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 치하에서 미국의 에너지 지배(American Energy Dominance)가 되돌아왔다.”
지난달 24일 미국 백악관 웹사이트에 게재된 글의 제목이다.
그 열흘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에너지지배위원회‘를 만들었다. 더그 버검 내무장관과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장관이 이끄는 이 위원회는 백악관 소개에 따르면 “에너지 가격 인하, 경제 안보 강화, 그리고 향후 100년 동안 미국 에너지 산업이 세계적인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그동안 환경규제 따위에 밀려 에너지 채굴을 많이 못했는데 앞으로는 더 많이 파내고 더 많이 수출하겠다는 게 정책의 요지다.

트럼프는 27일에는 텍사스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미국의 에너지 지배’를 거듭 강조했다. 이튿날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했다. 미국이 내세운 공격 목표는 여러가지다. 이란 신정 체제를 끝장내는 것 즉 ‘레짐 체인지’, 이란 정부의 잔혹 행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 이란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끝내고 핵무기 개발을 막는 것. 그러나 정권 교체는 국제법상 타국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다.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걸 막기 위한 군사행동은 유엔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미국의 공습이 이어진 3일에도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명분 없는 전쟁의 목적으로 이번에도 석유가 도마에 오른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달 2일 “이란에서 베네수엘라까지, 트럼프는 세계의 석유를 통제하길 원한다”고 적었다. 기사에 따르면 1987년 대선 출마를 처음으로 고려하던 트럼프는 뉴햄프셔에서 “미국은 끔찍하고, 끔찍한(horrible, horrible) 나라”인 이란을 공격해 “그들의 석유 일부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베네수엘라, 이라크, 시리아, 쿠웨이트, 리비아의 자원을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트럼프 1기 때만 해도 이런 말은 특유의 허언 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트럼프는 올초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제거하는 ‘참수작전’을 감행했고 이어 이란을 공격했다. ‘나쁜 나라 자원은 미국 것’이라는 말 같지 않은 주장이 트럼프 2기 미국의 행동양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를 만들려는 나쁜 나라를 상대로 한 레짐 체인지(이란), 정권 교체 뒤 ‘재건’은 그 나라 석유를 팔아 하면 된다(베네수엘라)…모두 20여년 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때 들어본 소리들이다. 2003년 전쟁을 하면서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은 “석유 전쟁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 등 중동 석유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으니 그의 말도 진실이긴 했다. 하지만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이라크 자원 개발권을 노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이쯤에서 한번 짚어보자. 이라크 석유는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파월의 말은 진실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에 거의 손도 못 댔다.
이라크는 북쪽 쿠르드자치지역과 남부에 대형 유전들이 몰려 있는데 특히 남부 유전들은 지질구조가 단순하고 초대형 유전지대인데다 인구가 적고 평탄한 지형이라 생산비용이 낮다. 유전은 모두 땅 위에 있는데 남쪽 바스라 항구라는 수출항과 가까우니 최고의 조건이다. 내부 불안정과 인프라 문제로 이라크가 바라는 만큼 채굴과 생산과 수출을 하지는 못했지만 정치 상황이 비교적 안정되면서 전쟁 이전 수준인 1일 생산량 800만 배럴에 어느 정도 근접해가고 있다. 2024년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안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2위 원유 생산국 자리를 되찾았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자기네 나라 안에서 쓸 원유를 정제할 정유시설 부족, 그리고 세계 전체에서 화석연료 소비가 꺾일 것이라는 장기적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원유 수출은 2023년 기준으로 정부 수입의 90%를 차지했다. 정말 엄청난 의존도가 아닐 수 없다. 석유 소유권은 모두 국가가 갖고 있고, 국영 석유회사들이 생산의 전 과정을 총괄한다. 쿠르드 지역에서는 쿠르드자치정부 천연자원부가 관리한다. 외국 석유회사들은 이 회사들과 기술서비스계약을 맺거나 쿠르드 정부와 생산분배계약을 체결해 채굴과 수출에 참여한다. 미 에너지정보국과 국제에너지기구, 유라시아리뷰 분석 자료 등을 통해 2024~2025년 계약업체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중국 회사들이 두드러진다. 유나이티드에너지그룹(UEG, 联合能源)이 파이하 생산시설을 맡고 있고 중국석유천연가스주식회사(페트로차이나)는 웨스트쿠르나1 유전을 챙겼다. 에리두 유전은 러시아 루코일과 일본 회사 인펙스가, 키르쿠크의 유전 지대는 영국 BP가 개발 중이다.
이라크의 천연가스는 대개 유전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수반 가스’다. 생산 능력이 모자라 가스 대부분을 태워서 날려보내는 ‘플레어링’을 한다. 자원 낭비에 환경 파괴다. 그래서 어떻게든 생산으로 돌려보려고 애쓰고 있다. 핵심 프로젝트인 바스라 가스액화사업은 이라크 회사와 유럽의 셸, 일본 미쓰비시가 하고 있다. 페트로차이나의 모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와 UEG도 2023년부터 할파야와 파이하 등에서 가스를 가둬 액화하는 플랜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토탈은 웨스트쿠르나2 등의 가스생산시설 건설을 맡았다. 쿠르드 지역 천연가스 개발은 BP와 아랍에미리트 회사들이 하고 있다. 수반 가스가 아닌 서부의 아카스 가스전 개발권은 한국가스공사가 갖고 있다가 우크라이나 기업에 넘겼다. 바그다드 북쪽 만수리야 가스전은 이라크 회사와 중국 제레그룹(杰瑞集团)이 개발 중이다.
여러 개발 사업에서 미국 기업 참여는 나사리야 플랜트 사업에 이름을 올린 베이커휴즈 정도만 눈에 띈다. 주요 유전 중 하나인 웨스트쿠르나1 유전 채굴권을 미국 엑손모빌이 갖고 있다가 2023년 중국 기업들에 넘긴 까닭도 있지만, 전쟁 뒤 3년 간의 미군 군정 통치를 거쳐 새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이라크의 입장은 명확했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에는 미국의 입김 아래에 있었던 이라크 새 정부 관리들조차 “국가 자산인 채굴권을 미국에 넘기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를 엎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라크 전쟁 자체가 국제법상 불법이었고 나라 전체에 엄청난 해악을 끼쳤지만, 미국 또한 자기네 인명과 재정을 희생시켰다. 채굴권도 못 건졌으니 이것이 ‘석유 전쟁’이었다면 분명 미국에는 실패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 실패를 트럼프가 되풀이하려는 것일까? 미국은 교훈을 얻지 못하는 나라인 걸까. 아니면 교훈 따위를 얻기엔 미국은 강하고 거칠 것이 없음을 과시하기 위한 허장성세일까.
트럼프의 생각은 20여년 전 석유, 군수자본과 노골적으로 결탁했던 딕 체니 전 부통령이나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베네수엘라나 이란 에너지 자원을 채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미국 석유가 남아돈다. 그런데도 더 파내서 석유 수출에서도 패권국가가 되겠다고 한다. 트럼프의 ‘에너지 지배’ 구상을 단순화하면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미국이 세계 에너지 공급 점유율을 높이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경쟁국들이 무릎 꿇게 만든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수출하는 러시아와 중동도, 에너지를 수입하는 중국과 유럽도 모두 미국의 말을 따라야 하는 세상. 국가에너지지배위원회 설립에 관여한 공화당 외교안보 전문가 리치 골드버그는 “우리의 석유, 우리의 가스, 우리의 광물, 우리의 석탄을 풀어주면 적대국에 엄청난 힘을 투사할 지렛대를 얻게 된다”고 했다.
이미 이런 구상은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미국은 인도를 압박해서, 러시아 석유 대신 베네수엘라 석유를 사게 만들었다. 동시에 베네수엘라를 윽박질러 쿠바로 기름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 베네수엘라는 OPEC 회원국이니, 이 나라 석유를 장악하면 미국은 OPEC에 대한 우회적인 통제 권력도 얻게 된다. 베네수엘라 석유를 둘러싼 기묘한 흐름은 또 있다. 마두로의 뒤를 이은 델시 로드리게스 대통령 권한대행은 석유산업 민영화 법안들에 서명했다. 그러고 나서 베네수엘라 원유 수입은 느닷없이 중동의 카타르에 있는 계좌로 넘어갔고, 카타르에서 다시 베네수엘라 정부로 송금됐다. 참 이상한 경로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가 과거에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면서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도둑질했으니,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베네수엘라 정부에 자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기업과 국가들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들의 소송이나 압류 요청을 피하기 위해서 베네수엘라 돈을 카타르로 보내 일종의 ‘세탁’을 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조 바이든 정부 시절에도 카타르 은행들이 이란의 원유 수출 대금이 들어가는 중개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카타르가 다리 역할을 맡았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은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이 이상한 송금에 대해 “대통령이 해외 계좌를 만들어 통제하면서 미군이 압류한 자산을 팔게 하는 것은 딱 부패한 정치인들이 할 법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가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이득을 챙기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투명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란 정부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이란 자원도 미국의 또다른 지정학적 지렛대로 쓸 수 있을까? 이란은 석유시장을 교란시켜 미국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에너지 지렛대 전략을 쓰고 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세계 시장에 이미 원유가 과잉공급 상태이고, 유가는 예상보다 많이 오르지 않았다. 기름값이 올라가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는 악재다. 미국은 이란 공습 직후 사우디를 움직여 OPEC이 생산량을 늘리게 했다. 러시아도 원유 증산에 동의했다.
그것도 미국의 ‘에너지 지배’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트럼프의 구상은 구시대적이다. 미국이 최대 위협으로 여기는 중국은 재생에너지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아이들의 떼죽음에 화석연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참고자료
- https://www.whitehouse.gov/articles/2026/02/american-energy-dominance-is-back-under-president-trump/
- https://www.whitehouse.gov/fact-sheets/2025/02/fact-sheet-president-donald-j-trump-establishes-the-national-energy-dominance-council/
- https://www.ntd.com/trump-vows-american-energy-dominance-in-texas-rally-ahead-of-primary-elections_1128984.html
- https://www.businessinsider.com/trump-energy-dominance-oil-iran-venezuela-2026-2
- https://www.eia.gov/international/analysis/country/irn
- https://www.reuters.com/world/middle-east/an-overview-irans-energy-industry-infrastructure-2026-02-28/
- https://www.eia.gov/international/content/analysis/countries_long/Iraq/iraq_bkgd.pdf
- https://www.eurasiareview.com/21072025-iraq-energy-profile-second-highest-opec-oil-producer-analysis/
- https://www.politico.com/news/2026/03/01/oil-prices-energy-iran-trump-00806537
- https://www.aljazeera.com/features/2026/3/3/who-is-ali-larijani-the-iranian-official-promising-a-lesson-to-the-us
- https://www.atlanticcouncil.org/dispatches/experts-react-the-us-and-israel-just-unleashed-a-major-attack-on-iran-whats-next/
- https://www.washingtoninstitute.org/policy-analysis/epic-fury-and-roaring-lion-war-scenarios-pressing-postwar-questions-iran
- https://ecfr.eu/article/a-war-with-no-winners-the-costs-of-us-israeli-aggression-on-iran/
- https://arabcenterdc.org/resource/the-us-israel-war-on-iran-analyses-and-perspectives/
'딸기가 보는 세상 > 수상한 GP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 이란 위기 중간 정리 (0) | 2026.03.04 |
|---|---|
| [구정은의 ‘수상한 GPS’] 멕시코, 카르텔, 할리스코 (0) | 2026.03.01 |
| [구정은의 ‘수상한 GPS’] 이란 배 나포한 인도 (0) | 2026.02.23 |
| [구정은의 ‘수상한 GPS‘] 베트남이 ‘미국의 재침공‘ 걱정하는 이유는 (1) | 2026.02.13 |
| [구정은의 ‘수상한 GPS’] 쿠바도 ’연내 레짐 체인지’? 숨통 죄는 트럼프 (1) | 202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