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는 종파 정치가 고착화하고 이란과 시리아 등 역내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네팔과 스리랑카 등지에서는 ‘내전형 분쟁’이 장기화할 것이다. 미국은 군사개입보다는 장기적으로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관여해야 한다.”
글로벌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S)이 2006년 내놓은 연례 보고서의 내용이다. 냉전 종식 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가 자동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취약한 국가들에서 내전이 상시화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하지만 중동의 불안정 탓만 했지, 팔레스타인인들을 굶겨죽이며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잔혹성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SWP)의 ‘중국의 부상: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같은 해 보고서는 제목의 질문 자체가 핵심을 찔렀다. 중국의 부상을 단순한 경제 성장 문제가 아니라 국제체제의 성격을 변화시킬 흐름으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이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워 싸우고 세계를 줄세우기하려 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다.

20년 전 주요 국제기구와 싱크탱크들이 2025~2030년 무렵의 세계를 상상한 것과 지금의 현실을 비교해보면 현실이 과거의 예측보다 우울하다. 미국의 대테러전쟁, 글로벌 금융위기와 중동의 불안정과 세계를 휩쓴 테러를 거쳐왔는데 어째서 지금이 더 어두워 보일까. 그저 지나간 일들의 심각함은 퇴색하고 가까운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뿐일까.
앞서 언급한 독일 보고서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경제전망’, 유엔에 제출된 국제안보 보고서, 영국 스턴위원회 기후변화 보고서 등의 2006년의 전망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미래는 이랬다. 미국의 힘이 약해지고 중국·인도·러시아가 떠오르겠지만 체제를 뒤엎는 도전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결국 체제 안에서 통합될 것이다, 경쟁은 늘어나되 국제질서는 온존할 것이다, 중국은 국제 질서에 점점 더 깊이 편입될 것이며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이 늘어나면 정치적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의 미·중 패권 다툼과 기술을 둘러싼 안보 경쟁은 20년 전 전망보다 훨씬 빠르고 날카롭게 전개됐다. 미국과 세계가 중국을 더 끌어안으면 규칙을 중시하며 세계 질서를 함께 떠받쳐주는 나라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컸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2005년 중국을 ‘책임성 있는 이해당사자’라 표현한 로버트 죌릭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의 말이었다. “상호의존은 평화를 만든다”, 경제적으로 얽히면 친해진다는 믿음이 강했는데 지금은 ‘상호의존의 무기화’가 기정사실처럼 돼버렸다. 나에게 의존하고 있지? 그럼 내 말 들어. 미국과 중국이 하는 짓이 그렇다.
“글로벌화는 후퇴하지 않는다”는 낙관론도 과거의 특징이었다. 2008년의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사건은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다. 세계화와 금융 통합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보였다. 글로벌 공급망이 더 복잡해지고 더 상호의존적이 되면 주요 대국들 간 경쟁보다는 협력이 자리잡을 것으로 봤다. 기후변화는 중대한 위기를 예고하고 있지만 점진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기후변화가 지정학적 갈등이나 안보 문제로 직결될 것이라는 인식은 적었다. 하지만 동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과 시리아 내전은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으로 악화됐고,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021년 ‘역사상 최초의 기후변화 기근’이 일어났다.
20년 전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생각도 낙관적이었다. 정보기술이 더 확산되고 생명공학과 나노기술, 청정에너지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기회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반도체 공급망이 미-중 진영 대결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국제관계의 주요 이슈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무엇이 세계를 더 어둡게 만들었을까. 예측이 서툴렀다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기본 전제들이 흔들렸다. 2008년 금융위기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 자체를 흔들었다. 당시 IMF는 “1930년대 이후 가장 위험한 금융 충격” 같은 표현을 썼더랬다. 정치·사회의 균열과 빈부격차, 양극화는 위기를 거치며 더 심해졌고 포퓰리즘 정치인들과 극우파에 힘을 실어줬다. 팬데믹은 또 어떤가. 이미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는 경고음이 있었지만 코로나19 같은 규모의 전염병은 예측 밖이었다. 결국 20년 전의 예측보다 현재를 더 어둡게 만든 것은 위기들의 연쇄 효과였다. 금융 위기, 내전, 팬데믹, 지정학적 충격이 시간차를 두고 연속해서 발생한 것이다. 과거의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국가 간 대규모 전면전은 거의 예상하지 않았다.
미래는 어떨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2025-2045 과학기술 트렌드’ 보고서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팅 등 신기술이 안보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봤고, 컨설팅회사 KPMG가 지난해 펴낸 지정학적 리스크 보고서는 미·중 전략경쟁, 지역별 강국 중심으로 뭉치는 블록화, 보호무역, 공급망 정치 등 다양한 경향들을 정리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화석연료 사용량이 2040~2050년까지 계속 늘어나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담긴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넘어서 세계 최대가 되는 것은 이젠 시간문제로 보이며, 인도는 지난 연말 일본을 추월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판국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NSS) 문서에서 “서반구(중남미)는 우리 텃밭이니 역외 세력은 손대지 말라”며 제국주의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경제력의 변화가 결국 국제질서를 뒤흔들 것이다. 이제는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앞으로 20년 뒤의 세계는 지금보다 더 암울할 것인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의 평균 기대수명은 6~7년 늘었고,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예방접종을 늘린 것만으로도 효과가 컸다. 에이즈는 치명적 질병이 아닌 관리 가능한 만성 질환이 됐고, 사람 목숨이 달린 약이나 백신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그래도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이제는 세계에서 90% 이상이 초등교육을 받는다. 여자 아이들도 남자 아이들과 거의 비슷한 비율로 초등학교에 간다.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에 합의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용은 2010년대 이후 70~90%가 떨어졌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서아프리카와 콜롬비아 등 여러 곳에서 분쟁이 사라지고 ‘평화정착 메커니즘’이 효과를 거뒀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틀리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수는 있지 않을까.
가자지구 아이들, 가라앉는 섬나라 사람들, 어렵사리 내전을 끝내고 나라를 재건하려는 시리아인들, 미국의 육류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길까 걱정하는 사람들, ‘양극화’에 지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해본다.
“중동에서는 종파 정치가 고착화하고 이란과 시리아 등 역내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네팔과 스리랑카 등지에서는 ‘내전형 분쟁’이 장기화할 것이다. 미국은 군사개입보다는 장기적으로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관여해야 한다.”
글로벌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S)이 2006년 내놓은 연례 보고서의 내용이다. 냉전 종식 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가 자동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취약한 국가들에서 내전이 상시화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하지만 중동의 불안정 탓만 했지, 팔레스타인인들을 굶겨죽이며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잔혹성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SWP)의 ‘중국의 부상: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같은 해 보고서는 제목의 질문 자체가 핵심을 찔렀다. 중국의 부상을 단순한 경제 성장 문제가 아니라 국제체제의 성격을 변화시킬 흐름으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이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워 싸우고 세계를 줄세우기하려 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다.
20년 전 주요 국제기구와 싱크탱크들이 2025~2030년 무렵의 세계를 상상한 것과 지금의 현실을 비교해보면 현실이 과거의 예측보다 우울하다. 미국의 대테러전쟁, 글로벌 금융위기와 중동의 불안정과 세계를 휩쓴 테러를 거쳐왔는데 어째서 지금이 더 어두워 보일까. 그저 지나간 일들의 심각함은 퇴색하고 가까운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뿐일까.
앞서 언급한 독일 보고서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경제전망’, 유엔에 제출된 국제안보 보고서, 영국 스턴위원회 기후변화 보고서 등의 2006년의 전망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미래는 이랬다. 미국의 힘이 약해지고 중국·인도·러시아가 떠오르겠지만 체제를 뒤엎는 도전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결국 체제 안에서 통합될 것이다, 중국은 국제 질서에 점점 더 깊이 편입될 것이며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이 늘어나면 정치적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2005년 중국을 ‘책임성 있는 이해당사자’라 표현한 로버트 죌릭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의 말이었다. “글로벌화는 후퇴하지 않는다”는 낙관론도 과거의 특징이었다. 2008년의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사건은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다. 세계화와 금융 통합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보였다. 글로벌 공급망이 더 복잡해지고 더 상호의존적이 되면 주요 대국들 간 경쟁보다는 협력이 자리잡을 것으로 봤다. 기후변화는 중대한 위기를 예고하고 있지만 점진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기후변화가 지정학적 갈등이나 안보 문제로 직결될 것이라는 인식은 적었다. 하지만 동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과 시리아 내전은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으로 악화됐고,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021년 ‘역사상 최초의 기후변화 기근’이 일어났다.
20년 전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생각도 낙관적이었다. 정보기술이 더 확산되고 생명공학과 나노기술, 청정에너지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기회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반도체 공급망이 미-중 진영 대결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국제관계의 주요 이슈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무엇이 세계를 더 어둡게 만들었을까. 예측이 서툴렀다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기본 전제들이 흔들렸다. 2008년 금융위기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 자체를 흔들었다. 당시 IMF는 “1930년대 이후 가장 위험한 금융 충격” 같은 표현을 썼더랬다. 정치·사회의 균열과 빈부격차, 양극화는 위기를 거치며 더 심해졌고 포퓰리즘 정치인들과 극우파에 힘을 실어줬다. 팬데믹은 또 어떤가. 이미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는 경고음이 있었지만 코로나19 같은 규모의 전염병은 예측 밖이었다. 결국 20년 전의 예측보다 현재를 더 어둡게 만든 것은 위기들의 연쇄 효과였다. 금융 위기, 내전, 팬데믹, 지정학적 충격이 시간차를 두고 연속해서 발생한 것이다. 과거의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국가 간 대규모 전면전은 거의 예상하지 않았다.
미래는 어떨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2025-2045 과학기술 트렌드’ 보고서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팅 등 신기술이 안보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봤고, 컨설팅회사 KPMG가 지난해 펴낸 지정학적 리스크 보고서는 미·중 전략경쟁, 지역별 강국 중심으로 뭉치는 블록화, 보호무역, 공급망 정치 등 다양한 경향들을 정리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화석연료 사용량이 2040~2050년까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넘어서는 것은 이젠 시간문제이고 인도는 지난해 일본을 추월했다고 발표했다. 경제력의 변화는 결국 국제질서를 뒤흔들 것이고, 이제는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앞으로 20년 뒤의 세계는 지금보다 더 암울할 것인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의 평균 기대수명은 6~7년 늘었고,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예방접종을 늘린 것만으로도 효과가 컸다. 에이즈는 치명적 질병이 아닌 관리 가능한 만성 질환이 됐다. 세계에서 90% 이상이 초등교육을 받는다.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에 합의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용은 2010년대 이후 70~90%가 떨어졌다.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콜롬비아 등 여러 곳이 안정을 찾았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틀리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수는 있지 않을까. 가자지구 아이들, 가라앉는 섬나라 사람들, 내전을 끝낸 시리아인들, ‘양극화’에 지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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