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치러진 네덜란드 총선에서 중도파 민주66(D66)이 승리했다. 1당이 됐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찝찝하다. 유럽의 대표적인 극우정당인 헤이르트 빌더르스의 자유당(PVV)과 동점이다. 150석 하원에서 각각 26석을 확보하며 초접전을 벌였는데, 민주66이 해외 거주자 우편투표에서 2만8000여표를 더 얻어 근소하게 득표율은 앞섰다.
정부를 구성하려면 과반인 76석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최대 민주66의 의석은 겨우 저 정도이고 득표율은 다들 고만고만하다. 1~5위 정당이 모두 10%대다. 바꿔 말하면 ‘정당 난립’구도여서 최소 4개 이상 정당이 연합해야 정부를 꾸릴 수 있다. 대부분의 정당들이 극우와는 손 잡지 않겠다고 해서 연정협상의 주도권은 민주66이 가졌다. 롭 예턴 당대표는 좌파에서 우파까지 주류 정당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유권자들은 협력의 필요성을 분명히 알려줬다." 총선 결과가 사실상 공식 확정된 31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극우를 배제할 것이라고 사실상 못박았다. 4일에는 당내에서 정부 구성을 주도할 사람으로 바우터 쿨미스 전 부총리를 지명했다. 그러나 여러 당을 규합해 연정에 합의하기까지는 몇 달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의회는 상·하 양원제다. 임기 4년의 하원(Tweede Kamer) 150명은 유권자가 직접 뽑지만 상원(Eerste Kamer) 75명은 지방의회 의원과 일부 선거인단이 간접 선거를 한다. 상원은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승인 또는 거부할 권한만 있을뿐 법안을 내놓거나 수정할 수는 없다. 상원 의원들은 보통 전업 정치인이 아니고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고, ‘정치’는 모두 하원에서 이뤄진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과거의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선 좌파와 우파 정당들이 정권을 주고받는 양당체제가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예전부터 여러 정당이 의석을 나눠가졌다. 하원 의석을 모두 비례대표제로 뽑기 때문에 0.67% 득표율이면 150석 중 1석을 차지할 수 있다. 그래서 늘 여러 당이 나섰고 어느 한 정당이 과반을 확보한 적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기독교민주파, 자유주의파, 노동사회민주파 등 여러 정당이 공존했다. 1990~2000년대에는 좌우 연합 ‘보라색’ 정부가 집권하기도 했다.
이번에 집권 가능성이 높아진 민주66은 1966년에 창당된 자유주의 정당이다. 중도 혹은 중도좌파로 분류된다. 창당 무렵에는 꽤나 진보적인 색채였다고 하는데 1990년대 들어 폭을 넓혔다. ‘사회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라 불리는 노선을 채택하며 왼쪽에서 가운데로 옮겨갔고, 1994년 하원 24석을 얻는 등 약진을 했다. 당시 연정에 참여하면서 네덜란드의 자유주의적 면모를 세계에 보여준 동성결합 합법화, 안락사 합법화 같은 개혁을 주도했다. 전통적 좌파와는 좀 다르지만 유럽 통합을 지지하고 교육·환경·인권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등 사회 이슈에서 진보적 성향을 유지해왔다. 네덜란드타임스 등에 따르면 주로 대도시, 고학력층에서 인기가 많다. 그러나 지지율은 오락가락했다. 2006년 총선에서 의석이 3석으로까지 줄었는데 2010년대 후반부터 다시 성장하더니 2021년 총선에서는 24석을 얻었다. 2023년 총선에서는 9석으로 줄었고 이번 총선에선 26석으로 늘렸다.

민주66이 집권하면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한 인물은 예턴 당대표다. 1987년생, 38세 젊은 나이에 정치 경력은 짧지만 화려하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진 네이메헌에서 2010~17년 시의원을 했고 2017년 하원에 처음 입성했다. 이듬해 민주66의 원내 대표가 됐고, 지금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으로 옮겨 간 마르크 뤼테 총리의 중도우파 자유민주국민당(VVD) 연립내각에서 2022년부터 기후에너지정책부 장관을 맡았다. 2023년 다시 의회로 돌아가 당대표가 되더니 작년 1월에는 부총리를 역임했다. 스스로 성 정체성을 공개한 동성애자다. 지난해 11월에 아르헨티나 필드하키 선수와 약혼을 발표했다. 집권하면 네덜란드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동성애자 총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때 질문에 뻣뻣하게 대답하는 스타일 때문에 ‘로봇 예턴’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선거 운동 기간 방송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심지어 퀴즈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이번에 내세운 슬로건은 “할 수 있다(Het kan wel)”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슬로건 “할 수 있다(Yes We Can)”의 네덜란드 버전이다.
공약은 복지에 초점을 맞춘 실용적인 정책들로 채워졌다. 녹색 에너지로 연료비를 낮추겠다,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 10를 만들고 매년 10만 채씩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이민, 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도 눈에 띈다. 유럽연합(EU) 밖에서 오는 이들에게도 망명 신청을 허용해 ‘불법’ 이민을 줄이면서, 망명자들이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통합 프로그램에 더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미 2010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가 “다문화 정책은 실패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문을 열어주겠다, 하지만 내 집에 들어왔으면 내 집의 룰을 지켜라.’ 요약하면 민주66의 노선은 이거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면서 물밑에선 차별하고 공존을 빌미로 ‘방치’해오던 다문화 정책의 방향을 바꿔, 통합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예턴 당대표는 “썩은 사과”는 도려내겠다면서 엄격한 법 적용을 내세웠다. ‘강한 민주주의와 법치’를 매니페스토(공약)에 명시했다.
극우로 끌려가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다시 붙잡을 진보적인 사회정책. 예턴과 민주66은 그것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유럽국들 중에서도 극우화가 두드러진 나라였다. 1990년대부터 핌 포르타윈이라는 요란스런 극우 인사가 목소리를 높였고 2006년에는 빌더르스가 자유당을 만들어 이민 반대, 이슬람 반대, 유럽통합 반대를 외쳤기 때문이다. 1인 정당으로 출발한 자유당은 창당 이듬해에 무려 9석을 얻었다. 2010년 총선에서는 24석을 차지해 제3당으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자유당과 손잡으려는 당들은 없었는데, 재작년 총선에서는 자유당이 무려 37석을 차지해 1당이 됐다. 기나긴 협상 끝에 지난해 7월에야 내각이 구성돼 자유당이 처음으로 정부에 들어갔지만 빌더르스의 초강경 반이민 노선 때문에 1년여 만에 연정이 깨져 이번 조기 총선에 이르게 됐다.

그동안 좌파는 뭘 하고 있었을까. 녹색-노동연합(GroenLinks–PvdA)이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좌파 정당이다. 세력이 줄어든 녹색당과 노동당이 2020년대 들어와 정당연합을 만들었고, 내년에는 아예 통합 정당으로 재창당한다. 이번 선거 득표율은 12.8%. 유럽 다른 나라 좌파 정당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민·글로벌화·노동시장 변화 등에 대한 적응이 늦었고 우경화를 제어하지 못해 극우에 밀렸다. 또 탈이념화하는 유권자 흐름에도 적응하지 못해, 포용적 메시지를 내세운 민주66같은 중도 정당에 지지층을 빼앗겼다.
극우가 주요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기정 사실이고 과거의 좌우 유력 정당들은 이미 힘을 잃은 상황이다. 정치적 극단화에 따른 분열과 갈등, 사회적 피로감이 큰데 중도로 힘이 모이지 못하는 분위기가 된지 오래다. 네덜란드 선거는 극우가 계속 공론장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중도가 1당이 됐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징후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영국 가디언은 ‘네덜란드 진보주의자들의 포퓰리즘에 맞선 승리는 세계에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염성 강한 낙관론을 가진 젊은 지도자 예텐”에 주목하며 ‘좌우 유권자 모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빅텐트(큰 천막)’를 세운 개방성을 높이 평가했다.
[CER] WHAT THE DUTCH ELECTIONS MEAN FOR THE NETHERLANDS AND FOR EUROPE
유럽 몇몇 언론들은 극우의 확산이 정점을 지났을 수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며 중도·리버럴 세력이 다시 지지를 결집시킬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했다. 이번 선거에서 극우파는 단골 메뉴인 이민, 난민 이슈에 집중했는데 민주66은 이민 문제를 포함하면서도 주택, 기후, 교육정책으로 이슈를 확장해 좀 더 포괄적인 메시지를 내놓으며 유권자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물론 100% 비례대표제라는 네덜란드의 선거제도 덕이 컸고 극우는 여전히 건재하다. 예텐의 갈 길은 멀다. 그럼에도 ‘중도의 승리’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세계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딸기가 보는 세상 > 구정은의 '현실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구정은의 '현실지구'] 섬유산업 키우는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제조업 꿈 (2) | 2025.10.18 |
|---|---|
| [구정은의 ‘현실지구‘] 카스피해가 점점 줄어들면 (0) | 2025.09.13 |
| [현실지구] 수단의 콜롬비아 용병, 그 뒤엔 아랍에미리트 (4) | 2025.08.15 |
| [구정은의 '현실지구'] ‘AI 교육’ 나선 마이크로소프트 (0) | 2025.07.19 |
| [구정은의 '현실지구'] 부탄에서, 미국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행복'이란 (1) | 2025.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