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구기연 , 한하은 , 안소연 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그럼에도, 시민들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 - <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읽고
Even So, We Must Place Our Hope in Citizens
— A Review of A New Perspective on the Middle East
(아시아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I. 들어가며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서아시아센터에서 <아랍의 봄 그후 10년의 흐름>(이하 <아랍의 봄>)에 이어 <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출간됐을 때, 당연히 기대가 컸다. 중동을 옆에서 오래 곁눈질한 사람으로서 이 책에 참여한 학자들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제목 그대로 중동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접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몹시 반가웠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세계 정세가 급변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가자지구나 레바논 상황에 저자들은 누구보다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저자들 입장에선 아쉬움도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욱 반가운 책이기도 했다. 중동 상황뿐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정학의 귀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이미 오래 전에 한계가 지적된 지정학 이론들을 꺼내들며 때를 만난 듯 강대국 중심의 담론들을 유튜브나 기고에서 설파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피로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동의 시민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이들에게는 마이너 감성을 지닌 학자들의 무기력한 희망 살리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그러니 더더욱 시민사회가 중요하지 않은가”라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책의 저자들이 바라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첫머리 이희수의 총론 또한 “그래도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읽힌다. 책에 소개된 것은 10개국 시민사회와 관련된 주제들이다. 앞선 책의 질문은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양립 가능한가”였다.
이번에는 “중동에도 시민사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동시에 중동의 시민사회가 존재하느냐 자체를 의문시하는 시각 즉 ‘중동 예외주의’를 의식하면서도 신중하게 경계한다. 시민사회를 논의하고 있지만 질문 속의 단어는 ‘민주주의’, 그 마저도 안 된다면 ‘민주주의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그런 종류의 예외주의는 도처에 넘쳐난다. 미국과 유럽이 아닌 모든 지역에 대해 어찌 보면 그런 시각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이야말로 이른바 중동 예외주의에 대한 반증이 아니었나 싶다.
예외주의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비하적인, 평가가 다분히 섞인 개념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그저 무지하고 오만한 타자의 시선으로만 봐서는 실제 그 지역 내부의 문제제기를 놓치게 된다. 저자들은 이 지점에서 수식어를 넣어 질문을 살짝 바꾼다. “중동에는 왜 ‘제대로 된’ 즉 서구 민주주의의 근간과 비슷한 시민사회가 없는가”라는 질문에서, “서구의 개념과는 다른, 중동·아랍만의 시민사회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만일 중동·아랍의 시민사회가 미성숙하다면 이슬람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꼬리를 물고 물음들이 이어진다.
책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현장을 잘 아는 분들의 이야기들이라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편 한 편의 글들에 다소 편차가 있고, 질문들에 대한 대답 찾기에 충실한 글이 있는가 하면 학자 개인의 관심사에 치중한 글도 있다. 여러 학자들의 글을 묶어서 내다보니 광의의 주제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실제 글 속의 모색들은 제각각인 한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II. 낙관에서 비관으로, <아랍의 봄>과의 비교
전작과 비교해 관심 있게 읽은 몇몇 챕터들을 들여다보면, 먼저 튀니지를 쓴 엄한진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갖는 다양한 양상을 강조한다. 그는 양자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 시민사회가 국가에 이용되는 관계, 그리고 혁명 이후의 튀니지처럼 정치·사회 전반의 개혁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의제를 생산하고 해법을 찾는 동반자 관계로 구분한다. 다만 튀니지에서도 국가가 반혁명의 길을 걸으면서 양자가 고전적인 긴장관계로 회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동·북아프리카(MENA) 시민사회의 희망의 가늠자였던 튀니지. 결국 권위주의 복귀로 갈 것인가? 전작에 비하면 저자의 전망은 좀 더 비관적으로 바뀐 듯하다. 이것이 튀니지 시민사회의 힘의 한계인지, 그렇다면 어떤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중동 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보수화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은 아마도 다음 연구의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작 <아랍의 봄>은 혁명 이후 이집트 상황을 개관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한새롬이 사회적 기업이라는 구체적이고 새로운 주제를 택했다. 국내에서 별로 들을 기회가 없는 이집트의 사회적 기업이라니, 신선한 문제의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나올 공간이 너무 없다보니 사회적 기업이라는 외피를 쓰거나, 법적인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 형태로 틈새를 찾아야만 하는 이집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사회적 에피소드의 하나처럼 읽혔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틈새’는 이집트 사회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까. 어느 정도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까. 한새롬은 이 책의 북토크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대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24세 이하 연령대가 인구의 절반 이상인 이집트의 인구 구조를 생각할 때, 아랍의 봄 이후 세대, 혁명 트라우마 없는 세대가 성장한 뒤를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독자로서 나의 궁금증은 막연한 미래보다는 더 먼 과거에 가 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세계의 풍경들을 담은 책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 그 거대한 돌들 사이사이에서 만남을 즐기는 청춘들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어쩌면 이집트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를 구성한 것은 그 사진이었다. 기자가 되어 중동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아랍 페미니즘의 본산이자 아랍 최초의 근대식 언론이 탄생한 이집트의 지적이고 모던한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졌더랬다.
그러나 이집트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시민들이 숨을 쉬고 목소리를 내려면 ‘틈새’를 찾아야 하는 사회였고, 세계를 놀라게 한 혁명 이후에도 작은 틈새들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2004년 방문한 이집트에서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히잡을 쓴 여성을 서너 명 밖에 보지 못했다. 2009년의 카이로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높아졌고, 혁명 이후 3년이 지난 2014년의 카이로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서너 명 밖에 볼 수 없었다. 드문드문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목격한 이집트의 이런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어떤 이는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의 사실상 독재 체제 아래에서 “쇄신된 억압”의 공세 속에 이집트의 시민사회가 힘겹게 견뎌나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틈새 또한 그 힘겨운 견딤의 하나이겠으나, 좀 더 긴 역사적 시야 속에서 이집트 시민사회의 부침을 조감하고 종교적 영향이나 MENA 사회 전반의 흐름과 연결하는 또 다른 긴 글을 기대해본다.
시리아는 <아랍의 봄>이 출간된 뒤 격변을 겪었다. 전작에서는 김강석이 시리아 종파 분쟁과 정치 구조를 정리했는데 이번에는 안소연이 ‘화이트헬멧’이라는 단일한 존재에 집중해 글을 썼다. 화이트헬멧은 내전 참상 와중에도 세계에 희망을 준 사람들이었고 시리아 시민들이 살아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준 존재였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이라크나 이집트 같은 주변 아랍국과 비교해 시리아 시민사회의 성격, 유독 시리아의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좀 더 탄탄한 기반이나 역동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새 정부 수립 이후 시리아가 걸어갈 길도.
황의현은 전작에서 분석했던 예멘 대신에 이번 책에서는 이라크를 분석했다. <아랍의 봄>이 이라크에 대해 희망을 담았던 것에 비해 황의현의 글은 훨씬 비관적으로 읽혔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모든 촉수가 묶이고 재갈이 물려져 있던 이라크이지만 2003년 전쟁 이후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시민사회를 놓고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는 한 때는 인구 대비 박사학위 소지자 비율이 세계 최고였던 나라였음을 자랑할 만큼 교육수준이 주변국들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높고, 사담 통치와 전쟁을 겪었다 해도 시민사회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곳일 수 있다고 본다. 저자가 주목했던 티슈린 운동이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의 목소리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현장 연구가 힘든 여건 때문에 전작과 이번 책의 이라크 챕터가 명확히 차별화되지 않은 부분은 다소 아쉽다.
한하은의 쿠르드 여성운동 챕터는 그야말로 흥미로웠다. 세계의 여러 이슈를 보면서 “어쩌면 젠더가 모든 물음이고 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이를 테면 북한 인권이라는 이슈에서, 한국 사회는 그것을 문제 삼아야 하느냐, 거론하는 게 옳으냐를 놓고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반면 유엔 특별보고관 보고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문제의식은 북한 인권 문제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여성인권에 명확하게 초점을 두고 있다.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인권이고 평화이고 화해의 의미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북한 문제 뿐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의 담론들을 보더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민주화가 먼저’라던 시절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다. ‘일단 정치적인 것부터 해결하고 인권은 나중에, 여성은 나중에’라는 식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누구를 위해서, 그 사회의 어떤 것을 바꿔야 하는가? 시민사회의 ‘시민’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누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누가 가장 아프고 괴로운가’라는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시민들이 싸워 이겨 얻어낸 것들이 다시 기득권 남성들에게 배분되는 양상이 되풀이된다. 쿠르드 여성들은 바로 그 ‘가장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며, 동시에 튀르키예나 아랍 사회 전반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다른 쿠르드 사회만의 특수성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온 존재들이다. “문제는 명백하고 해결은 연대에 있다”(270쪽), “우리는 희망으로 걷고, 반항으로 성장하고, 저항으로 승리한다”(273쪽). 책에 나온 쿠르드와 튀르키예 여성운동의 구호들은 모두가 명문들이다.
이란 챕터를 쓴 구기연은 지난번 책에서와 같은 맥락에서 시민불복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여성 중심으로 시위의 혁명적 측면을 분석했다. 히잡 시위 이후의 상황까지 업데이트했는데 올해 들어 이란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이전과는 또 다른 격변에 휘말렸다. 이것은 이란 내부적으로, 중동 정세에서, 글로벌 차원의 지정학적 구조에서 새로운 국면을 가져올 것인가? 혹은 이른바 ‘대리전’ 갈등이 직접적인 무력 충돌로 격화됐을 뿐 거대한 갈등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새로운 낡은 구도’로 갈 것인가? 이 상황에 이란의 시민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으며, 그 반응은 어떤 방향으로 향해갈 것인가? 이미 1990년대 모하마드 하타미 정권 시절부터 외부에서 기대감을 걸고 바라봤던(그리고 그 기대가 번번히 깨져나가고 비극으로 이어졌던) 이란의 시민사회는 MENA 지역, 특히 걸프 아랍 국가들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구기연의 챕터를 읽은 이후의 많은 의문들은 다음 원고에 대한 기다림의 형태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쿠웨이트 디와니야에 엄익란의 글 또한 아주 재미있었다. 중동에 대해 오랫동안 기사를 써왔으나 쿠웨이트에 대해서는 다뤄본 적이 거의 없다. 이는 그 나라가 안정적이고 분란이 거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에서 이번 저작이 “서구식 시민사회 보편론과 중동·이슬람 예외론이 내포하는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서 고유의 역동성을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의식에 가장 충실한 것이 이 챕터였던 듯하다. 근대 이전 사회의 전통적인 이야기 공간에서 출발해 시대 변화를 반영한 담론 공간으로 변해온 디와니야를 통해 엄익란은 서구식 시민사회 개념과는 다른,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다양한 세계 시민사회의 한 장면을 보여줬다.
국내 독자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아닌 까닭에 개념을 소개하는 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지만, 공간이면서 동시에 개념이고 비공식적 제도인 디와니야의 변화까지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디와니야를 시민사회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 정도나 적절할까? 서구식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시민 사회의 역동성 혹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인 시민사회의 존재라는 문제의식과 연결시켜 본다면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저자의 한계라기보다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한계일 것이다.
III. 되풀이되는 전쟁, 되풀이되는 중동 시민사회 담론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이 책은 첫째, 제목에서 선언한 것처럼 전쟁과 석유를 넘어 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준다. 둘째, 여성과 소수민족, 마이너리티의 시각에서 시민사회를 바라보게 해준다. 셋째, 시민사회라는 것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이슬람 사회의 특수성을 동시에 바라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보편성을 기본 전제로 하면서, 특수한 맥락을 설명하며 중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그럼에도 앞에서 구체적인 챕터들을 얘기하면서 지적했듯이 구체적인 물음들, 근본적인 의문이 계속해서 남는다.
중동 예외주의라는 이름으로 중동의 민주주의 가능성을 폄하해온 시각과 같은 것들은 앞서 말했듯 서구가 자신들 바깥의 지역을 바라볼 때 늘상 내놓는 진단이었다. 일례로 권위주의 통치를 오래 경험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각이 있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스스로 강조한 아시아식 민주주의는 그것을 내부화시켜 권위주의를 정당화한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냉전의 압박이 사라진 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민주화됐다. 여전히 권위주의 통치, 심지어 군부 통치도 존재하지만 수 십 년에 걸쳐 변화가 이뤄졌다.
중동에서는 그 변화가 어느 정도나, 어떤 양상으로 일어났을까? 중동 시민사회의 변화, 이 책의 문제의식을 빌어 말하자면 ‘중동에도 시민사회가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오거스터스 노턴(Augustus Norton)은 이미 1993년 중동 시민사회를 논하면서 “중동 전역에서 통치 정권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고 있고, 아랍 정부들이 정당성 위기에 직면했다”고 적었다.
돌이켜 보면 중동의 ‘시민들’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오게 만들었던 계기들은 대개 전쟁이었다. 1991년 걸프전은 그 지역 정권들의 무능함과 약점을 부각시켰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도처의 여성운동, 레바논의 종파적 파편화를 막기 위한 시민사회의 목소리, 미국 패권의 지배와 이라크 봉쇄에 반대한 요르단의 시민운동 등이 걸프전을 계기로 두드러졌다. 그러나 냉전 종식이라는 지구적인 사건의 파장 속에서 아시아와 중남미, 그리고 여러 아프리카 국가의 시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확보한 것과 비교하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진전은 더뎠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투표로 정치 지도자를 결정하고, 언론과 표현과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치 공간이 개방된 곳은 이 지역에는 없었다. 노턴은 자유화와 민주화를 구분한다.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출구를 열고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제한하며 정치적 결사를 허용하는 개혁적 조치’ 즉 자유화 시도는 있었으나 ‘민주화, 즉 자유롭게 경합하는 선거, 대중들의 정치 참여, 그리고 대중의 쇠사슬을 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또 다른 전쟁이 중동 민주화와 시민사회 담론에 다시 불을 붙였던 것을 기억한다.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중동 민주화 구상’을 내걸었고, 골조도 부실하고 근육도 없는 그 허망한 중동 민주화를 위해 중동 시민사회를 지원해줘야 한다는 얘기가 주로 미국에서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슬람주의자들, 기능적 비정부기구들, 전통적인 자선 중심 단체들, 여성운동이나 특정 이슈 중심의 시민운동 등 다양한 갈래들을 포괄하는 시민사회가 중동의 정치, 사회를 개방시키고 있다는 두드러진 조짐은 잘 포착되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에 대한 한 학자의 평가처럼, 낙관적인 예측과 달리 시민사회단체들은 아랍 세계의 지독히 뿌리 박힌 권위주의와 분열을 깨는 데에 실질적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쓸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기대감을 담은 시민사회 담론들이 다시 부상했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통신기술에 접근할 수 있고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중동의 ‘새로운 시민들’에 대한 얘기가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사실 중동 북아프리카 권위주의 정권들의 계속된 집권은 학자들뿐 아니라 나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의문 중의 하나였다. 권위주의 정권들을 지탱해주던 냉전의 무게가 사라진 뒤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이뤄졌는데 왜 저 지역은 그대로인가?
‘아랍의 봄’이 일어나자, 마침내 중동-북아프리카 사회도 민주주의로 이행해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억압을 지탱해주는 정치적 경제적 기둥이 침식되면 민주주의로 이행해갈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사회이론이 이제야 저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게 됐다는 모종의 안도감마저 느꼈던 것 같다. 학자들과 논평가들은 중동의 오래된 정치 구조의 붕괴, 새로운 사회계약을 원하는 시민들의 정치 투쟁에 주목했고 세계 전체가 흥분 섞인 감정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이후 사태는 새로운 전쟁들, 여러 개의 내전들로 귀결됐다.
그럼에도 아랍의 봄은 MENA 시민사회들을 활성화시켰으며 완전히 똑같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 혹은 희망 같은 것들이 많았던 듯하다. <아랍의 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지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랍의 봄 이후 아랍 시민사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대답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모호성, 다양성, 혹은 총체성 자체가 모호하고 다양한 대답을 내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 책의 여러 챕터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시각, 비관적이거나 혹은 낙관적 기대가 섞인 대답들은 근대 이후 MENA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치적, 사회적 구조의 무게가 쉽사리 가벼워질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책의 어떤 챕터는 역사적 무게를, 어떤 챕터는 혁명과 전쟁을 비롯한 최근의 사건들로 인해 꼬일 대로 꼬인 사회적 과제를 드러내 보인다.
IV. 남겨진 질문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MENA의 시민들 또한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고, 무겁게 그것들을 짊어진 채로 변화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거나 갈짓자 걸음을 하고 있다. 튀니지와 리비아처럼 독재 체제가 끝나고 정치적 자유가 생겨난 나라들에서는 비정부기구(NGO)들이 대거 등장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예멘과 시리아에서는 그런 단체들이 폭력과 자원 부족으로 최소한의 기능적인 역할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나 바레인 같은 나라에서는 정권의 억압 속에 시민사회가 여전히 질식된 채 숨 쉴 구멍들을 찾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처럼 애당초 다원성과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조차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랍의 봄’이 진공 속에서 느닷없이 폭발한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서사들을 축적한다. 이집트 반무바라크 혁명 뒤 주목받았던 통신기술과 소셜미디어 역할론, 점점 더 연결되고 초국가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여러 시민사회의 흐름들은 그 서사들이 구조의 무게를 뚫고 스필오버되게 만들었다. 지역적 특수성은 이런 글로벌한 차원과 맞물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책은 국가별 챕터들로 구성돼 있고, MENA 지역 시민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시민사회의 흐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곳의 시민사회는 그저 새로운 억압이나 장애물을 견뎌내는 데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고, 어떤 곳에서는 지역 전체를 휩쓴 이슬람주의라는 시민적인 외피를 쓴 변종 억압이 고개를 들었으나 종교적 측면에 대한 분석 또한 이 책은 다루지 않는다. 공석기가 쓴 결론 부분은 MENA 지역보다는 시민사회론 일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챕터가 하나 더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혁명 이후의 좌절에 여러 전선의 전쟁들이 겹쳐진 이 지역에서, 시민사회의 공간은 조금이라도 넓어질 것인가 아니면 좁아질 것인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시민사회가 장기적으로는 더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까. 그들 사회의 특수성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이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남겨진 궁금증들을 좀 더 이어가자면, 전 세계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청년층의 보수화 경향은 MENA 사회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냉전 종식 뒤 곳곳에서 터져나온 이슬람주의는 이데올로기 공백을 전통적, 혹은 퇴행적 종교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새로운 낡은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 이민자 1~2세대들이 거부했던 히잡을 21세기의 파리의 무슬림 소녀들이 정체성의 상징으로 추구했던 것처럼, 세속국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이번 세기 들어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이 보편화된 것처럼. 물론 20세기의 자유주의 흐름을 뒤집는 양상이 MENA 지역에서는 이슬람주의의 부활로 나타난 것일 뿐, 과거 회귀적이거나 누구 말처럼 ‘부족주의’에 가까운 정체성 정치는 세계 전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MENA의 시민사회가 가진 함수 또한 전통과 현대 사이, 특수성과 글로벌한 흐름 사이에서 요동할 것이다. 중동, 혹은 아랍 공동의 시민 의식 혹은 연대 움직임은 가능할까? 임안나는 이스라엘 챕터에서 그곳 시민사회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내부 정치와 ‘유대인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와는 별개로 가자 학살이나 레바논 전쟁, 이란 공격 등에 대해 이스라엘 시민들의 목소리는 많이 들려오지 않는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사법부 옥죄기에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다지만, 이스라엘 내 평화주의자들 혹은 아슈케나지 ‘진보파’들의 목소리는 이미 2009년 가자 침공 때부터 잦아든 것처럼 느껴진다. 이스라엘 내부의 시민사회 약화와 우경화는 네타냐후가 전쟁을 벌일 수 있게 해준 하나의 배경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시민사회와 신정의 억압에 저항하는 이란의 시민사회가 연대하는 것을 꿈꿀 수 있을까?
역량 있는 학자들의 다채로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한 가지만 더 요청을 담자면, 걸프 국가들, 특히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에 대한 분석도 다음에는 제시해줬으면 한다. 아랍에미리트는 주민 중 자국민이 10% 남짓에 불과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이주민들로 구성된 걸프에서 ‘시민사회’는 어떤 식으로 형성 가능할까? 파리드 자카리아는 저서 <자유의 미래(The Future of Freedom)>에서 아담 쉐보르스키 등의 연구를 인용하며 한 국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000달러를 넘어서는 시점을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임계점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막대한 자원 수익과 적은 인구라는 독특한 구조로 해서 UAE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은 그 예외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 살만해지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통계적으로 뒷받침된 주장은 이 지역에서는 무의미해지는 것인가? 혹은 이 또한 또 다른 예외주의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일 뿐인가? 책이 던진 숱한 물음들은 이만 멈추고, 영민한 저자들의 좀 더 현장감 넘치는 다음 책을 기다려본다.
참고 문헌
구기연 외.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Zakaria, Fareed. 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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