가 채택한 ‘유럽을 위한 새로운 산업 전략’이라는 문서에 요약돼 있다. 녹색전환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두 가지 전환을 돕기 위해 산업 정책의 토대를 만드는 것, 핵심원자재를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것. 생산·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전략물자를 쟁이고, 유럽 안에서 생산과 투자가 늘어나도록 하기 위한 조치들이 ‘복원력’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네 가지 주요 행동 수칙을 정했다. 경제적 왜곡을 없애는 것, 경제적인 강요에서 벗어나는 것, 유럽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핵심 인프라와 공급망의 복원력을 높이는 것. 첫번째 것은 중국을, 두번째는 미국을 겨냥했고 세번째는 국제 규범을 주도하고픈 유럽의 의지를 드러냈다.
네 번째는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2023년 유럽연합이 만든 핵심원자재법(CRMA)은 녹색 전환, 디지털화, 방위산업과 우주산업에 꼭 필요한 원자재 가운데 미-중 경쟁이 더 심해지면 구하기 어려워질 수 있는 17가지를 지목했다. 이 원자재들은 2030년까지 유럽 밖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는 비율이 65%를 넘지 않게 하는 걸 목표로 정했다.
2014년 만들었으나 실제론 가동되지 않던 ‘유럽 공동이익 중요 프로젝트(IPCEI)’를 활성화하고, ‘산업 동맹’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로 했다. ‘프로세서 및 반도체 기술 동맹’, ‘산업 데이터·엣지·클라우드 동맹’, ‘우주 발사체 동맹’, ‘무탄소 항공 동맹’ 등이 유럽이 앞으로 키워나갈 산업분야로 정해졌다. 반도체법을 만들고 ‘유럽을 위한 칩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으로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세계 반도체 생산 용량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10%에도 못 미치는데,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반도체 생산액을 보면 2023년 기준 유럽연합 회원국들 가운데 이탈리아가 33.5%로 가장 크고, 프랑스 30.9%, 독일 21.7% 순이다. 그러나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네덜란드다. 잘 알려진 대로 네덜란드는 칩 장비 제조, 칩 설계, 패키징이라는 세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다. 각 분야에서 세계 선두인 ASML, ASM인터내셔널, BESI 같은 기업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칩의 85%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를 이용해 설계·개발·생산된다.
그 덕에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해 3월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과 유럽 반도체 연합을 만들었다. 유럽 안에서는 나름 기술 있는 나라들이 모여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유럽의 위상을 높이겠다며 뭉친 것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목표가 유럽연합의 목표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외려 네덜란드는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기술주권 논의에 비판적일 때가 맡았다. 네덜란드의 관심은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지키는 것이다. ASML 수장이 유럽연합의 움직임에 경계성 발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럽연합의 간섭을 꺼리는 듯한 겉모습 뒤에는 어찌 못할 유럽의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푸케 최고경영자는 유럽연합의 계획이 “산업의 요구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산업계는 중국과 관계를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다. 첨단기술 공급망, 핵심 원자재를 중국이 꽉 잡고 있는데 어떻게 의존도를 낮추라는 말인가. 그게 근본적인 문제다.
지난 5월 에어버스, ASML, 에릭슨, 미스트랄, 노키아, SAP, 지멘스가 ‘유럽 기술혁신기업(European Tech Creators)’이라는 연합을 만들고 공동 행동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산업분야별로 유럽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함께 목소리를 낸 것이다. 유럽의 ‘디지털 주권’과 혁신기술 정책을 환영한다면서도 이들은 단서를 달았다. “유럽 파트너십을 우선시하지만 역외의 가장 우수한 해법을 배제하지 않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견지한다”고 했다. 유럽 밖에서 더 경쟁력 있는 방식을 찾을 수 있다면 기업들로선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유럽연합 상공회의소는 중국에 진출한 유럽 기업 약 300곳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미국이 윽박지르고 유럽연합이 경계를 해도 중국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 70% 가까이는 중국 내 사업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리고 있다고 답했다. 중국 밖으로 공장을 빼내거나 대체 생산기지를 만들고 있다는 응답은 7%에 그쳤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비용이 덜 들어서다. 낮은 인건비? 중국도 이제는 여러 산업분야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다. 그래서 자동화에 매달린다. 설문에 응한 컨설팅회사 관계자는 “원래도 인건비가 낮았지만 이제는 자동화 때문에 그마저도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유럽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생산이나 시장이 아니라 공급망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전기차, 배터리, 가전 등에서 중국을 기반으로 한 공급망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한 유럽 물류회사 간부는 미국 CNBC에 출연해 “그러지 않으면 중국 기업들이 그 공급망을 다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웬만한 산업분야에는, 중국 기업이든 다른 나라 기업이든, 중국과 연결된 경쟁자가 꼭 있다. 그러니 중국 공급망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미국은 중국과 관계를 끊으라며 압박하고, 유럽 스스로도 ‘독립’할 필요를 느낀다. 중국으로부터도, 그리고 미국의 압력으로부터도. 하지만 그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실 글로벌 공급망에서 특정 국가를, 그것도 엄청난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를 완전히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결별도, 완전한 독립도 불가능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 휘둘리고 압력과 횡포에 당하는 게 싫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 그야말로 세계의 고민거리다.
- 참고자료
“ASML CEO says EU Commission should not try to direct 'strategic projects'” Reuters, June 5, 2026 https://www.reuters.com/business/asml-ceo-says-eu-commission-should-not-try-direct-strategic-projects-2026-06-05/
Charles Michel, European Council Speech, European Council, 28 September 2020 https://www.consilium.europa.eu/en/press/press-releases/2020/09/28/l-autonomie-strategique-europeenne-est-l-objectif-de-notre-generation-discours-du-president-charles-michel-au-groupe-de-reflexion-bruegel/
REGULATION (EU) 2023/2675 OF THE EUROPEAN PARLIAMENT AND OF THE COUNCIL (2023/2675)
https://eur-lex.europa.eu/legal-content/EN/TXT/?uri=OJ:L_202302675
EUROPEAN COMMISSION, A New Industrial Strategy for Europe, 10.3.2020 COM(2020) 102 https://eur-lex.europa.eu/legal-content/EN/TXT/?uri=celex:52020DC0102
The EU chips industry, European Council https://www.consilium.europa.eu/en/policies/eu-chips-industry/#act
Report Linker, “European Sold Production of Semiconductors Share by Country (Euros) 2023” https://www.reportlinker.com/dataset/3c885fca34fa9ded31c2040b5c0bc3ec0cdbaab9
Holland High Tech, “Semiconductors from the Netherlands: building blocks of the future.” (2025.9.18) https://www.hollandhightech.nl/en/news-calendar/news/semiconductors-from-the-netherlands-building-blocks-of-the-future
Voortgang halfgeleiderindustrie in een veranderende geopolitieke omgeving, Brief regering (2025.5.27) https://www.tweedekamer.nl/kamerstukken/brieven_regering/detail?id=2025D24392&did=2025D24392
"Building resilience: how Airbus supports European digital sovereignty and innovation" Airbus
"European companies double down on China manufacturing despite EU de-risking push" CNBC, MAY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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