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카스피해. 면적이 37만㎢가 넘는다. 유라시아 복판에 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아제르바이잔 5개 나라가 접하고 있다. 카스피라는 이름은 고대에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왔다고 한다.
카스피해는 ‘바다와 호수의 중간’이라고들 한다. 염도가 낮은 곳도 있고, 높은 곳도 있다. 주된 담수 유입원은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러시아의 볼가 강이다.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담수 80% 이상이 볼가 강에서 온다. 그래서 볼가 강 하류와 가까운 곳은 염도가 낮다. 평균 염도는 약 1.2%로 바닷물 평균 염도의 약 3분의 1이다. 그래서 주변에 짠물 생태계, 민물 생태계가 다 있다.
카스피해의 물의 양은 세계 전체 호수에 들어 있는 물의 40-44%를 차지한다. 저수량이 약 7만8200 km³로 미국 5대호 다 합친 것의 3.5배다. 그런데 최근 수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라우프 하지예프 아제르바이잔 생태부 차관은 지난달 로이터 인터뷰에서 “30년 새 수위가 2.5m 낮아졌는데 특히 지난 5년간 0.93m가 낮아졌다”고 했다.
카스피해는 자원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대 세계 최초의 해양 유정이 뚫린 곳이 바로 아제르바이잔 바쿠 부근이었다. 호수와 그 주변 카스피 분지 지역의 자원 매장량은 미국 에너지정보국(EIA) 추정으로 원유 480억 배럴, 천연가스 약 8조2700억 입방미터다. 그러나 현재의 채굴량은 아주 많지는 아니다. 원유의 경우 하루 120만 배럴 수준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중반까지, 특히 2차 대전 무렵까지는 바쿠가 소련 원유의 절대적인 공급원이었다. 1940년에는 소련 전체 석유생산량의 72%를 바쿠가 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후에는 시베리아 서부로 원유생산의 무게중심이 옮겨갔고 카스피해 비중은 하락했는데, 소련이 해체되고 연안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표적인 나라가 아제르바이잔이다.
1994년 9월 바쿠에서 체결된 석유 개발·투자 협정은 ‘세기의 계약(Contract of the Century)’이라 불린다. 1991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경제 재건과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 당시 대통령이 외국 기업들과 대규모 합작계약을 성사시켰다. 카스피해 아제리(Azeri)-치라그(Chirag)-구나실리(Deepwater Gunashli, ACG) 유전을 묶어서 영국 BP, 미국 엑슨, 노르웨이 스탈오일, 일본 도쿄가스, 러시아 루코일 등 8개국 11개 기업에 개발권을 팔았다. 2024년까지 30년 계약이었는데 2017년 2050년까지 연장했다. 이 계약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대규모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받아 국가 재정의 바탕을 만들었고 카스피해 에너지 허브로 부상했다. 2006년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출발해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로 가는 BTC 송유관이 완공됐다. 미국과 유럽의 에너지 안보구상, 러시아의 영향력, 터키의 중개역할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고리가 된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내부로 보자면 알리예프의 장기 집권 기반이 만들어졌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집권하고 나서 아들 일함 알리예프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자원 채굴과 장기집권 모델의 대표적인 예다.
정작 아제르바이잔의 원유 생산은 2010년 정점을 찍고 하락세다. 그래서 지금은 천연가스 생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0년 말부터 남부가스회랑(SGC)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유럽에 에너지를 직접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카자흐스탄은 1979년 발견된 텡기즈 유전을 독립 이후 대규모로 개발했고 2001년에는 CPC 송유관을 개통했다. 흑해를 통해 원유를 수출할 수 있게 되면서 주요 에너지 수출국으로 떠올랐다. 2010년대 이후로는 카자흐스탄이 카스피해 석유 생산량의 55%, 아제르바이잔은 약 20%를 차지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9년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가스관을 이으면서 후발 주자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은 자원 대국이지만 카스피해 지역 채굴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다)
그런데 카스피해 물이 줄고 있다. 항구에 선박이 드나들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바쿠의 경우 지난해 주요 수출 인프라인 두벤디 석유 터미널에서 25만 입방미터 이상 호수 바닥을 파냈는데 앞으로 계속 파내지 않으면 안 될 판이다.
생태계는 최대 피해자다. 거대한 카스피해는 기후 지리적으로는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북부 카스피해는 가장 얕아서 평균 수심이 5~6미터에 불과한 지역이 많다. 중부 카스피해는 평균 수심 190미터, 남부는 가장 깊어서 수심 1000미터가 넘는 곳도 있다. 북쪽과 동쪽은 차가운 대륙 사막 기후이지만 남서쪽과 남쪽은 고지대와 산맥이 많고 따뜻한 편이다. 연안 기후가 다양한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다. 카스피해 거북, 제브라 홍합, 카스피해 갈매기 등등 이 지역 동물종 62%가 카스피해 지역에만 사는 고유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이 빠지면서 습지가 줄어드니 동식물이 위협을 받는다. 카스피해 물범은 100년 전 120만 마리가 넘었는데 지금은 7만 마리도 안된다. 겨울철 카스피해 얼음 면적은 20년 동안 40% 줄었다. 수면이 5미터 낮아지면 물범 번식지인 얼음이 81% 감소한단다. 벨루가, 페르시아, 바스타드 등 6종의 철갑상어는 캐비어 때문에 남획될 뿐 아니라, 물이 줄어 여름과 가을 서식지가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알 낳으러 강으로 가는 물길도 곳곳이 끊겼다.
미 항공우주국(NASA) 위성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부터 카스피해 수위는 해마다 7cm씩 낮아지고 있다. 러시아 국영통신 TASS는 올 7월 카스피해 수위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발트해보다 29미터 이상 낮아졌다는 것이다. 러시아 연구기관 측정치로는 2006년부터 2024년 사이에 호수 표면적이 3만4000제곱킬로미터 이상 줄어들었다. 카자흐스탄 아스타나타임스는 러시아 연구기관의 측정을 인용하며 "벨기에보다 큰 면적이 줄어든 것"이라고 했다. 기후변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호수 전체 면적이 37% 줄어들 수도 있다고 한다. 수질은 '깨끗함'에서 '중간 수준의 오염'으로 악화됐다. 카스피해 연안에는 약 1500만 명이 살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지난해 11월 바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이번 세기에 카스피해 수위가 최대 18미터가 낮아질 수 있다, 이번 세기 중반까지 카스피해 유역에서 최대 500만 명이 쫓겨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이 줄어드는 것이 기후변화 탓만은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가 볼가강에 댐을 많이 지은 것도 원인으로 지목한다. 갈등 속에서도 두 나라는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올 5월 첫 회의를 했다.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제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카스피해 문제에 “양국이 진지하게 공동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안에 카스피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하는 공동 프로그램이 출범할 계획이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있는 아랄해는 1960년대와 비교해 면적과 물의 양이 10분의 1로 줄었다. 소금기만 남은 모래 땅에 녹슨 배들이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카스피해가 망가지는 것을 막아야 할텐데 말이다.
아랄해- 사막에 떠있는 배
한때 중앙아시아 일대를 호령한 `티무르의 제국'으로 서방에까지 위용을 떨쳤던 실크로드의 나라 우즈베키스탄. 수십년에 걸친 옛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개발과 성장의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ttalgi21.khan.kr
이미 1998년 유엔과 연안국들이 카스피 환경 프로그램을 출범시켰고, 2003년에는 이란에서 ‘테헤란 협약’이 만들어졌다. 카스피해 5개국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최초의 지역 협약이었다. 유출이나 오염에 대응하고 환경영향을 평가하고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부속 의정서들도 만들었다. 그에 앞서 1998년 출범한 '카스피 환경 프로그램(Caspian Environment Programme, CEP)'도 국제사회의 노력을 보여준다.
연안국들 역시 2002년 투르크메니스탄 아슈가바트 첫 회의를 시작으로 카스피해 정상회담을 열고 있다. 그런데 주된 협의 내용은 카스피해 관련 분쟁을 막고 개발하는 것이었다. 2019년부터 카스피해 경제포럼도 개최하고 있는데 주요 의제는 역시 무역과 경제협력, 어업권 문제, 해상 사고 예방, 국경 안보 협력 같은 것들이고 환경 의제는 다루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1년 10월 경제포럼에서 육상 오염원으로부터 카스피해를 보호하기 위한 의정서가 만들어졌다. 내년 8월에 이란에서 테헤란협약 20주년에 맞춰 7차 카스피해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인데, 국제사회의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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