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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현실지구'] 섬유산업 키우는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의 제조업 꿈

딸기21 2025. 10. 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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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쪽으로 270km 떨어진 하와사.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로 불리는 동아프리카 대협곡, 아와사 호수 기슭에 자리잡은 인구 26만 명의 소도시다. 현지 토착민 시다마 부족 말로 ‘넓은 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주민들이 호수에서 물고기 잡으며 살아가는 작은 어촌이었는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곳에 도시를 짓기로 결심했다. 1958년 호수를 따라 맨 먼저 황제의 별궁이 지어졌다. 당시 지방정부 지도자는 황제를 부추겨 ‘도시화’를 추진하면서 주민 3000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통보도 보상도 없이 집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주민들을 쫓아냈다. 제국은 1974년 붕괴됐고, ‘데르그’라 불리는 좌파 군벌 독재가 뒤를 이었다. 반군의 저항이 계속됐고,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군벌 통치는 1990년대 초반 끝났다. 곧 내전이 벌어졌다. 1994년 새 헌법에 따라 공화국이 새로 출범했으나 수시로 분쟁이 도졌다. 그 세월 동안 하와사는 에티오피아의 흔한 저개발 지역 중 하나였다. 

 

wikipedia

 

10년 전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2016년 7월 하와사 산업단지(HIP)가 문을 연 것이다. 의류, 직물 산업에 초점을 맞춘 이 단지는 130헥타르 규모인데 총 400헥타르까지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 오염물 배출 제로를 목표로 정화시설을 갖췄다. 국제 시장이 요구하는 엄격한 환경 기준에 맞춘 것이다.

 

섬유 산업은 에티오피아가 핵심 부문으로 삼고 밀어주는 분야다. 정부가 전국에 여러 산업단지를 만들고 투자를 몰아주면서 2010년대 이후 급성장했다. 스웨덴 의류업체 H&M, 캘빈클라인과 토미힐피거를 보유한 미국 회사 PVH 같은 기업 공장을 유치하고 수출 거점으로 삼았다. 정부는 반세기 전 아시아 국가들이 했듯이 농업 의존도를 낮추고 제조업 국가로 거듭나려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하와사 산업단지다.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 모든 옷들은 중국에서 만드는 것 같았다. 미국 의류산업 전문가 맥신 베다가 쓴 책 <지속불가능한 패션산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를 보면 2000년대 중반이 되자 서구의 의류산업은 전멸하다시피 한 반면에, 중국에서는 방적기의 스핀들(실 뽑는 장치) 수가 1980년대 1800만 개에서 2015년 1억2000만 개로 늘었다 한다. 중국 남동부 신탕은 ‘세계 청바지의 수도’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빌면 이미 2010년대에는 의류직물회사들이 중국보다 더 임금이 낮은 곳으로 옮겨가는 ‘바닥찍기 경쟁’이 시작됐다.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그리고 에티오피아가 새로운 ‘바닥’으로 자리를 굳혔다. 

 

Hawassa Industrial Park. https://x.com/EthiopiaIpdc

 

실제로 에티오피아의 의류직물 산업은 중국의 아웃소싱에 힘입은 게 많았다. 2008년 중국 민간기업과 지방정부가 투자해 아디스아바바 남쪽 두켐에 첫 ‘중국 투자형 산업단지’인 동방공업단지(EIZ)를 만들었다. 2011년엔 중국업체 화젠(華堅)이 이 단지에서 주문생산(OEM) 공장을 첫 가동했다. 하와사 단지는 중국 국영 철도회사인 중국 토목건축공사총공사(CCECC)가 설계·시공했다. 메켈레, 콤볼차 등등 여러 공단이 중국의 시공·관리 모델을 따라 운영되기 시작했다. 중국 업체들은 자기네 임금이 올라가고 환경 규제가 강화되자 에티오피아를 파트너로 택해 OEM 생산량을 이전시켰다. 미국, 유럽과의 통상 리스크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성장모델이 힘을 받기엔 고초가 많았다. 2020년 11월 시작된 정부와 티그레이족 무장세력의 내전은 2022년 11월 평화협정으로 일단락됐지만 2년 간 40만~6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이 일어나자 미국 PVH 같은 기업들은 철수해버렸다. 물론 에티오피아의 잠재력은 크다. 인구 1억2000만명, 1인당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000달러에도 못 미치는 저개발국이지만 실질 경제성장률은 2022년 5.3%, 2023년 6.6%, 지난해에는 7.3%였다. 여전히 농업이 경제의 35%를 차지하고 제조업 비중은 지난해 25%를 겨우 넘겼으나 아프리카 역내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어 앞으로 내수와 지역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World Atlas

 

하지만 결국 최대 강점은 저렴한 인건비다. 강점이자 한계다. 국제기구들 도움 속에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는 프로그램들이 가동되고 있다. 의류 부문은 여성 노동자가 많기 때문에 유엔 등의 지원으로 여성 역량을 강화하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에티오피아 섬유·의류 노동자 평균 월급은 약 3000비르, 10만원도 채 안 된다. 저임금에 노동조건이 열악하니 이직률이 매우 높고 생산성도 낮은 편이다.

 

산업 자체의 한계도 크다. 당국은 수직적 통합형 섬유산업을 구축하려 한다. 면화 재배, 방적,  직조, 염색·가공, 봉제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이 산업단지에서 이뤄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원단을 수입해 단순 봉제만 담당하고 수출하는 CMT(Cut, Make, Trim) 방식의 공장들이 많다. 물류·운송비가 높고, 도로와 항만 인프라도 부족하다. 

 

교역 파트너들의 ‘배려’에 의존하는 문제도 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은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 유럽연합은 ‘무기 이외 제조품 특혜(EBA)’ 같은 조치로 저개발국 제조품에 관세를 없애줬다. 그 덕을 본 나라 중 하나가 에티오피아였다. 2020년 이후 섬유·의류 수출액이 꾸준히 늘어 연간 1억4000만 달러를 넘어섰다는 보고도 있었다. 하와사 산업단지에는 최대 3만5000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정부는 섬유와 의류산업 일자리 목표를 35만 개로 잡았다. 그런데 2022년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AGOA 대상에서 제외했다. 하와사에는 문 닫는 공장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의류직물부문 일자리 1만1500개가 줄었다 한다. 정부가 유럽 시장을 노리고 수출 다변화에 나섰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Pic: Pinar Alver / Shutterstock.com

 

아프리카의 잠재력은 영원히 ‘잠재력’으로만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싶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대륙 전체에 제조업 중심지들이 생겨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제조업 축은 크게 남부, 서부, 동부 축으로 나뉜다. 남부 중심축은 남아공이다. 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더반, 케이프타운 등 주요 도시가 제조업의 핵심 거점이다. 자동차 조립·부품산업, 철강, 금속가공, 화학·석유화학, 식품가공, 소비재 제조가 활발하다. 특히 요하네스버그 일대는 ‘아프리카의 디트로이트’로 불릴 정도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해 있고 BMW, 포드, 토요타, 폭스바겐 등의 생산라인이 돌아간다. 

 

서부 축에는 나이지리아라는 거대한 내수형 산업 허브가 있다. 항구도시 라고스와 인근 이케자 산업단지가 핵심 제조 중심지다. 인구 2억의 시장 덕분에, 수출형보다는 소비재, 의약품, 플라스틱, 식품가공, 음료, 건축자재, 의류 생산 같은 내수형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려고 42개의 경제특구를 만들어 제조업을 키우고 있다. 이웃한 가나는 비교적 안정된 제조업 기반을 갖춘 나라다. 정치 불안이 없고 영어 사용자가 많아 다국적 기업들이 서아프리카의 관문으로 선호한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의 산업·기술 중심지다. 식품가공, 플라스틱 제품, 소비재, 포장재, 의약품산업에 최근에는 전자기기 조립산업이 커졌다. 정부는 산업단지 개발과 수출지향형 제조업 육성 전략을 병행하며, ‘비전 2030(Vision 2030)’을 통해 제조업이 GDP의 20%를 차지하게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나이로비 부근에는 타투(Tatu)산업단지 등 민간주도의 첨단 제조단지가 조성되고 있으며, 외국 투자 유입이 꾸준하다.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영어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어,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 융합형 산업 발전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평가받는다. 통신회사 사파리콤이 구축한 엠페사(M-Pesa)라는 모바일뱅킹은 케냐를 동아프리카 핀테크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케냐 나이로비. www.ericosiakwan.com

 

고지대 내륙국가 르완다는 1990년대 내전 이후 산업화를 국가 재건의 축으로 삼고 ‘메이드 인 르완다’ 브랜드를 육성 중이다. 수도 키갈리를 중심으로 의류·섬유·가죽제품 제조업이 늘고 있으며, 전자기기 조립과 의료기기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정부가 주도해 IT에 투자를 많이 한다. 정치 안정과 친환경 제조를 앞세운 아프리카 소국의 성공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아프리카연합(AU)은 2023년 ‘어젠다 2063’이라는 이름의 대륙 부흥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아프리카 제조업의 성장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여전히 느린 게 사실이다. 2023년 역내 총생산의 13%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케냐의 엠페사는 개발경제학자들의 엄청난 관심 속에 200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희망’으로 떠올랐고, 유선통신 없이 무선 인프라로 건너뛴 것을 뜻하는 ‘아프리카의 퀀텀 점프(양자 도약)’라는 표현이 인기를 끌었다. 그에 비하면 에티오피아의 성장 모델은 20세기적이다. 동아프리카의 신흥 제조 거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저임금 경공업 중심이라는 한계가 있다. 

 

 

옷을 만들어 팔아 종잣돈을 만들고 중공업으로 옮겨간 아시아의 고속성장 모델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얼마나 유효할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용들이 날개를 달았던 1970~1990년대와 달리 지금 세계 시장은 중국,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저임금 제조국으로 꽉 차 있다. 아프리카가 같은 경로에 들어갈 여지는 과거보다 훨씬 좁다. 기계화와 기술 집약화 때문에 예전처럼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으로 성장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더군다나 코로나19와 무역전쟁 시대가 오자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을 재편, 근거리 생산(nearshoring)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커졌다. 기후변화 대응으로 탄소 규제, 환경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 ‘아시아식 사다리’를 그대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막 옷공장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디지털 경제를 함께 가동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케냐의 ‘실리콘 사바나’나 르완다의 스마트산업 전략은 그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과연 아시아 모델의 ‘21세기형 아프리카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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