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세계에 제재 칼날 휘두르는 미국의 숨은 손 OFAC

딸기21 2026. 4. 3. 15:37

“이란의 불법 석유판매와 무기생산을 돕는 개인과 단체 및 선박 30여개 대상을 제재한다. 파나마에 선적을 두고 2025년 이란산 석유를 방글라데시로 실어나른 후트 호, 2020년부터 이란산 원유와 가공유 수백만 배럴을 운송해온 오션코이 호, 바베이도스 선적으로 지난해 말부터 이란산 연료유 200만 배럴을 수송한 노스스타 호… 또한 이란 혁명수비대 등에 무기 재료를 조달해준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등의 개인과 단체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다.”
 
2월 25일 미국 재무부 웹사이트에 올라온 공지문이다. 지난해에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최대한의 압박 캠페인’에 따라 미국이 조치를 취한 이란 관련 개인, 선박, 항공기 제재 건수가 875건이었고 올들어서도 수시로 공지가 올라온다. 
 

 
최근에는 레바논 무장조직 헤즈볼라의 자금조달 담당자 등 16명의 개인과 단체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이란은 국제 테러의 ‘뱀의 머리’이며, 헤즈볼라 같은 대리 세력들은 혼란과 파괴를 퍼뜨리기 위한 이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1월에는 “하마스가 은밀히 통제하고 있는 가짜 자선단체들”이 불법 자금모금에 동원되고 있다면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몇몇 단체들을 제재 목록에 올렸다.
 
3월 20일 석유전문매체 업스트림온라인은 미국 제재 때문에 지난해 순손실 1조600억루블(약 19조원)을 기록한 러시아 석유회사 루코일이 해외자산 200억달러 어치를 상각 처리했다고 보도했다. 회수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으니 ‘없는 재산’으로 보고 손실로 처리했다는 뜻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와 휴전하라고 러시아를 압박하면서 루코일을 타깃으로 삼았고, 이후 이 회사 해외자산은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루코일은 미국 투자회사 칼라일그룹에 해외자산을 팔아넘기는 계약을 맺었지만, 이 거래 또한 미국 재무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거대 석유기업 루코일의 해외 자산은 이제 미국 셰브론 등과 함께 사업하는 카자흐스탄의 유전개발권 정도만 남았다. 
 
베네수엘라에 부과된 제재는 올들어 많이 수정됐다. 모두 풀어준 것은 아니고 주로 석유나 석유화학 관련된 제재를 손봐서 미국 기업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이를테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축출한 뒤 1월 29일 발급된 미국 재무부의 ‘일반면허 46호’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국영석유회사(PDVSA)에 원유의 생산과 수출을 허가하되 ‘미국 기업’만 참여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그 뒤 이어진 조치들로 미국 셰브론, 영국 BP, 이탈리아 ENI, 스페인 렙솔 같은 서방 기업들이 줄줄이 사업 허가를 받았다. 
 
미국의 제재는 베네수엘라 정부 채권거래를 제한한 2017년 행정명령, PDVSA를 비롯한 베네수엘라 국영기업과 관련된 거래를 금지한 2018년 행정명령, PDVSA 자체를 제재 목록에 올린 2019년 행정명령 등에 따라 단계적으로 강화됐다. 특히 2019년 8월의 행정명령은 베네수엘라 정부 소유의 모든 자산을 동결시켰다.
 
애당초 미국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부과한 제재였다. 1기 집권 때 베네수엘라 숨통을 죄더니 올들어서는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를 감행한 뒤 제재를 풀고 있다. 하지만 단서조항들이 많다. 3월 18일 발행된 ‘일반면허 52호’는 미국 기업들이 PDVSA와 거래할 수 있는 범위를 대폭 넓히면서도 여러 제한을 덧붙였다. 허가 받은 미국 기업이라도 러시아, 이란, 북한, 쿠바의 기업이나 개인과 거래해선 안 되며, ‘중국’은 별도로 거래 금지 대상이라 못박았다. 모든 거래 계약은 미국 법을 적용받고, 분쟁이 나도 미국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걸 계약에 적으라고 꼼꼼히 지시를 내렸다. 베네수엘라 석유를 미국 기업들이 사가면 그 돈은 바로 베네수엘라에 가는 게 아니라 미국이 새로 만든 ‘외국 정부 예치 기금’을 거쳐야 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조치의 주체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이다. 세계를 상대로 제재의 칼날을 휘두르는 미국의 ‘숨은 손’이다. 
 
웹사이트 설명에 따르면 OFAC은 “미국의 국가안보나 경제 위협에 대응해 특정 외국 관할권 및 정권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 국제 마약 밀매업자, 대량살상무기 확산자 등 악의적인 행위자들에 경제 및 무역 제재를 집행”하는 조직이다. “OFAC의 승인이나 법률에 의한 면제 없이 미국인이 무역이나 금융 거래를 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된다.” 다만 인도주의 활동이나 미국 정부의 공식 업무와 관련된 거래는 허용할 수 있고, 그 경우에는 일반면허를 발급한다고 적혀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미국과 유럽 기업들에 발급된 게 이런 일반면허다.
 
미국 재무부가 외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한 것은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적국의 자산을 동결시키는 조치가 본격화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자 미국 영토에 있는 중국과 북한 자산을 묶어두기 위해 외국자산통제부를 만들었다. 1962년 이 부서가 개편돼 지금의 OFAC이 됐다. 
 
“가장 강력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정부 기관”으로 불리는 이 기구의 역할이 대폭 확대된 것은 21세기 들어서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뒤 재무부가 테러자금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금융제재라는 무기의 위력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 무장조직의 자금줄을 끊는 임무는 이내 사방으로 확대됐다. 2005년 OFAC은 이라크인들에게 의약품과 생필품을 기부한 미국 민간단체에 벌금 2만 달러를 부과했다. 2007년에는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을 중개한 스페인 여행사를 제재했다. 
 
달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달러를 못 쓰게 하는 조치의 위력을 재무부가 실감한 계기는 2005년의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 은행을 북한의 자금세탁 경로로 지목해 제재하면서,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차단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OFAC이 만드는 자산동결 리스트인 ‘특별지정국민(SDN)’과 금융거래제한 목록인 ‘산업분양별 제재대상(SSI)’은 갈수록 늘었다. 아프가니스탄, 벨라루스, 미얀마, 중국, 쿠바, 콩고민주공화국, 에티오피아, 홍콩 등 지역과 관련된 대상자들도 있고 테러조직이나 마약관련 인물 혹은 기업들도 있다. 1977년 만들어진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 제재의 근거가 되는 주된 틀이지만, 러시아 인권침해와 관련해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만든 ‘마그니츠키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과 대통령령이 활용된다. 2026년 현재 SDN에 오른 사람과 단체가 1만7000건에 이른다. 
 
제재가 워낙 많으니 미국과 거래하는 세계의 기업들은 법률 자문과 컨설팅을 받으며 발목잡히지 않을 방법을 고심해야 한다. 국제규약도 아니니 모두가 따를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벌벌 떠는 이유는 단순하다. 미국이 악당으로 규정한 자들만이 아니라 그 제재 대상과 거래하는 자들도 모두 제재하겠다, 이게 바로 ‘세컨더리 보이콧(2차 제재)’이다. 여기 걸려들면 미국서 거래도 사업도 못하게 된다. 글로벌 경제 속에서 미국과 절연할 수 있는 기업과 은행이 몇이나 있을까.
 
범죄나 테러와 관련된 자금은 끊어야 하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나쁜 정권도 제재해야 한다. 하지만 조치를 취하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유엔이어야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를 결의해도 지키지 않는 나라들이 많으니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이 나서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 맘대로 휘두르는 잣대에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미국 내에서는 OFAC 조치들이 표현 자유와 시민 활동을 억눌러 헌법에 위반된다는 소송이 여러 건이었고 제재 명단을 만드는 절차가 적법하지 못하다는 법원 판결도 있었다. 2023년 12월에는 익스체인지재단 등이 재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단체들은 레바논에서 정치토론회를 열기로 했는데 토론에 제재 명단에 오른 이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OFAC이 행사를 막으려 하자 단체들은 “돈 거래가 아닌 토론까지 막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OFAC은 금지 방침을 철회했다. 
 
미국인들은 시민 자유를 들어 반격할 수 있지만 외국 정부나 기업이 미국 제재를 맞받아치기는 쉽지 않다. 2024년 12월 중국 정부와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해커들이 OFAC 시스템에 침투해 정보를 빼갔는데, 결과는 이 해커들이 추가됨으로써 제재 목록이 더 길어진 것뿐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제재는 자의적이며 일관성도 없다. 러시아를 몰아붙인다면서도 주요 에너지기업을 슬그머니 제재 대상에서 빼내 의혹이 제기된 적도 있다. 미국 기업과 합작한 사업은 제재하지 않은 러시아 루코일 사례도 비슷한 예다. 
 
설혹 제재가 풀릴지라도 ‘한번 제재는 영원한 제재’가 되기 쉽다. 2015년 미국 오바마 정부는 이란 핵합의 뒤 외국 기업들에게 이란과의 거래를 허용해줬다. 당근을 쥐어줘야 이란을 길들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다국적 은행들은 거래를 계속 꺼렸다. 이듬해 트럼프 정부가 판을 엎지 않았더라도 오바마의 목적은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언제 또 미국 정부의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에 금융회사들이 협력하지 않은 것이다. 존스홉킨스대 교수 헨리 패럴 등은 미국의 경제 무기화를 다룬 책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에서 “제재의 위력이 너무 강한 까닭에 미국은 오히려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제재에 더해 요즘에는 관세 폭탄까지 꺼내들며 타국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한 나라를 상대로 한 압박에서는 미국이 이길지 몰라도, 온갖 무기를 찾아내 휘두를수록 미국의 신뢰는 떨어진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국제 금융시스템을 만들려 하는 것, 미국의 동맹들까지도 달러가 아닌 통화들에 눈을 돌리는 것은 미국의 횡포가 세계에 불안을 안겨준 탓인 것이다.
 
 
참고문헌
https://home.treasury.gov/news/press-releases/sb0405
https://home.treasury.gov/news/press-releases/sb0420
https://today.lorientlejour.com/article/1500170/us-treasury-sanctions-global-network-funneling-funds-to-hezbollah.html
https://www.upstreamonline.com/finance/lukoil-writes-off-20-billion-of-foreign-assets-in-sanctions-hit/2-1-1963330?zephr_sso_ott=ZDw57Y
https://orinocotribune.com/characteristics-and-scope-of-ofac-licenses-for-venezuela-in-2026/
https://www.globaltradeandsanctionslaw.com/ofac-authorizations-pdvsa/
https://www.longwarjournal.org/archives/2026/01/us-treasury-sanctions-entities-for-supporting-hamas.php
https://sanctionssearch.ofac.treas.gov
https://ofac.treasury.gov/faqs/topic/1501
https://en.wikipedia.org/wiki/Office_of_Foreign_Assets_Control
https://www.justsecurity.org/105426/treasury-reversal-sanctions-free-spee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