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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총리 교체? 브렉시트 ‘부족 정치’에 갇힌 영국

딸기21 2026. 5. 15. 12:20

영국이 또 시끄럽다. 키어 스타머 총리를 향해 최근 내각과 집권 노동당 안에서 사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7일 치러진 지방선거였다. 스타머 총리의 시험대로 여겨져왔는데 참패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지방의회 의석 5000여석 중 1500석 정도를 잃음. 극우인사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개혁(Reform)UK’가 득표율 30%를 기록하며 노동당이 잃은 의석 수의 거의 전부를 가져갔다. 노동당은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도 처참한 성적을 거뒀다.

노동당 안에서는 스타머 총리의 선거 경쟁력에 대한 불만을 넘어, 사실상 공개적인 지도부 분열로 번진 상태다. 몇몇 장관들은 공개적으로 사퇴를 요구했다. 차기 지도부 경쟁이 벌써 시작됐다.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는 사람은 앤디 번햄이라는 인물인데 토니 블레어 정권 시절이던 2006년 처음 입각해 여러 각료직을 맡았다. 당내 온건 좌파로 분류되는데, 2017년부터 맨체스터 광역시장을 맡아 3연임째다. 차기 총리를 염두에 두고 올해 보궐선거에서 하원으로 복귀할까 했는데, 노동당 내부에서 반대해 못 나갔다. 그러고 나서 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으니 번햄 쪽은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로이터



문제는 현직 광역시장이라는 것이다. 총리는 의원 중에서 뽑기 때문에, 번햄은 먼저 시장직에서 사퇴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노동당 의원 한 명이 사퇴하고, 보궐선거를 해서 번햄이 의회에 복귀하는 수순을 밟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번햄 쪽은 ‘질서 있는 퇴진’을 주장한다. 반면 당내 우파, 옛 블레어계는 스타머 조기 퇴진을 주장한다. 번햄이 출마하지 못하면 당내 좌파, 노동진영 쪽에서 총리 후보를 내놓을 수도 있지만 국민 여론과는 괴리가 클 게 뻔하다.

스타머 내각은 진작부터 악재에 시달려왔다. 1990년대에 블레어와 함께 노동당을 일신한 쟁쟁한 정치인이었던 피터 만델슨이 스타머 집권 뒤 주미 대사로 임명됐는데 미국 제프리 엡스타인 성학대 사건에 연루돼 작년 9월 물러났다. 그 뒤 스타머 측근들에게도 엡스타인 파일 불똥이 튀어서 참모들이 줄줄이 짐을 쌌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집권 자체가 스타머 내각엔 악재였다. 미국의 관세전쟁과 일방주의 외교정책으로 양국 간 균열이 계속 드러났고, 중동 전쟁에 대한 이견도 두드러졌다. 경제에서도 호재가 없었다. 스타머 정부는 ‘안정, 투자, 개혁’이라는 전략을 내놨으나 투자와 개혁을 할 여유도 없었고 가시적인 성과도 없었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물가는 올라갔고 재정 적자는 늘어난 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채 금리가 올라가, 작년 증세로 늘어난 세수 절반을 이자로 날려보낼 판이다. 영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노동당의 공포는 두 가지다. 첫째, 스타머 체제로 계속 가다가 개혁UK 같은 우파 포퓰리즘 정당에 지지층을 더 빼앗기는 것. 두번째, 보수당처럼 계속 총리만 바뀌는 ‘총리 소모전’으로 가는 것.

10년 새 영국 총리는 하도 자주 바뀌어서 이름조차 외우기 어려울 정도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테리사 메이가 3년간 재임하다가, 유럽연합(EU)과의 탈퇴 협상안이 의회에서 계속 부결되자 물러났다. 2019년부터 집권한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19 부실 대응에 방역조치 위반 스캔들, 이른바 ‘파티 게이트’로 역시 3년만에 물러났다. 이이서 2022년 9월 취임한 리즈 트러스는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였다. 달랑 45일 집권하면서 ‘미니 재정’이라며 세금을 대폭 깎아 재정난을 부추겼다. 그후 리시 수낙이 2년 가까이 총리직에 있다가 총선에 져서 스타머에게 2024년 7월 정권을 넘겼다. 노동당이 14년만에 겨우 집권한 것이었는데 2년이 안 돼 또 총리 교체설이 돈다.

영국 정치의 불안정은 단순히 ‘총리가 자주 바뀐다’ 수준이 아니라, 브렉시트 이후 영국 국가 운영의 기본 합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학자들이 많다. 양당 구도를 근간으로 한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이다. 보수당은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반면 노동당은 복지를 중시하고 친EU 성향이 조금 더 강하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둘 다 큰 틀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통한 안보, 금융 중심의 경제, EU와의 실용적 협력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그 안에서 정책 논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브렉시트 찬성이냐 반대냐’가 모든 의제를 압도해버렸다. 양당 싸움이 아니었다. 노동당 내부에서도, 보수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로 분열이 일어났다. 국가안보, 경제정책, 외교전략 등 미래를 위한 논의는 사라졌다.

미국 학자 에이미 추아는 인종이나 민족이나 종교 등 정체성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갈리는 ‘정치적 부족주의’에 주목하며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진단한 바 있다. 『트라이벌 폴리틱스: 브렉시트가 영국을 어떻게 분열시켰는가』라는 책을 쓴 런던정경대(LSE) 사라 호볼트 교수 등은 브렉시트가 하나의 사건에 그친 게 아니라, 이후 10년 동안 영국 정치와 사회를 재편했다고 진단한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리브(Leave)’ 부족과 ‘리메인(Remain)’ 부족, 즉 탈퇴족과 잔류족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정치적 부족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에 대한 견해, 즉 ‘브렉시트 정체성’이 정당 정체성보다도 앞서게 됐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됐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 윤석열 쿠데타 이후의 한국에서 나타난 양상처럼 특정 사건에 대한 해석이 곧 정체성이 된다. 호볼트는 이를 ‘이슈 기반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계급이나 종교 같은 전통적인 기준이 아니라 어떤 이슈에 대한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물론 모든 사건이 다 새로운 정체성이나 부족주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호볼트는 중요한 이슈를 놓고 사회가 거의 반으로 갈라지는 식으로 이슈의 폭발력(issue contestation)이 클 때, 투표나 시위 등으로 유권자들이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될 때(issue expression), 기존 정당들이 분열되거나 무력해지면서 정치적 논쟁이 정당 정치에 흡수되지 못한 채 독립된 이슈로 고착화될 때(issue alignment)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브렉시트 뒤 아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탈퇴하자던 쪽에서는 쪽에서는 규제 완화와 성장, 독자적인 교역을 통한 이득을 기대했다. 현실은 달랐다. 성장은 정체됐고 미래 동력은 안 보이고 투자는 줄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선들 세금은 올리기 어렵고, 보건의료 등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지고, 이민자에 대한 반감은 계속된다. 보수당이건 노동당이건 높은 지지 속에 정국을 주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핵심 딜레마는 결국 브렉시트다. 경제를 살리려면 EU와 더 가까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브렉시트 지지층이 폭발한다. 양당 모두 내부 분열이 심한 상황에서 의원내각제라는 정치 시스템의 특성 상, 집권당 내부의 반란만으로도 총리가 교체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이 더 심해진다.

전통적인 좌우 정치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양당 구조, 좌우 혹은 진보-보수 대립은 세계 어디서나 약화되는 추세다. 영국이 다시 EU로 돌아갈 가능성도 별로 없다. 이민자와 다문화 정책을 공격하는 ‘문화 전쟁’은 더 심해질 공산이 크다.기존 정당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더라도 현저히 약화될 수 있다. 보수당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자유시장주의에 반이민 포퓰리즘 색깔이 섞이면서 혼란을 거듭했고, 총리가 줄줄이 바뀌며 정치적 권위가 무너졌다. 노동당도 해결책을 못 내놨다. 스타머는 중도화, 시장 친화, 유럽과의 관계 복원, 재정 안정을 외쳤지만 반EU와 친EU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엉거주춤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혁UK’가 부상했다. 패러지가 극우 영국독립당(UKIP)에서 나와 2018년 세운 이 정당은 반이민과 감세를 통한 국가 개혁을 주장하면서 노동-보수 양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을 흡수하며 세를 불렸다.

영국은 어디로 갈까? 싱가포르형 탈규제 국가가 될까?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유지할까? 결국은 유럽과 재결합하는 방향으로 갈까? 아니면 미국식 경제 모델을 추구할까?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브렉시트 이후의 장기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지역 간 원심력은 더 커진다. 영국을 구성하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 지역은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을 여전히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영국이 분열되지는 않겠지만, ‘웨스트민스터의 시대’ 즉 잉글랜드가 압도적 지배력을 유지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로이터는 적었다. 이번 선거로 노동당은 웨일스 의회에서 한 세기 가까이 유지해온 지배정당 위치를 잃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5연속 집권하게 됐다. 당장 ‘분리’를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4개 ‘국가’의 대표들로 구성된 새로운 상원을 만들거나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애당초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브렉시트를 마땅치않아 했다.

그나마 친유럽 성향인 스타머 총리가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고 반EU 정당이 대약진했으니 브뤼셀도 심사가 복잡하다. EU와 영국은 10년 간 줄다리기를 하다가 스타머 정부 이후 관계가 좀 나아졌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 트럼프 정부와의 갈등 속에 안보협력도 약속했다. 하지만 협상할 게 여전히 많다. 스타머가 집권 이후 ‘관계 재설정’을 강조했지만 진전은 더뎠다. 영국의 안보비용 분담, 규제 조율, 주로 청년층의 자유로운 이동 등이 의제로 남아 있다. EU가 언제 바뀔 지 모를 스타머와 더이상 협상하길 꺼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게다가 2029년 영국 총선에서 패라지가 총리가 돼 약속을 뒤집어버릴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EU와 영국 관계는 당분간 기능부전 상태일 것 같다. 영국의 현실이 우울한 것은, 그 사회적 분열이 온전히 남일 같지 않아서다.

참고 자료

https://www.bbc.com/news/articles/cvgz155y9exo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26/may/11/uk-gilt-yields-creep-higher-as-starmer-speech-fails-to-dispel-investor-jitters
https://commonslibrary.parliament.uk/research-briefings/sn06167/
https://www.ons.gov.uk/economy/inflationandpriceindices/bulletins/consumerpriceinflation/march2026
https://m.korea.kr/briefing/policyBriefingView.do?newsId=156737667#policyBriefing
https://www.euronews.com/my-europe/2026/05/08/why-a-weakened-starmer-will-worry-the-eu
https://www.theguardian.com/politics/2026/may/09/british-leader-keir-starmer-under-pressure-after-heavy-election-losses
https://www.theguardian.com/politics/2026/may/11/keir-starmer-labour-leadership-speech
https://www.reuters.com/world/uk/uks-labour-party-suffers-heavy-early-losses-reform-gains-elections-2026-05-08/
https://www.instituteforgovernment.org.uk/comment/growth-policy-strategy-centre
https://www.lse.ac.uk/research/research-for-the-world/politics/brexit-britain-tribal-politics
https://www.reuters.com/world/uk/divided-kingdom-pro-independence-parties-surge-across-britain-202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